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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22 성경인물 복음서 09. 사람을 회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회복
  2. 2013.12.19 성경인물 복음서 08. 예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
  3. 2013.12.04 성경인물 복음서 07. 예수의 어머니, 가나 혼인잔치 안에
  4. 2013.11.20 성경인물 복음서 06. 빌립과 나다나엘
  5. 2013.08.21 성경인물 복음서 05. 예수를 준비하는 자, 세례요한

성경인물 복음서 09. 사람을 회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회복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1. 22. 16:36

 [사마리아 여인의 페르소나]

이 여인의 행동, 반응, 심리 등을 보면서 이 여인이 왜 이런 반응을 하는지 보려고 한다.

1.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보려는 것이다.

2 우리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상대하는 것이 좋을지 보려는 것이다. 

3.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회복은 어디서 올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 배경설명-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

(요 4:5-6)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 ‘πό́λις’를 ‘동네’라고 번역을 했지만 작은 촌락이 아닌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구약에서 야곱의 우물이 있고 요셉에게 준 땅이라고 할 정도의 도시였다.

-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 당시 걸어서 여행하신 예수께서는 팔레스틴의 기후 안에서 쉽게 지치고 많이 피곤하셨을 것이다.

-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 인공적으로 만든 우물 옆에는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1. 텔 발라타(고대 스켐 유적지) 2. 족장 요셉의 무덤 3. 야곱의 우물 성당

-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 정오쯤이다. 요한저자는 공간적 배경과 함께 시간적 배경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왜 시간을 적었을까?

1. 예수께서는 한 낮의 더위를 피해 우물가에 쉬고 계셨다.

2.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을 방문하고 있어 함께 있지 않다.

3.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온 시간을 알 수 있다.

cf. 보통 저녁에 물을 기르는데 이 여인은 왜 이 시간에 물을 길러 왔을까? → 요한저자가 시간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줌으로 이것을 읽는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왜 이시간에 물을 길러올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또한 예수님과의 대화를 우리(독자)로 하여금 더욱 활동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느끼게 한다.


* 예수와 여인이 만나다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 아무도 물을 길러 오지 않을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고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

- 물을 좀 달라 → 물을 길러 온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라는 소제로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인의 깊이 감추었던 부분에 접근하신다.

cf.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여성과 공개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cf. 창세기의 야곱과 리브가가 만나는 모습이 연상된다.

(요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예수께서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옆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 그런데 오히려 제자들이 없었기에 그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

cf. 정통유대인이라면 .... ↔ 이 모습은 예수님과 너무나 다르다. 예수께서는 그런 부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고 계셨다.


* 여인의 반응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 어찌하여(πως) → 예수에게 드린 답변의 억양은 어땠을까? 소극적이고 수줍어 하는 모습일까? 혹은 공격적일까? ‘어찌하여’는 놀라움의 표현(감탄사)이다.

-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 당신은 남자이고 나는 여자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인이다.

- 물을 달라 하나이까? → 여인은 ‘물을 달라’하는 대화를 시도하는 예수께 반문한다.

cf.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대해 여인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 여인이 원했던 것은 물을 길러 오지 않는 것이다. cf.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래서 여인은 물을 달라 말을 걸어오는 예수를 거절한다.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관습과 형식의 관계’로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이 원하는 것은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오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물을 길러 온 것이다. 즉 여인은 스스로를 방어와 보호를 하고 싶어한다.

⇒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려 하고 방어적인 마음은 상대를 보았을때 더욱 공격적이게 된다. ‘절대 내게 말을 걸지마라’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만큼 상대에게 자신의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 자신의 속을 감춘 만큼 겉의 페스소나는 두껍게 형성된다. 그리고 그 페르소나에 익숙해진다. 공격적으로 방어하려는 만큼 감추고 싶은 것이 크다. 즉, 그가 자신을 방어하려는 속은 아무에게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이고, 이것이 그녀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행동했던 자신의 상황이다. cf. (요 4:16-18)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즉 여인의 공격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대함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며 그 결과 아무도 자신을 상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 그러나 문제는 자신도 그 문제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상대의 잘못에서 찾는다. 그래서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며 성격장애적인 모습을 보인다.

cf. 성격장애 혹은 인격장애는 보통 인구의 10%정도 크고 작게 앓고 있다. 종류는 10가지가 있다.(DSM-IV) 그중에 예로 ‘회피성 성격장애’는 대인접촉을 불편해하고 수줍어 하고 부정적인 평가에 대한 과도한 불안 등이 생활과 행동 전반에 나타난다. 대인접촉, 즉 사회적 상황을 피한다. 이들은 거절과 배척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은둔적인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남들과 안정된 친분관계를 갖기 열망한다. 그러나 상대로부터 오는 거절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건없이 확고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대인관계만을 갖고자 하는 특징이 있다. 자존감이 낮으며 거절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 때문에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와 은둔적 생활을 하게 된다. 공포성 회피나 사회공포증이 나타날 수 있다.

⇒ 이들은 고칠 수 있을까? 예수 안에서 어떻게 회복할까?

 

[예수님은 어떻게 대화하시나? ]

 

 

대화는?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는 것’


* 대화의 몇가지 요령

1. 대화하는 시간은 15분보다 1시간이 더 좋다.

2. 대화는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 대화는 다른 것(전화, 노크 등)으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4. 진지하고 인간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5. 눈은 대화에서 중요하다.

