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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27 성경인물 복음서 24. 구하지 않은 여인의 치료와 영광
  2. 2015.05.13 성경인물 복음서 23. 속빈 어리석은 바리새인 vs 사랑가득한 예수님
  3. 2015.04.22 성경인물 복음서 22.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의 해석
  4. 2015.03.25 성경인물 복음서 21. 사랑받지 못한 바리새인의 정죄 vs 사랑을 많이 받은 죄인의 표현
  5. 2015.03.18 성경인물 복음서 20. 세례요한의 기다림과 예수의 대답

성경인물 복음서 24. 구하지 않은 여인의 치료와 영광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5. 5. 27. 12:11

 

(눅 13:10-13)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등장인물은? 18년을 앓은 여인, 예수


* 상황 1-배경

(눅 13: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 때는 안식일, 장소는 회당. 주인공은 예수, 무엇을 하시나? 가르치신다.

cf.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 상황 2-새로운 등장인물 설명

(눅 13: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cf. ⇒ 이것을 연극으로 본다면,

→ 여인의 상황 : ① 18년동안 귀신들려 앓았다. ② 그 결과 꼬부라졌고 조금도 펴지 못한다. ③ 그녀가 지금 회당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

→ 누가는 병의 원인을 ‘귀신’으로 보고 있고 뒤에 16절에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사단에게 매인바 된 것’이라고 한다.

-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 병의 결과로 비정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의학적으로는 척추에 이상이 있거나 등뼈가 고부라져 허리를 펼수 없는 곱사병으로 보인다.

cf.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참된 안식일을 누리게 하기 위해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급한 상황임을,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해주고 싶으셨던 마음을 보이신다.

cf. 여인의 꼬부라져 펴지지 않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우리도 앓게 되면 마음이 꼬부라진다.

→ 원어에는 ‘자, 보라’는 표현이 있으나 번역되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을 여인에게 집중하게 한다. ex 영화로 본다면 카메라가 여인을 클로즈업 시킨다.

Q. 우리는 그 여인이 어떻게 보이나? cf. 여인은 꼬부라진 모습은 나의 모습인가, 나의 대상의 모습인가?


▷ 성격장애의 분류 - A군 성격장애, B군 성격장애 ,C군 성격장애로 나뉜다.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 DSM-4)

A군 성격장애 - 편집성 성격장애 분열성 성격장애 분열형 성격장애

B군 성격장애 - 반사회성 성격장애 연극성 성격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자기애성 성격장애

C군 성격장애 - 강박성 성격장애 의존성 성격장애 회피성 성격장애

 

▷ 수동공격성 인격장애 (Passive-Aggressive Personality Disorder)
수동공격성 인격장애는 자주 적대감과 공격심을 느끼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대신에 고의적으로 꾸물꾸물 지연시키거나, 계획적으로 비능률적이거나 무기력하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수동적·소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공격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은 수동적 저항뿐만 아니라 불평, 비난, 분개, 짜증내는 성향 등을 보인다.
* 임상적 특징 - 수동적 인격장애의 임상적 특징은 사회적인 역할수행에서 또는 직업적인 면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의 수동적 저항의 양상은 꾸물거리고, 잊어버리거나 고집부리기, 비능률적으로 행동하는 등의 양상을 보이며 권위, 요구, 의무, 책임 등에 수동적인 저항을 하는 성향을 주로 보인다. 이들은 불평을 잘하고 푸념을 늘어놓고 따지기 좋아하며, 비난하고, 비판적이며, 만족할 줄 모르고, 심술사납기 쉽다. 이들은 화가 나거나 불만스러울 때 이를 직접적으로 인정하거나 표현하는 대신,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 인지적 특징(수동공격성 인격장애자들의 인지적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거야.
- 나는 지금 그것을 해야할 필요는 없어.
- 인생은 쓰라린 거야. 나를 위한 일이 아무 것도 없어.
- 당신이 한 일은 아주 상관이 없어. 어쨌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
- 규칙은 제멋 대로이고 나를 숨막히게 해.
- 사람들이 나를 이용해 먹어.
- 사람들은 더 많은 존경심으로 나를 대우해 주어야 해.
- 내가 한 일에 대해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아.
- 내가 원하는 일은 내가 해야돼.
- 해야할 것을 감히 나에게 말하다니
- 다른 사람은 가끔 지나치게 요구적이다.                      (Beck &Freeman, 1990)


