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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9 성경인물 복음서 19. 나인성의 과부와 아들의 죽음
  2. 2014.10.22 성경인물 복음서 18. 이방인 백부장은 무엇으로 예수께 오는가?
  3. 2014.10.01 성경인물 복음서 17. 손마른 자의 회복
  4. 2014.08.20 성경인물 복음서 16.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다
  5. 2014.06.25 성경인물 복음서 15.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가 되다

성경인물 복음서 19. 나인성의 과부와 아들의 죽음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11. 19. 12:53

 

(눅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과부의 감정과 탓] 

우리가 오늘 나누려는 말씀은 이 죽음의 모습이 있다. 특히 12절은 구체적으로 상황을 서술한다.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식이 치러지고 무덤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 아들은 왜 죽었을까? 돌연사, 자연사, 자살, 지병. 성경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과부이고 죽은 청년은 독자라고 한다. 그 아들은 과부 어머니의 삶에 굉장히 중요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삶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라도 아들이 죽었다.

자녀를 먼저 보내는 일은 세상에 많다. 성경에도 3종류가 있다. 아들이 죽을뻔 했던 아브라함, 아기가 죽은 다윗, 죽은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요셉의 아빠 야곱..


Q.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과 감정상태는 어떨까? 낙심 좌절 포기.. 멍해진다. 예수께서 ‘울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울고 있는 것같다.

애도의 과정-부분협우수,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Q. 분노의 질문-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면 어떻게 이런 고통을 줄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이 과연 맞을까?

첫째로 하나님은 어디부터 개입하시나?

둘째로,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용서하시는 분이다.

→ 그런데 인간은 왜 하나님에게 탓을 돌리나? 이것이 탓을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보니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나? 아예 처음부터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하시지’라는 생각은 하나님과 무관한 나의 생각임에도 오히려 하나님께 탓과 화를 내는 것이다.

→ 고난을 주고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훈련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을 구분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라..

 

[과부의 감정과 사별]

 

Q. 과부는 어떤 감정일까? 후회? 후회는 죽는 사람을 두고 꼭 하게 된다. 그때 이랬어야 했는데.. 이렇게 갈 줄 알았다면 ..

→ 여러분은 뭐가 후회가 되던가요?


Q. 또하나의 감정은? 죄책감.

후회 속에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 자신 탓으로 돌린다.

사별을 겪는 사람은 동시에 두가지 상실-죽은자에 대한 상실과 그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상실

자신의 믿음체계를 원할하게 되는지와 비탄을 지체시키는지를 알아야 하며, 공감적인 성직자가 전통 안에서 지속적인 희망의 기회를 갖게 한다.


사별의 과정, 4가지 기본적인 임무의 완성

1.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인 것

2. 비탄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

3. 죽은 자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

4. 감정적으로 죽은 자의 위치를 다시 정리하고 생활을 지속하는 것


Q. 또하나의 감정? 엄마의 착각-엄마는 살리고 싶은데 정작 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에 대해 묵상하라.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것을 느껴라.

→ 우리 자녀들은 살아 있는가?


Q. 소중한 것이 죽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죽었을까?

Q. 또 우리 가족에게 죽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 무엇이 내 삶에, 우리 가족에게 죽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 그리고 그 대상의 죽음으로 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상담자 예수님과 생명의 주님의 모습]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 나인성으로 → 헬몬의 북쪽 기슭의 갈릴리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다.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성문에 도착했을 때 예수께서 보신 것은 장례식 행렬, 죽은 자를 메고 나온다. 성사람들이 많이 함께 하고 있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 ① 과부를 보신다 ② 불쌍히 여기신다. ③ 울지 말라 하신다.

cf. 주께서 → 퀴리오스, 누가복음에서는 처음 나오는 표현. 복음서기자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 불쌍히 여기다.(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고달픈 삶을 살아왔을 한 여인의 마지막 희망까지도 잃었다. 예수께서는 뼈속같이 통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 이것이 상담의 한계, 상담은 죽은 자를 살리지 않는다.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신다. →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는 과정

cf.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신다. → 죽음은 죄의 결과이므로

- 관=들 것 or 뚜껑없는 관

- 내가 네게 → ‘네게’라는 것은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이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죽었던 자 → 이미 죽은자로서 살수 없는 존재이다.

- 어머니에게 주시니 →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돌아왔다.