6. 대화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7. 특히 대화를 통해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면 말을 잘하기 보다는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 대화를 막는 것은?

1. 상대가 말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와 연결하게 되는 경우이다.

2. 상대를 일정한 틀에 맞추려는 것이다.

3. ‘서두르는 것’이다.


* ~다움

1. 특별한 책임감이 있다.

2. 특별한 권한이 있다.

3. 특별한 자신감이 있다.


[물을 달라는 예수께서 주시려는 것은?]

 

 

목적 → 결국 나와 예수는 무엇을 주고 받을까? 예수는 내게서 무엇을 보고 주시려 하며, 나는 예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며 무엇을 요구하는가?

* 우물가로 오고 있는 여인을 보며 예수께서는 무엇을 보실까?

* 그런 여인의 모습과 느낌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시고 무엇을 말하나?

* 예수께서는 그런 그녀에게 대화를 건다. ‘물을 달라’한다.

* 예수의 상황은 어떤까? 목마르고 배고프다. 즉 예수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 물이 필요해 물을 길러 오는 여인 vs 목말라 물이 필요한 예수..

cf.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나? 나는 무엇을 채우려 하나? 우리가 있는 곳에서의 우리의 생각은 어떤가?

* 중요한 것은 무엇을 채우려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른다면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정리 1] 예수께서는 여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셨고 물이 필요하여 길러 오는 것을 보았다.

[정리 2] 그다음 예수는 여인이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끼는 그것을 채우기도 전에 달라고 하신다.


* 여인을 예수께 물을 줄 수 있을까?

⇒ 물이 필요한 여인에게 불안 주눅으로 힘들게 물을 길러 오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시는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달라 하실까?

→ 내가 원하는 그것 +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 ex 물 + 예수께서 주시려는 것 ⇒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요 4:10-12)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0절,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을 말한다. ‘너는 그에게 구하고 그는 네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한다. 어떤 생수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14절)

→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무지’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린다.

- 생수 :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물’이다. 유대인은 고여 있는 물을 죽은 물이라 생각했고 흐르거나 솟아오르는 물을 ‘생수’라고 했다.

* 여인의 반응-질문과 의문. 11-12절은 어떻게(how)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이 크단 말인가요?

-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여인은 예수께서 하시는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엉뚱한 질문 겸 대답을 한다. 그러므로 여인이 보기에 두레박이 없는 당신이 무슨 물을 주겠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즉 여인이 보기에 예수는 빈손이고 도구가 없기에 무능해 보인다.

cf. 이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예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의 첫 행위는 의문과 질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하실건가요? 어떤 방식으로 하실건가요? 나도 나의 기도를 보아도 그렇다.

-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질문이다. 여인은 예수께서 야곱보다 크지 않다는 전제로 확신하며 질문한다. → 비교급을 사용함으로 예수는 몰라도 야곱은 위대한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확신한다.

⇒ 자신의 굳은 판단과 고정관념은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임의로 판단내린다.여전히 여인은 주관적으로 닫혀있다.

⇒ 그럼에도 이야기는 2단계로 넘어왔다. 순전히 예수에 의해서.. 이야기의 주도는, 심지어 여인을 향한 삶의 주도는 예수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여인은 그것을 모를 뿐.. 우리처럼..

 

[삶의 질을 높이려면?]

 

<요한복음 4:13-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7,9)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12)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내가 보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 4:16-19)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1. 이날은 자신의 신앙과 소신을 위해 죽음으로 최선을 다한 분들의 사형날이고 사형선고일이다.

2. 이들은 천주교인으로 한분은 주교였고, 한분은 세례명이 도마였다.

3. 그런데 발렌타인데이는 일본상술로 덮어지고 우리나라도 굉장한 기념일인양 그 정신은 없어지고 쵸코렛만 난무한다.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1-12)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어느 심리학자 :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내 아버지의 이미지를 넘어설 수 없다’

→ 굉장히 오랜 동안 우리는 이 영향 안에 있다.

→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자신이 겪은 아버지의 경험이 굉장한 상관관계가 있다.

⇒ 내가 보고 느끼는 그려보는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과 다르다.

→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Q. 우리의 기도는 문제를 보며 기도하는가, 예수님을 보며 기도하는가?

(요 4: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 4:17-18)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자세히 보니, 주의 깊게 관찰해서 보니, 새롭게 경험해 보니

 

[여인의 회복을 위한 근원적인 것은?]

(요 4:16-19)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3가지 명령, 가라. 불러라, 데려오라.

→ 부르러 갈 남편, 부를 남편, 데려올 남편이 있다.

cf. 회복의 과정은 행동이다. uncovery → discovery → recovery


-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 부르러갈 남편이, 부를 남편이, 데려올 남편이 없다고 한다.

cf.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첩도 정식아내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내연의 여자는 구별된다. 유대사회에서 이런 경우 부정한 관계가 되고 처벌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결혼을 하여 남편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이 예상된다.

-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네가 이것을 정직하게 말하였다’로 번역.


cf. 이야기는 과정은? “너와 같이 사는 그 사람은 남편이니? → 아니요, 남편이 아니예요 → 네가 바르게 보고 있구나.”


그렇다면, 여인에게 없는 것은? 여인에게 남편은 무엇인가?

1. 여인은 물이 없듯 남편도 없다.