* 영적차원 - 영적인 믿음이나 영적행위뿐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도 수행에 대한 요구에 저항한다. 수동공격적 성격은 부정, 무시, 도발의 전략을 따르며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를지 거절할지 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수동적이면서 또한 공격적이다. 이런 모순적 태도는 의존, 독립, 능동적 혹은 수동적 반응의 결정을 못한다. 복종과 주장의 딜레마와 싸우고 절충하려 한다. 자신의 분노와 저항을 꾸물거림, 빈둥거림, 고집, 비효율성, 잊어버림으로 표현한다. 종종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두렵고 타인에게 전가하는 적대감을 반영한다. 그들은 동의하는 것으로 부정적인 저항을 감춘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동의할 때 그들의 진짜 생각과 감정을 작은 소리로 표현한다. 이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비협조적이다. 자신의 삶이 공정하지도 공정할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에, 비협조적이 되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에 정당함을 느낀다. 이들의 모순적인 자기이미지 때문에 자신은 오해받고 속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과거의 성공의 기억은 차단되고 분노로 가득차 있고 다른 사람을 질투한다. 만약 상황이 순조로우면 자기가 그것을 망칠 것이라 확신한다. 그들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고 좋은 의도를 표현하는 것을 배우지만 꼭 실제로 그렇게 실현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무책임하고 비협조적이며 헌신하지 않은 성격적 패턴을 확립한다.

- 하나님 이미지 : 그들은 가혹하고 사랑없는 하나님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들의 비관적인 영적 전망은 그들의 불행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반영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권위를 불신하고 저항하면서도 복종의 대상에게는 분노나 부정적인 정서를 표현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리더나 공동체의 멤버들을 화나게 하고, 자신의 단점을 사과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 기도 스타일 : 다른 사람들의 탄원과 요구의 기도와 달리 이들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 공적예배에서 기도행위를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를 채운다고 신뢰하지 않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 영적생활 : 전반적인 비관주의, 꾸물거림, 무질서의 반응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믿음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영적 지도를 받는다면 초기에 탈락하면서도 끝마치지도 못한다. 또한 무신론자가 될 것이라 예상되지만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더 많은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기에 어렵다. 그들은 신앙공동체를 떠나는 대신에 자신의 삶과 주변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영적으로 침울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게 된다. 결국 조용한 자포자기, 영적 자포자기의 삶을 산다.


* 예수께서 그녀를 보신다. 그러나 여인은 적극적이지 않다.

(눅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 여인은 안식일에 회당에 있으나 적극적으로 예수께 와서 적극적으로 고쳐달라고 하지 않는다. 18년동안 꼬부라졌고 계속 꼬부라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가? 고착된 마음으로 겉과 같이 속도 꼬부라졌는가? 왜 여인은 예수께 구하지 않는가? cf. 복음서에서 적극적으로 구한 사람들이 많은데 여인은 가만히 있다.

Q. 우리의 모습에서 꼬부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고 그러면서도 예수께 말하지 않는 꼬부라진 모습은 무엇일까?


-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 병든 여인이나 주변인의 요청이 없음에도 불쌍히 여기시고 능동적으로 병을 고쳐주신다. 병의 상태는 계속 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완료하셨다.

- 아폴뤼오(ἀπολύ́ω) = ~부터(아포 ἀπο) + 풀다(뤼오 λύ́ω) → 풀어주다, 해방하다

→ 치료의 의미가 아닌 ‘자유’의 의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주시다.