⇒ 예수께는 두가지의 모습이 있다. 상담자 예수와 생명의 주인인 예수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다. 상담자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상담자로는 할 수 없는 생명의 주님으로 우리에게서 죽은 것을 다시 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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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8. 이방인 백부장은 무엇으로 예수께 오는가?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10. 22. 13:3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1885년)로 기독교 신앙이 돋보이는 종교문학이다.

→ 구두장인인 시몬이 하느님에게 벌을 받아서 세상에 온 천사 미하일을 돌보는 사건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톨스토이의 러시아 정교회 신앙이 담긴 작품.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음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자각하는 못하는 것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눅 7: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 마태복음?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 강조, 누가복음? 백부장의 열정과 겸손함 강조

- 마태복음? 간결한 기록을 위해 대리인 역할을 생략, 누가복음? 백부장이 유대인 장로들과 자기 벗들을 통해 간구함


(마 8: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눅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 사랑하는(티마오 τιμά́ω) 존중받는 소중한, 구체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품는 감정

⇒ 백부장의 인격이 보인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관계를 초월한 모습


(눅 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 과정 : 1. 소문을 듣고, 2. 장로 몇을 보내고, 3. 종을 구원하길 청한다.

- 백부장의 인품과 겸손

1. 직접 나서지 않고 유대장로를 보낸 것은 피지배민족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름을 보여준다.

2. 청하다(에로타오 ἐροτά́ω) - 요청하는 사람이 요청받는 사람과 동등하거나 친밀한 관계일 때 쓰는 단어

⇒ 추측 : 평소 유대인과 친밀한 관계이고 회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유대교에 호의적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신앙인으로 보인다.


(눅 7:4-5)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 백부장의 요청을 장로들의 간청한다. 합당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말한다.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마 8:7-9)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눅 7:6-8)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예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백부장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태),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누가)

⇒ 치료의 권세를 가진 분의 한마디와 백부장의 고백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 예수의 반응 :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마 8:11-12)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 마태복음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눅 7: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있었더라.』

- 마태복음에만 나옴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0)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


핵심 : 백부장의 경험고백과 예수의 칭찬

(마 8:8-9)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눅 7:6-8)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방인 백부장은 무엇으로 예수께 오는가?

- 경험으로 →

- 성향으로 →

- 욕구, 바램, 기도 →

- 자각으로 →

- 습관으로 →

Q. 우리도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기도하고 바라고 믿고 고백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왜 그를 칭찬하는가?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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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7. 손마른 자의 회복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10. 1. 11:07

 

(막 3:1-5)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한쪽 손 마른 사람-마르다(엑세라이노 ξηραί́νω) 신체일부가 굳어지는 상태, 사고나 중풍병 등으로 손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

주시하다(파라테레오 παρατηρέ́ω) 면밀하게 지켜보다, 몰래 살피다, 신중한 태도로 준수하다.

탄식하사 노하심-노하다(오르게 ὀργή́) 일반적으로 감정적인 분노

                탄식하다(쉴뤼페오 συλλυπέ́ω) 함께(συν) + 슬퍼하다 괴로워하다(λυτέ́ω)

                →어떤 사람이나 그와 함께 깊이 슬퍼하고 고뇌한다.

              ⇒ 공의로운 신적 분노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것

              ↔ 바리새인의 주시하는 모습과 다르다.

회복되었더라(아포카디스테미 ἀποκαθί́στημι)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오다는 의미


예수께서 보시는 바리새인과 환자의 모습은?

바리새인이 보는 예수와 환자의 모습은?

환자가 본 예수와 바리새인의 모습은? 
 

(마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태복음에는 그들의 유혹이 있다.

(막 2:27-28)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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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6.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8. 20. 17:10

[38년된 고질병]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장소의 이동으로 초점은 예수에게 있다. 그가 무엇을 하시는가 보고 있다.

cf. 유대인의 명절→유대인이면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절기로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는 예루살렘 반경 22km 이내에 있는 모든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순례하도록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요 5:2-4)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상황과 장소를 설명하고 있다.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고, 거기에는 행각이 다섯 개 있으며, 많은 병자, 맹인, 다리저는 사람들, 혈기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다고 한다.

- 누워 → 이들의 상태는 누워있다. 이들의 목적은 모두 치유받기 위해,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단한가지의 희망이기에 거기에 있다.

-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 미신이나 민간신앙같은데 근동지역에 퍼져 있는 일종의 신앙이다.