2. 겉으로 들어난 물과 남편의 부재는 삶을 비어있게 한다. 낮에 사람을 피해 물을 길러 가게 한다.


ex) 만약 일반 상담이라면..

⇒ 기독교적 회복은 이렇게 심리분석을 하고 끝내나?


(요 4:19-20)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28-30)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Q. 여인의 진정한 회복은 어디서 오는가?

Q. 그렇다면 우리가 가려서 깊은 것을 못보고 하는 것이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것, 가린 것,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일까?

 

[메시아를 만난 여인의 질문]

 

* 회복으로의 반전

(요 4:19-20)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그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지자’로..

Q.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여인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까? 자신에게 관심있던 것을 묻는다.

→ 질문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동안 궁금했던, 해결하고 싶었던, 그러나 다른 것으로 인해 억제되고 있었던 그것을, 물어볼 대상을 발견하자 겉으로 드러낸다.

Q. 우리는 질문할 대상을 찾았는가? 그 대상에게 어떤 질문을 하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속마음은 무엇인가?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여인의 어법에는 비교가 있다.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 이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cf.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당신은 유대인남자, 나는 사마리아 여자

Q. 여인은 왜 예배에 관심을 표현하는가?


cf. 요한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놓았을까? 전체적인 맥락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의 표적은 이제 영생과 예배로 연결되고 넘어가고 있다.

①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말씀이셨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② 안드레,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③ 나다나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④ 가나안혼인잔치, 물떠온 하인만 표적을 알고, 제자들이 믿다. (요 2:9,11)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첫표적 : 물→포도주로

⑤ 세상사람들의 반응과 관심, 표적을 보고 믿다. (요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모두 아신다. (요 2:24-25)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⑥ 니고데모, 표적에 관심을 표현하고 예수의 표적에 대해 단정한다.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표적은 이 세대의 관심이고 기준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책망을 듣는다. (요 3: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 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사랑하고 영생을 주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⑦ 그러나 세례요한은 안다. 그는 예수는 흥해야 한다고 한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이런 요한복음의 흐름에서 요한저자는 사마리아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배에 대해 묻는다. 요한의 질문은 당시 기독공동체의 관심과 질문이면서, 지금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대상을 만나자 여인은 예배에 관심을 표현한다. 이것은 그의 관심이 예배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질문한다. 없음에 민감했던 여인이 다른 질문을 한다.

→ 표현은 비교하면서 다소 부정적이지만(걱정, 우리가 틀린다면..) 관심의 내용은 분명하다.

cf.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스룹바벨 성전 건축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일이었다.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참여를 요청한 사마리아인의 요구가 거절됨으로써(스4:1-6, 느4:1-2) 갈등이 시작되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 해결책으로 BC 322년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운다. 이후 약 이백여년간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이 같이 존속하다가 BC129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Hyrcanus BC 135-105)에 의해 파괴됨으로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축복의 산이 그리심산이라고 믿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그곳을 여전히 기도처소로 사용하였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Q. 여인에게 대상은 무엇인가? 왜 대상을 확인하자 부정적인 반응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환자가 의사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따르지 못할 때는 이러한 숨어 있는 강렬한 감정, 특히 분노때문이 아닌지를 일단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는 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숨겨진 분노는 오히려 격한 분노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청년들의 내분에서 용솟음치는 이 격한 분노는, 그들의 과격한 행동이나 심각한 인간적 문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억압되고 은폐된 경우도 많다.

대개 이러한 격한 분노는 두가지 형태로 폭발한다.

첫째, 자제력을 잃고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런 공격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고, 충동적으로 갑자기 폭발할 수도 있고, 때로는 계획된 경로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발생하였건 공격의 목표는 부모, 부모역할을 하는 어른이나, 또 부모상을 가진 사회 구성요소이다.

둘째, 다행히도 젊은이들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잘 다스려서 이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산하는 경우이다. 격한 분노가 이런 식으로 표출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힘이 될 수 있다. 젊은이만 가질 수 있는 깊은 우정, 신의, 자선, 그리고 정의사회를 외치는 데모까지도 포함하며, 인류를 위한 순수한 봉사정신의 바탕을 이루는 강력한 힘이 된다.

이상의 두가지 표현양식은 폭력과 평화라는 아주 상반된 양식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폭력적인 방법과 평화적인 방법은 서로 통합되고 교체된다. - ‘환자와의 대화’ 브라이언 버드


[정리]

여인에게 대상은 분노의 대상에서 평화의 대상으로 통합교체되었다.

새로운 대상으로의 인식은 현실로 인해 억제되었던 것을 꺼내게 해주었다.

새로운 대상은 회복의 질문을 하게 하고 회복으로 전환하게 해주었다.

 

[나를 믿으라]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 성경의 상황과 질문

2. 기록의 상황과 질문

3. 나의 상황과 질문

*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게 묻는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1. 성경의 상황과 질문? 여인은 자신이 그동안 물어보고 싶은 질문, 자신의 상황에서 잊고 있었지만 정말 그 말을 해줄 대상자를 찾으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2. 기록의 상황과 질문? 요한복음은 100년경 쓰여졌다.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요한 공동체는 질문할 것이다.

→ 역으로 이런 상황에 요한기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3. 나의 상황과 질문?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질문하게 된다.


* 여인의 질문에 예수는 답한다.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cf. 객관적 질문에는 객관적 대답이 필요, 역사적 질문은 역사적 근거로 한 대답이 필요, 사실을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대답하면 된다. 예배에 대한 여인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예배에 대해 대답하신다.

1. 이산도 예루살렘 도 아닌 예배할 때가 온다.

2.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3.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4.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 나를 믿으라

→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예배와 예배, 사실과 사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연결고리를 ‘나를 믿으라’고 한다. ‘내 말’이 아닌 ‘나를’이다. 대답이 바른 대답이 되려면 예수를 믿는 믿음 위에 주어져야 한다.

→ 예수께서 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확하게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설사 그분을 선지자로 여긴다면 그 말을 믿게 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이며 또한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 여인의 믿음없음을 책망하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시각,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 예배할 때가 오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단순한 대답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cf.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해 예수께서는 믿으라 할 것이다.


* 요한복음에 나오는 ‘믿으라’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정리]

성경을 읽는 방법은 내용과 기록상황과 나의 상황에 대해 질문이고 대답이다.

질문과 대답을 연결하는 것은 ‘나를 믿으라’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이다.

내 삶에 대해 예수께서 하실 말씀은?


[사람을 회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회복]  

 

여러분은 언제 이런 경험을 하셨나?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나?


* 여인의 관심-예배할 곳은 어디인가요?

(요 4:19-20)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여인의 관심은 물과 비어있음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핵심관심은?


* 예수의 대답-나를 믿으라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예배에 대한 여인의 궁극적인 질문의 핵심을 ‘나를 믿으라’는 연결고리로 풀어준다.

→ 지난 시간 정리-질문과 대답을 연결하는 것은 ‘나를 믿으라’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이다. 내 삶에 대해 예수께서 하실 말씀은?


* 여인의 고백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가운데에서도 예배할 곳이 어디인지 궁금한 여인은 그 대답을 듣게 된다.

→ 그러나 이것은 그의 삶을 지탱해준 고백이었다. 그 여인이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메시야였다. 예배와 함께 여인의 관심은 메시야로 이어진다. 여인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믿고 있었다. 현실로 잊고 있었던 그의 마음의 그것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사실을 품고 있었다.

→ 여인의 메시야 이미지는?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즉, 알려주시는 분이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라고 말한다.

cf. 모든 사람이 메시야에 대해 관심이 있을까? 전도하면 관심이 없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cf. 영생에 관심있어 질문하러온 부자 청년,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이 많아 예수를 따르라는 말에 슬픈 기색과 근심하며 갔다.

(막 10:21-22)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 분명한 예수의 대답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 ‘내가 ~다’는 ‘에고 에이미’의 표현을 사용하신다. 이 표현은 예수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쓰시는 표현이다. cf. 여인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고 했었다.

Q. 이 대답을 여인이 들었을 때 어땠을까? 오실 메시야에 대해 알고 믿고 있던 여인은 자신이 꼭 듣고 싶었던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제자들이 옴

(요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 무지한 제자들이 본 것은 겉의 모습뿐이다. 서로 상종하면 안되는 유대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같이 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대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상하게 보이는 모습일뿐이다. 제자들은 이것만 보였다.

Q. 우리는 상대의 본질을 보는가? 겉에 포장을 보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볼뿐이다.


* 여인의 반응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1. 물동이를 버려둔다. → 물동이는 그의 삶의 전부였다. 여인은 물을 길러왔고 메시야를 만나 지금까지 중요시 여기고 자신의 비움을 채울 물동이를 버린다. 아피에미(ἀφί́ημι) 버리다, 포기하다, 돌보지 않다.

2. 동네에 들어간다. → 동네를 피해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이 마을로 들어간다. 아페르코마이(ἀπέ́ρχομαι) 가버리다, 떠나가다.

3. 사람들에게 말한다. → 사람을 피해 다녔던 여인이 사람들을 만나 말한다.

→ 메시야를 확인한 여인은 즉시로 행동한다. 지금까지의 자신에 대한 평판에 대해 움츠리고 피하고 말하지 않았던 여인이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있다. 오히려 즉시로 행동하는 이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까지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 : 내가 행했던 모든 일을 내게 말해주는 사람.

→ 모든 것은? 물이 없음, 비어있음, 남편이 없음, 생수가 필요함, 예배와 메시야에 관심이 많음 등..

→ 이것은 여인의 경험, 간증, 초점이다. 그가 만난, 그에게 부각된 메시야의 모습이다.

Q. 우리는 어떤 예수를 만나나? 어떤 메시야의 모습이 기억되나? 이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나?

- ~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람을 피했던 여인이 그 대상을 만나면서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다.


* 동네사람들의 반응

(요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의외의 반응이다. 여인을 피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에게 왔다.


4:31-38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


(요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그 사이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증언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동네사람들은 듣고 믿게 된다.

cf. 전하느라 정신없었을 여인은 이 모습을 후에 생각할 때 얼마나 놀라워할까?


* 이후 동네사람들의 반응

(요 4:40-42)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처음 메시야를 알고 믿게 된 이유는 여인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 자신이 경험한 근거로 신앙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처음부터 믿음을 갖고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증언을 듣고 확인을 하면서 그들도 메시야를 분명하게 만나게 되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정리]

현실에 찌든 삶임에도 여인의 깊은 관심은 예배와 메시야에 있었다.

예수는 그의 깊은 관심을 열어 본인이 확인하도록 도우셨다.