-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 그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증 환자들이며, 맨먼저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절박한 바램을 가진 이들이었다.

⇒ 이러한 배경과 그곳 분위기와 신앙에 대해 기록한 것은?


(요 5: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 이야기의 핵심주인공이다. 그는 병에 걸린지 38년이나 되는 환자였고, 그 병으로 거동조차 어려운 중증이었다.

 

 

[38년된 병자의 마음 vs 예수의 마음]

 

명량에서 "만약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수만 있다면 말이다."

"두려움에 맞서는 자, 역사을 바꿀것이다."


1유형 :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틀릴까봐

2유형 : 도와주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까봐

3유형 :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인정받지 못할까봐

4유형 : 지지공감 못 받아서 왕따를 당하고 내 존재를 사람들이 모를까봐

5유형 : 아는것이 없어 무능할까봐

6유형 : 최악의 상황이 닥쳐 안전하지 못할까봐

7유형 : 고통이 많아 행복하지 못할까봐

8유형 : 지배통재당할까봐

9유형 : 갈등이 생겨 관계가 끊어질까봐


(요 5: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 이야기의 핵심주인공이다. 이 한마디가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하게 한다.

Q. 처음에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 왔을까? 바로 고쳐질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시간만 지날 때 그는 어떤 마음은 어떨까? 수십년 걸렸을 시간과 반복된 실패감은 그를 어떻게 했을까? 자신보다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 그럼, 이것으로 끝인가? 다른 방법없이 민간신앙만 믿고 그곳에 있는 그에게, 더 이상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으로 끝인가?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있다.


▸ 이때 이야기는 고질병환자에게서 예수에게로 옮겨진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여기서 예수께서는 3가지를 하신다. 보시고 아시고 말하신다.

Q. 그곳에 많은 병자가 있는데 왜 이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게 되었을까? 많은 병자 중에 왜 그만 보시고 치유하셨을까?

- 그 누운 것을 보시고 →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신다.

-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 관찰을 통해 파악하신다. 병이 깊었고 그동안의 치료가 실패했으며 회복의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아셨다. 병자에게 모든 상황은 암담할 뿐이다.

-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그런 그에게 묻는다. ‘네가 ~ 되기를 원하고 있느냐?’며 상황과 달리 그의 마음의 의지에 대해서 묻는다. 즉 상황을 보며 낙심하는지, 아니면 낫기를 바라는 갈망하는지를 물으신다. cf. 38년된 병자가 마음은 원하지만 행동도 정말 갈망할까?

⇒ 예수께서는 그 환자가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더불어 무엇보다 예수를 의지하는 강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즉 그것을 물어보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시선은 베데스다연못에만 있었지만 이순간 자신 앞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Q. 매일 고질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 앞에 예수께서 오시면 무엇을 하실까? 보시고 아시고 물으실 것이다.


그럼, 병자는 반응은? 그런 예수의 의도를 아나?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그의 대답으로 확인된 것? 1. 가끔 물이 움직인다는 것, 2. 이때 매우 치열한 경쟁의 분위기가 벌어지고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 3.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도움이 없다는 것.

→ 병자의 의도는? 자기가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즉, 자기 앞에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 병자의 감정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못고치고 있다고 투사와 탓을 하고 있다. 그 감정으로 실패감으로 있었을 것이다.

cf. 예수는 병자를 아시는데 병자는 예수를 모른다. 이모습은 우리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병자는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예수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를 향해 예수께서는 치유의 말씀을 하신다.

→ 예수의 단계적 세가지 명령

1. 일어나라 - 누워 있던 그를 향해 말한다. ⇔ 그 누운 것을 보시고

2. 들어라 - 그가 지금까지 있었던 자리는 그에게 원하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자리다. ⇔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3. 걸어가라 - 익숙한 자리에서 이동을 말씀하신다. ⇔ 이르시되

→ 예수께서는 그의 표현에 대해 지적하지 않으시고 그의 말대로 도움을 주신다. 아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던 그에게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cf. 예수는 정말 그의 말대로

⇒ 3가지는 모두 원하면서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병자의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다.

cf. 익숙한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이다.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그 일이 일어났다. 계속된 치료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전하게 회복된 것을 보여준다.


[정리]

38년된 병자의 하루하루의 삶은 어땠을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고 싶었던 병자는 도움이 없다고만 투사와 탓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감정과 의지를 묻는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그에게 도움이 되어 주신다.