여인의 회복은 메시야를 만났을 때 가능했고 그것을 증언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메시야를 확인하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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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08. 예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12. 19. 07:01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예수께 묻다]

(요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 신분을 밝히는 니고데모 - 소속(바리새인), 이름(니고데모), 신분(유대인의 지도자)

→ 그는 산헤드린의 의원으로서 유대인들 중에서 지도자계급에 속한다.

cf. 요한저자가 당시 정통한 랍비요 유대의 최고중앙의결기구이며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고데모를 집중 언급하는 것은 유대사회의 엘리트 중에도 예수께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Q. 이런 신분의 니고데모는 왜 위험과 곤란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엇을 알고 싶어 예수께 왔을까?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언제? 밤에 찾아온다. 저자는 그의 방문시간을 밝힌다. 이는 그가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지도자로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cf. 요한복음에만 3번 나온다.

1. 요 3:1-21 밤에 찾아오다.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

2. 요 7:45-52 예수를 잡으려 할때 소극적이나 반대의견을 말한다. (요 7: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3. 요 19:38-42 예수의 장례에 함께 한다.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 왜? 그는 당시 예수를 좋아하지 않는 다른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밤을 택할 정도로 질문할 것이 있었다.

cf. 반대자에게 찾아오는 경우는 두가지다. 그를 넘어뜨릴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정말 궁금증을 갖고 찾아오는 경우다. 전자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 누구? ‘우리가 .. 아나이다’라고 한다. 혼자가 아님을 말하며 자신과 같은 신분의 대표로 자신이 왔음을 말한다.

- 평가와 존중?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니고데모는 동료그룹을 대신해서 예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의 여러 정보와 행적에 대해 이미 들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

cf. 이것은 바리새파의 의견과 반대된다. 그는 후에 예수를 잡으려 할때 소극적이지만 반대의견을 말한다.(요 7:45-52)

- 내용과 이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는지 그 근거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할 수 있는 표적을 보인다는 것이다.

⇒ 유대교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예수에 대한 정보를 들은 그룹을 대표로 하여 밤에 찾아온다. 그 그룹은 그들이 들은 정보로 통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니고데모의 관심, 그것은 시대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 표적(σημειν) : 지시(특히 의례적으로 초자연적으로), 기적 표적 표시 이적 sign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 6:22-40)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정리]

한 사람의 관심은 시대적인 관심을 질문한다.

그 관심은 행동으로 옮기게 하고 건강한 관심은 메시야를 향한다.

건강한 관심은 살리는 역할을 하고 이후에도 영향을 준다.

건강한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질문하는 니고데모과 대답하는 예수님]

 

 

Q.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질문하기를 원하실까?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계실까?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표적을 질문한다. 개인의 관심이며 시대의 관심을 질문한다. 질문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신지 확인하길 원했고 그 증거로 예수께서 보이시는 표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메시야이심=표적을 행함’으로 이해한다.

cf.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표적인가? 신적인 기적을 우선 보기 원하지 않을까?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눈에 보이는 표적을 통해 메시야를 확인하길 바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을 들으며 예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ἄνωθεν 아노덴), ‘위로부터’(장소), ‘일찍부터’(시간), ‘다시’, → 거듭나다(γεννηθη ἄνωθεν 겐네데 아노덴) ‘위로부터 태어나다, 다시 태어나다’ → 전과정이 하나님의 의해서 가능하다

-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조건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즉 하나님의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 예수의 대답은 동문서답같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공동관심에 대해 니고데모가 전혀 생각지도 알지도 못했던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요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 예수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그는 시간적으로 늙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뒤로 가냐고, 어미의 배로 다시 들어가냐고 묻는다.

cf. 예수의 의도는 위에서 아래였으나 니고데모의 이해는 시간적 방향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 니고데모는 진리에 관심이 많아 예수께 물으러 왔으나, 율법에 정통한 반면 신령한 지식은 부족하거나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 니고데모의 이해는? 혈육적인 이해였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할례를 받음으로 약속의 자녀가 된다는 율법의 유대적 이해 안에서 생각한 것이다.


(요 3:5-8)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cf. 물과 성령은 무엇일까? 물=회개, 성령의 임함?

⇒ 예수의 의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육이 아닌 영적으로, 후퇴가 아닌 위로부터 다시, 하나님의 의해 태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혈육은 그 출처가 보이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났기에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놀랍게 여기지 말라 → 니고데모의 반응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놀랄 정도의 반응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 바람이 사람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지 않듯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도 그러함을 강조하신다.


(요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수사적 질문을 통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한다. 율법에 정통하며 아브라함의 혈육적 관계안에서 이해했던 부분을 넘어 받아들일 수 없음을 말한다.

(요 3:10-15)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 니고데모는 율법에 정통한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위치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이 아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는 사람임을 말씀한다. 그럼에도 남을 가르치는 그 자신조차도 하나님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지 못함을 책망하신다.

cf. 이스라엘의 교사에 대해 예수의 주로 하신 책망은 ‘소경이 인도한다’ 것

(마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우리는 그것을 증거하지만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땅의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위의 것, 위에서 내려온자를 어떻게 이해하겠냐고..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백성들에게 불뱀재앙이 있을 때 거기서 구원받는 방법은 놋뱀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영생을 얻음을 말씀하신다.

⇒ 이렇게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진리에 대한 마음은 받어주면서도 오류에 대해서는 고쳐주시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 니고데모의 오류의 질문은 오히려 복음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다.

cf.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주의와 영지주의가 기독교신앙을 위협하고 있었다. 혈통과 같은 땅의 것을 추구하는 유대인과 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바른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요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땅의 것을 바라보며 이방을 거절하는 유대주의에게, 하늘의 지혜만을 원하며 이 세상을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 그 아들을 보낼 정도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는다는 것 등 당시에 바르지 않은 생각과 종교관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고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라 한다.

[정리] 한사람의 질문의 대답으로 하나님은 그 이상을 넘어 주신다.

한 질문이 다음 시대의 질문에 대답을 받게 한다.

한 질문은 지금 우리의 삶에도 대답을 얻게 한다. 

:

성경인물 복음서 07. 예수의 어머니, 가나 혼인잔치 안에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12. 4. 12:27

[마리아가 보는 것 & 기대하는 것]

(요 2:1-2)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주는 것이다. 어느민족이나 결혼예식은 축제분위기다.

- 예수의 어머니도 : 마리아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 거기 계시고 : 미완료시제로서 계속되는 동작이다. 유대의 혼인잔치는 보통 한주일정도이며, 마리아는 계속해서 혼인잔치 자리에 있었다. 마리아는 가까운 친척관계임을 추정할 수 있다.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께서 그곳에 있게 된 분명한 이유는 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 이렇게 혼인잔치집에 있게된 예수와 제자와 마리아.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경험하는가? 혼인집은 어때야 하는가? 풍요롭고 음식이 넘치고 행복하고..


# 우리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가장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 떨어졌다는 것이다.

(요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떨어진지라 → 이미 떨어진 상태이다. 겉은 풍요로와 보이는 혼인잔치집의 실상이다.

cf. 랍비의 말대로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할 정도 잔치에 포도주는 필수품이다.

Q.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1. 사람은 물질에 영향을 받는다.

2. 현대인의 고민은?

3. 현대인의 신비한 재주는 있는게 보이는 게 아니라 없는게 보인다는 것. 상대적인 빈곤으로 마음은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하고 있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잔치집의 풍요로움이지 부족함이 아니다.

Q. 이렇게 필요한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우리의 반응은?


* 이럴때 필요한 것은? 마리아의 마음과 모습

-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마리아는 그 혼인잔치에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들 예수에게 말한다.

Q. 왜 마리아는 주인이 아닌 아들 예수에게 이 상황을 말할까?

1. 어려운 일이 생기면 큰 아들과 의논한다?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이미 죽은 뒤이며 예수는 실질적인 가장이기에..

2. 마리아는 과거의 모든 과정을 알고 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말한다?

→ 없음을 알게 된 마리아는 시각이 ‘없음’에서 ‘예수’에게로 옮겨간다. 그 안에는 바램이 있다.

Q. 마리아의 행동은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1. 없음을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2. 필요를 해결할 대상이 주인이 아닌 예수임을 알고 예수에게 온다.

3. 예수에게 그 없음을 없다고 말한다. 말한다는 것은 그 다음의 무엇을 바란다는 것이다.

Q.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한다면? ⇒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인간의 모습.

⇒ 결국 우리의 부족을 예수에게 묻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떤 마음으로 물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은 그 비움을 보는 마리아,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한다.


[정리]

마리아는 비워있음을 보고 그것을 채우고 싶어한다. (우리처럼..)

마리아는 그 채움을 누가 해줄지 알고 그에게 간다.

마리아의 시각은 부족이 아닌 채워주는 그 대상에게 있다.

기본적으로 마리아는 기대가 있다.(↔기대가 없다면, 낙심했다면, 열정이 없다면, 말하지도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고 그에게 간다.

 

[마리아의 삶의 습관]  

 

‘예수믿으면 잘되야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한 집에 두 신을 섬기면 큰일난다.’

1. 이런 말을 듣기도 했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도 그렇게 믿는다.

2. 이 믿음은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말한다는 것이다. 무슨 기준? ‘예수믿으면 고통이 없어야 한다’는 기준.


(막 4:35-39)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 14:28-31)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1.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데 고통을 겪는다.

2. 제자들은 어떻게 해볼라고 한다는 것이다.

3. 결국엔 함께 한 예수님에게 요청한다.


* 예수님의 반응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 여자여 → 호칭이 무례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경의 호칭이다.

-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직역 ‘나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즉 그 일은 나와 당신에게 무관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요청을 공손한 어투로 거절한 것이다. 즉 예수님의 판단은 ‘당신이 요청한 것은 나와 당신에게 상관없는 일입니다’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과 무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Q. 그렇다면 내 기도중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 있을까? 나는 기도했는데 예수께서 응답하시길 ‘그 일은 나와 당신에게 무관한 것입니다’ 할 만한 적이 있었을까?

-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 ‘나의 때’=하나님의 정하신 특정한 때, 결정적인 때

→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막 14: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위한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말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것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셨다.


* 어머니의 말씀에 대한 자세와 반응

(요 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하인 :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협조자 ↔ 둘로스(종, 노예)

→ 돈으로 고용된 자라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잔칫집의 일을 돕는 자들로 보인다. 즉 이들은 그들이 마리아의 청을 거절할 수도 따를 수도 있다.