 

[고침받은 자의 변화 vs 유대인의 고착된 모습]

 

지난주 내용의 3가지

1.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보시고, 아시고, 말씀하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신다.

2.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말씀의 내용이다. 삶 속에서 이런 메시지를 듣고 있나?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실까 아닐까? 분명 이 3단계도 우리에게 하신다. 다만 우리를 향한 이 말씀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는가? 아무리 말해도 내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사실 이런 메시지는 우리도 많이 한다. 자녀들에게..

3. 예수께서는 걸어다니라 했다. ‘돌아다니라’는 뜻이다. 치유되었음을 보이라는 것이다. 걸어다닌 것은 치유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결국 나를 향한 치유의 은혜, 내가 치유된 것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였나?


이제 이 병자는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대요’인가?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 그가 치료를 받은 날,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38년만에 즐겁게 자리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을까?

- 안식일 → 그런데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간다.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cf. 안식일에는 어떤 새롭게 하는 일, 창조의 일을 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에 쉬셨기 때문이다.

(요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유대인들이 → 열심인 유대인들이 병자에게 왔다. cf. 그들은 왜 그 병나은 사람에게 왔을까?

-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그들의 관심은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율법적으로 옳지 않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이야기해준다.

cf. 유대인에게 안식일에는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된 날이다. 그들이 보기에 병 나은 자가 자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렇게 보였거나 의도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병 나은 사람의 행동을 정죄하기 위해 율법을 오용하고 있다.

Q. 유대인들은 병나은 자가 지금까지 아팠고 방금 예수에 의해 치료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안다면 의도적이고, 몰랐다면 단지 율법에 어긋나지 말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요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 병나은 자는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나를 낫게 한 그가’라고 말한다. 안식일문제로 이야기를 하는 줄 알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변화의 근원을 분명히 말한다.

(요 5:12) 『그들이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 유대인의 관심은 안식일 율법을 어기게 한 이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들에게 있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상황을 무시한채 규칙을 어긴 것으로만 국한함으로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요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이때까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모르고 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 이후에 예수께서 그를 다시 만난다. 그의 건강한 삶을 위해 더 이상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 하신다. 즉 38년전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닌 병든 중에도 계속 죄를 범해왔음을 말씀하시면서, 회복된 삶을 계속 살도록 하신다.


(요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요 5:15) 『그 사람은 가서, 자기를 낫게 하여 주신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 이전에 누구였는지 몰랐던 고침 받은 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그분이 예수이심을 말한다.

cf. 고침받은 사람은 왜 유대인들에게 가서 말했을까? 그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님 자신의 회복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일까?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안식일규정을 어긴 것에만 집중하고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 유대인의 반응

- 38년동안 병으로 인해 고생한 병자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들이 중요시 여기는 것만 본다. cf. 우리도 전체적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보는 경향이 없는가?

- 고침받은 자가 자리를 들고 다닌 것을 보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그 원인을 예수에게서 찾고 박해하기 시작한다.


* 고침받은 자의 변화

- 38년동안 자리에 있던 그는 치료를 받은 후 자리를 들고 다닌다. 걸어다니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다. 자신의 변화의 모습을 누리고 있다. cf. 우리는 자신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이고 누리는가? cf. 38년된 병자에게 고침을 받고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회복

예수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고침 받은 자는 달라진 삶을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회복의 안식일이 아닌 율법의 안식에 갇혀 예수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 고질적으로 병든 자리에서 38년을 지낸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죄와 멀어지고 회복이 되었지만, 스스로 율법적인 유대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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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5.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가 되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6. 25. 13:07

[부르심에 응답하는 세리 레위]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3-14)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 공통내용?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나를 따르라”하니 그가 일어나 따랐다.

▹ 차이점? 이름이 다르고 마지막 내용이 다르다.

→ 이름-마태(마태라 하는 사람이) 마가(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누가(레위라 하는 세리가)

→ 마태(헬라식 이름) 레위(히브리식 이름)

→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그가 예수를 만난 후 받은 이름이다.

cf. 마가는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에는 주로 ‘마태’(막3:18)이라고 불렀다.    