-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 직역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행하라’ 즉 그가 명령하신다면 그것을 행하라는 의미. 즉 하인들은 그분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설사 그것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고 또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그가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즉시 행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Q. 마리아의 무엇이 이런 행동, 선택, 반응을 하게 하는가?

cf. 하인리히법칙 : 미국 보험사에 근무하던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산업재해 사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통계적 법칙이다.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법칙이다. 1:29:300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위 법칙에 의하면 산업재해가 발생해 중상자가 1명이 나오면 이미 그 이전에 같은 원인으로 29명의 경상자가 발생했었고, 또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 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cf. 깨진 유리창 이론(영어: Broken Windows Theory) :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3월에 공동 발표한 깨진 유리창(영어: Fixing Broken Windows: Restoring Order and Reducing Crime in Our Communities)이라는 글에 처음으로 소개된 사회 무질서에 관한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42-45)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 마리아는 말씀을 선택하는 습관이 있었다.

cf. 다른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정리]

마리아의 삶에 예수님도 함께 한다.

비워있는 상황에도 마리아의 시선은 예수에게 향한다.

삶의 모든 것을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소원

:

성경인물 복음서 06. 빌립과 나다나엘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11. 20. 11:15

[빌립, 메시야를 찾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41-42)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1장의 관심은 태초에 예수는 말씀이시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역할을 하는 메시야이고, 안드레가 찾던 메시야임을 증거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야기에는 무엇이 관심일까?


* 예수, 빌립을 찾다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갈릴리는 예수의 사역의 중심지이면서 고향이다. 당시 갈릴리는 남쪽 유다와 달리 사회의 하류계층이 거주하며 어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생활수준이 낮은 지역이다. 예수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 나가려 하시다가 → 예수의 의도,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여 떠나길 결심했다.

Q.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예수는 사역을 위해 갈릴리로 가려, 즉 비워 있는 그들을 향해 가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비워진 것을 채우려 하지 않는가, 그것만 희망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 빌립을 만나 - 휴리스코(ευρίσκω) = find 찾다. → 예수는 사역지로 가시면서 제자를, 메시야를 찾는 사람을 찾으셨다. 찾는다는 것은 예수의 관심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Q. 자신이 할 사역에 집중하고 계시는 예수는 비움을 채우려고 찾는 우리를 보시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 찾으실까?

※ 찾음은 제자로 부르심을 말한다. 제자가 되라는 적극적인 요청이다.

- 나를 따르라 → 건강한 찾음의 방향, 현재와 미래지향적

cf.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사람으로 상당히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보이고, 그의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온 것이 없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말을 사랑하는 자’이다.


* 빌립, 나다나엘을 찾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우리가 만났으니 : ‘찾아’는 위의 43절의 ‘만나’와 같은 단어다.

cf.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아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도 찾았다는 말이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 빌립은 예수께서 자신을 찾은 것처럼 나다나엘을 찾으러 갔다.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사람을 찾았다고 말한다. 즉 빌립은 메시야도 찾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다나엘도 찾는다.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한 말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를 찾은 것이다.

Q. 우리는 삶 가운데서 누구를 찾으러 가는가? 무엇을 전하기 위해 찾는가? → 비움을 끝없이 채우려는 찾음이 아닌 전하기 위해 찾는 건강한 찾음이다.

cf. 요한의 고백, 안드레의 고백, 빌립의 고백은 증언하는 고백이다.

(요 1:29,41,45)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41] 그(안드레)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1장의 공통점, 예수는 메시야이심을 찾고 증거하고 고백한다.


[정리]

예수의 찾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찾음이다.

빌립의 찾음은 건강한 대상의 찾음과 소개다.

cf. 전도는 이런 모습이다.

 

[나다나엘이 보는 것 vs 예수께서 보시는 것]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예수를 만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간다. 그리고 예수를 소개한다.

1.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분이다.

2.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 나사렛 출신이다.

cf. 문제는 나다나엘은 빌립이 소개하는 사람을 만나고 확인하기 보다는 만나기 전에 이미 답을 내린다는 것이다.

Q. 우리가 이런 소개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일까?


* 나다나엘이 보는 것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cf. 당시 나사렛에 대한 편견 → 정통유대인들은 이방땅으로 취급되었던 갈릴리 지방 가운데서도 나사렛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 더욱 부정적 관점을 갖고 있다. 특히 정통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Q. 이런 편견을 어릴적부터 듣고 자랐을 나사렛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그곳사람이라면, 또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게다가 그곳출신인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ex 학대받는 사람은 계속 학대의 자리에 있게 된다. 떨쳐내고 나오라고 하지만 그 말 자체도 그에게는 학대일 뿐이다.

→cf. 예수께서는 나다나엘 개인적인 비하와 경멸, 그것이 있게 한 사회적 통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다나엘의 비하를 듣고서 무시와 경멸의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 통념(通念) 일반 사회에 널리 통하는 개념. 전체에 통하는 일반적 관념.

Q. 우리라면 잘해주려고 하는 사람이 우리에 대해 부정적 표현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 선한 것 : 아가도스(ἀγαθό́ς) 본질적으로 좋고 선하고 옳은 것..

⇒ 나다나엘의 반응은 개인적으로 편견과 비하와 무지가 사회적 통념과 상식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통념의 문제는 누구도 이런 생각에 대해 그르다고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 그런 그에게 빌립은 가서 보자고 하고 그는 예수에게 나온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

Q. 무엇이 나다나엘이 예수께 가게 했을까? 이렇게 부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간 이유는 무엇일까? → 어떤 심리적 변화가 있었을까?


* 우리가 보는 것

Q. 일반적으로 나다나엘과 같은 표현을 들었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 우리는 분노와 공격의 반응을 보인다.

→ 외부의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영향받은 우리 안에 눌러놓은 억압된 감정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 예수께서 보시는 것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 나다나엘이 통념으로 나사렛의 예수를 보았다면 예수께서는 있는 그대로 그가 나옴의 모습과 그의 본심을 보셨다.

Q. 우리는 자녀, 남편, 이웃, 대상들에게 대해 무엇을 볼까? 우리의 심리적 반응과 이해를 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수는 다른 것을 보신다. 다른 선택, 다른 행동을 하신다.

1. 예수는 보신다.         

2. 예수는 가리킨다.            

3. 예수는 말한다.

-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우리가 볼때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이나?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어 보이나?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이렇게 보게 할까?

ex 우리는 자녀를 참 아이로, 그 안에 간사함이 없다고 보나? 간사함이 있다고 본다면

⇒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사회적 편견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편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그 편견을 사용하는 사람한테도 그 속에 깊은 것을 찾아서 본질을 말한다.


(요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 나다나엘은 자신을 알아본 예수에게 놀란다.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으로 유대민족의 번영을 상징한다. 즉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야 오시기를 소망하며 경건생활에 힘썼음을 보셨다는 것이다.

⇒ 예수의 판단의 기준? 말한마디가 아닌 그의 삶을 보고 말씀하신다.

cf. 이것은 요한 기독공동체를 향한 말씀일 것이다.


* 나다나엘의 고백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나다나엘의 편견과 경멸이 고백으로 바뀐다.

cf. 이것은 요한공동체 안에 있는 유대출신의 기독교인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 메시야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요 1:50-51)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메시야를 고대하며 무화과나무 아래서 경건의 삶을 산 나다나엘(특히 요한공동체와 더 나아가 우리)이 보게 될 특별한 메시야의 능력이다. 참 이스라엘이 보게 될 참 메시야의 능력.

cf. 하늘이 열릴 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마3:15-17), 변화산에 계실 때(마17:1-3), 승천하실 때(행 1:9), 스데반이 순교하며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을 때(행 7:55-56) 등..


[정리]

나다나엘은 경건하지만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편견의 상황에서 그런 사람의 깊은 것을 보신다.

예수는 그 사람의 속을 드러내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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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05. 예수를 준비하는 자, 세례요한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8. 21. 12:17

[세례요한의 말씀과 정체성]

 

▷ 가정의 배경

- 그의 부모는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이다.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 그의 부모는 의인이고 율법대로 살려는 사람이다.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잉태하지 못하고 자식이 없음에도 그들은 일관되게 하나님 앞에 있었다.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 이러한 가정에서 자란 요한은 부모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율법 안에서 일관되게 하나님 앞에 있는 부모의 모습은 요한도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세워지는데 중요한 영향을 준다.

- 그들은 계속 기도하는 부부였다.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Q. 나의 원가족과 신앙적 분위기는 어땠을까?


▷ 하나님의 의지 - 메시야 앞에서 백성을 준비케 하리라

(눅 1:13-17)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①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③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④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⑤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Q. 하나님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나? 그러기 위해 어떤 삶의 모습을 갖게 하실까?


▷ 시대적 상황 + 말씀대로 * 그의 자리

(눅 3:1-2)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 총독과 분봉왕들, 하나님의 말씀, 빈들

Q.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는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말씀인가, 눈에 보이는 현실인가?


▷ 말씀의 배경-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cf.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그의 자리에서 그가 하는 일에 대해(공관복음의 이해)

(눅 3:3-6)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 3:1-3)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막 1:2-4)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공통적인 표현은 3자의 시각으로 ‘요한은 말씀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다. 즉 이사야 말씀을 근거로 요한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요한의 자기 증언(요한복음의 이해)

(요 1:19-23)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당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니라고 한다.

→ 스스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말씀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낸다. ‘나는 소리다’라고 한다.

⇒ 요한은 자신과 삶과 사역에 대해 가정의 배경과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 말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한다.

Q. 요한의 어떤 성장과정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Q. 나는 어떤 말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cf. 모든 가정이 신앙적이거나 건강한 것은 아니다.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임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 요한의 외침

1. 광야에서 회개하라 전파한다.

(마 3:1-2)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마태) 무리에게(누가) 회개하라 외친다.

(마 3:7-10)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 세리들에게 (눅 3:12-13)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4. 군인들에게 (눅 3:14) 『군병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 요한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기를 강조한다. 이는 그의 부모가 성경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모습을 보며 자랐고, 자신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의 자리에 성실하게 행하고, 다른 무리들에게도 이것을 강조한다.

5.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자신은 능력이 많으신 분 앞에서 준비하는 자라는 의식이다.

(마 3:11-12)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6. 예수를 알아보다. (마 3:13-15)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레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 1:29-30)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요한은 자신에게 주신 말씀대로 살아간다.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Q. 우리는 어떠한가? 말씀과 삶에 어느정도 일치성을 보이는가?


[정리]

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야를 준비하는 자로서 외치고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삼고 있다.

요한이 광야의 빈들을 자신의 자리로 삼고 거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려는 욕구는 그에게 말씀과 의도와 가정의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말씀의 배경, 가정의 배경, 의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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