▹ 세관(τελώ́νιον 텔로니온) -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집, 또는 세금을 받는 징수원이 거하는 조그만 사무실이나 징수 창구

▹ 세리에 관하여

- 리비(Livy 59BC-17AC, 로마 역사가) “세리가 있는 곳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돈을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운영과 군사적인 재정을 지원할 강력한 세금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 로마시대의 세리는 입찰을 통해 세금을 거둬드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 그 결과 지방단체의 관리와 로마의원들과 세리간에 공모가 있게 되었다.

- 예수 시대의 아우구스투스황제(27BC-14AD)와 티베리우스황제(14AD-37AD)의 재위기간에는 심각한 불만이 제기되면서 국민개개인의 재산에 근거한 1%세금을 부과하는 개인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1%이상 부과하도록 지방관리는 세리를 활용하게 되었다.

→ 이러한 세리들의 활동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치를 떨게 되었고, 세리는 죄인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었다.


* 유대인으로 당시 세리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

1. 그들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로마의 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半관리적 입장 때문에 세리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져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멸시 받다.

2. 종교적인 배척을 받았다. 이방의 돈을 취급하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갖는 일을 함으로서 유대인의 율법에 명시된 정결규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3. 비록 사람들의 질시는 받았으나 로마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인 직업과 세리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가 있었다.

→ 이런 유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지극히 불경건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cf. 말씀의 특징-말씀에는 레위의 감정과 마음과 생각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결단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만 나온다.


-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마), 또 지나가시다가(막),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눅)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고 계신다.


-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마),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막),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눅)

→ 보시고(θεά́ομαι 데아오마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응시하며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앉아 있은 것을(κά́θημαι 카데마이) 여기서는 현재분사로 계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예수께서 보신 레위의 모습은 어땠을까?

1. 그는 동서로 도로가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였던 가버나움에 설치된 세관에서 일하였고, 도로세 교통세 관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다.

2. 예수께서는 전도하러 다니시던 중 몇 번 그 길을 지나가셨을 것이고 레위를 주의깊게 보시고 계셨다.

cf. 일반적으로 세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직업적으로는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Q. 그럼 그런 감정적인 대우를 받고 있던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세관에 앉아 있으면서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1. 레위는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고 부르신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는 성실함을 보인다. 그 성실함은 세리로서의 부유함을 누렸을 것이다.

2. 그는 세리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세리로 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즐겁지 않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레위를 지켜 보시던 예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다. 예수께서는 레위의 내면과 성실함에서 무엇을 보셨을까? 따를 만한 사람으로 느끼셔서 따르라 했을까?

Q. 우리를 지켜보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마음을 보실까?


- 일어나 따르니라(마 막)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 버리다(καταλεί́πω 카탈레이포) 떠나다 남겨두다 소홀히하다

Q. ‘모든 것을 버리고’?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했을까? 무엇이 그가 메시야를 따르게 했을까?

→ 레위는 예수의 부르심에 자신의 생업과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를 따른다. 자신이 메시야의 제자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하였다. 즉 레위는 겉을 버리고 속(삶의 기준, 메시야)를 선택했다.


Q.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적이 있는가?


* 메시야를 따른 레위의 마음은 어떨까? 즐겁다. 왜?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정리]

세상을 나쁜 이미지와 시선을 살아가야 하는 세리, 그가 메시야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즐거이 따른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버리며 예수를 따르는가?

 

[마태의 기쁨과 초대]

백아절현(伯牙絶絃)


예수님은 어떻게 레위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돌로 치려할 때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요 14:8-11)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기도중에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 하나님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cf. 감정코치

⇒ 예수께서는 자신의 경험, 아버지의 경험을 가지고 대상에게, 죄인에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품어주셨다.


* 이렇게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한 레위가 가장 먼저 한 행위는?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 공통과 차이점

-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마태)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라고 한다.

→ 잔치 : 데코마이(δέ́χομαι 영접하다)에서 나온 말로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배설한 것이다.

-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마) 세리와 죄인들이(막)이라고 하나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눅)이라고 한다.

→ 다른 사람 : 예수 주위에 있던 자들로,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병을 치유받고자 몰려든 사람들이다.

→ 죄인 : 사법적인 범법자가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취급했던 소외되고 경원시되던 세리와 같은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외적 경건을 중요시했던 바리새인은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어울려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cf. 왕실 혼인잔치 비유(마 22:1-10, 눅 4:16-24)

(마 22:8-10)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눅 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눅 14:21-24)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레위, 잔치를 열다.

-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열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보시고 함께 하자고 말씀하신 분이다.

- 많은 세리와 죄인을 위하여 그들도 초대하였다. 세리는 자신의 처지와 같은 입장이다. 마태는 자신과 함께 했던 세리들도 불렀고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도 함께 초대하였다.

cf. 세리의 마음은 누가 잘 알고 위로해줄까? 세리인 레위는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세리들을 불렀고


[정리]

레위가 잔치를 열다.

예수를 위하여-그 예수께서 자신의 마음을 보시고 불러주셨다.

세리도  불렀다. - 세리였던 레아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왔을 동료들도 초대했다.

죄인들은 불렀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이다.

이처럼 레위는 자신의 아픔과 같은 세리들도 초대하고, 다른 사람 아픔의 사람들을 초대함으로 그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바리새인의 분리와 비방]

 

Q. 예수는 우리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실까?

Q.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분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

Q. 우리는 누구를 부르는가? 같은 입장의 사람, 같은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 그들을 부르는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는가?


(마 9:10-13)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새로운 인물 등장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1. 이들은 죄인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않았다.

2. 이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유대인과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본다.

3.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 선생은 또는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Q. 바리새인이 볼 때 왜 세리와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이 죄가 될까? 오히려 그들의 분리적 행동은 성경적인가?

바리새인의 특징은?

1. ‘분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שׁרפ)에서 파생된 단어로 ‘분리주의자’라는 의미.

2. BC 167년 헬레니즘의 유입과 이교주의 준동(蠢動)을 막고 율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작된 종교분파의 하나.

3.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투쟁했던 핫시딤(Hasidim)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4.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평민 계층으로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경건한 무리들이 대부분.

5. 그러나 경건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에게 공감과 존경을 얻어냈지만 ‘비천한 민중’(암 하아레츠)를 경멸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6. 예수 당시에 이르러서는 형식이나 구전, 율법의 문자적인 적용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식적 신앙에 몰두하여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복음 전파 사역을 끈질기게 방해하였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주동집단이 되었다.

7. 신앙적으로는 사두개파와 반대로 영적인 세계, 부활과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고 모세오경을 넘어 구약을 받아들였다.

⇒ 이들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 또는 민족의 반역자라 할 수 있는 세리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예수의 행동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핵심은 분리의식이고 상대는 낮고 자신은 높다는 의식이다.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 특히 누가복음은 ‘비방하여’에서 보듯이 그들의 마음은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상대를 낮추는 비방의 마음이다. 그들은 레위가 베푼 큰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비방하다-공귀조(γογγύ́ζω), 원망하다 수군거리다. → ‘미완료 능동태3인칭 복수형’을 사용해서 계속해서 수군거리거나 노골적으로 불만과 비난을 했다.


비방하는 이유

1.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죄인취급받는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당연히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방함으로 대중의 인기가 잘못되었음을 말하고자 했다.

2.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미움과 반감을 표현한다. 단지 예수 한사람이 아니라 그런 상황과 지지자 모두가 틀렸음을 강조한다.

3. 예수께서 자신들이 아닌 죄인들을 선택함으로 실상은 그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다. 왜? 자신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삶을 사는 사람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

레위의 즐거운 잔치에 바리새인은 왜 초대받지 못했을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Q. 이런 바리새인의 비방을 들은 레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Q. 만약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의 말에 동의했다면, 옳다고 했다면 레위는 어떨까?

⇒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의 반응에 대해 레위가 무엇을 느꼈을까!.


(마 9:12-13)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1-32)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공통점-마가복음의 내용이 모두 들어 있다.

차이점-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마태)과 회개시키러

- ‘건강한 자’는 누구일까?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의 영적 교만의 모습

- ‘병든 사람’은 누구인가? 바리새인이 비방하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사람들, 즉 죄인이다.

⇒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의 실상은?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호세아 6:6의 인용문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긍휼?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   히브리어 ‘라함’과 ‘헤쎄드’

라함 - 슬픔, 애통, 어머니의 자궁

헤쎄드- ‘자비’ 실제적인 행동과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는 포괄적인 말

ex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제사의 본래 의미를 잊었다는 것.

→ 너희는 가서 하신 ...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좀더 배우고 오라는 식으로 랍비의 말투이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의’를 행한다고 믿고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 그럼 죄인은? 유대교와 유대정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세리의 모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의 비방과 예수의 반응을 보고 있는 레위는 어떤 마음이 들까?

이것을 들은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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