(눅 13: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 미완료 시제, ‘계속적 고통’에서 ‘계속적 찬양’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참된 안식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계속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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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23. 속빈 어리석은 바리새인 vs 사랑가득한 예수님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5. 5. 13. 11:14

 

→ 말씀은 무엇을 말하나?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나와 내 모습을 대입할 때 무엇이 보이나?

(눅 11:37-44)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Q. 바리새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Q. 이렇게 자신의 생활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 이렇듯 우리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다.


말씀의 줄거리는? 바리새인이 식사를 청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손을 씻지 않는다. 이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과 예수님의 대응이다.

기본틀 : 11:37-41 바리새인 반응과 예수님의 대응

         11:42-44 바리새인들에게 3번의 화를 선언하심

         11:45 율법사의 반응

         11:46-52 율법사들에게 3번의 화를 선언하심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눅 11:33-36)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고 바리새인이 와서 함께 식사하기를 청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수락하신다.

Q. 어떻게 예수께서는 그의 청함을 거절이나 회피가 아닌 받아드리셨을까?

Q. 우리라면 불편한 사람과, 특히 우리를 비난하는 자와 함께 할 수 있을까?

Q. 식사를 청한 이 바리새인은 예수께 우호적인가?

- 점심잡수시기를 →

- 청하다 → ‘거듭하여 요청하다’ 미완료형

- 자기와 함께? 

cf. 왜 같이 식사를 하자 할까?


▷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눅 11:38) 『(예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Q. 예수께서는 왜 손을 씻지 않으셨을까?

-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 파격적인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이다. 원래 의미는 ‘깜짝 놀라다’.

(눅 4: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마 22: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막 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눅 11: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 이에 대한 예수의 반응

(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 탐욕 : ‘억지로 끌고 가다, 탐심을 가지고 붙잡다’는 ‘하르파조’(ἁρπά́ζω)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 착취’의 뜻을 갖는다.

- 악독 : ‘악한 성품의, 타락한’의 ‘포네로스’(πονηρό́ς)에서 나온 말로 ‘시기심, 욕심’을 의미.

→ 겉은 거룩한데 속은 남의 것을 탐하고 낮은 자들에 대해 자신을 높인다.


(눅 11:40-41) 『[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 어리석은 자들아 →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의 ‘아프론’(ἂφρον)의 호격복수.

-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 하나님이 속을 만드셨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안에 것으로 구제하라고 한다.


▷바리새인의 겉과 속의 차이

(눅 11:42-44) 『[42]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소홀히 함이 없이 하고, 이것들도 반드시 해야 한다. [43]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4]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Q. 왜 예수께서는 겉보다 속을 강조하는가? 겉만 생각하고 속은 잊은 그들에게 속도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바리새인은 겉으로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을 중요시 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속이 중요한 이유는? 

→ 그럼 속은 무엇을 채우는가?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일과된 모습과 요나의 표적을 보이시며 빛으로 채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속이 채워진 분이다..

→ 신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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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22.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의 해석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5. 4. 22. 13:04

 

등장인물 - 예수, 무리들, 바리새인.  공관복음 -마태12:22-30, 마가3:22-27, 누가11:14-23


(마 12: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 이야기의 발단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내용전개? 환자가 옴 ⇒ 예수께서 고치심 ⇒ 그들이 나음.

→ 내용과정? ① 원인은 귀신 들렸다. ② 질병은 눈멀고 말못한다. ③ 누군가가 그들을 데려왔으나 설명은 없다. 그들은 수동적이었고 스스로 올수 없었던 것같다. ④ 과정에 대해 설명은 없다. ⑤ 예수께서 고쳐주신다. ⑥ 각각 필요한 치료를 얻는다.

→ 예수님의 치유의 결과 :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고 보게 된다. cf. 귀신이 원인인데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고 치료의 결과만 나온다.

- 데리고 왔거늘 → 예수는 무리와 함께 있었다. 그러던 중 환자를 데리고 온다.

Q. 우리에게는 해결하고 싶은 부족한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누구에게 ‘데리고 가는가’?


▷ 이러한 치유의 과정을 무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마 12: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 무리가 다 놀라 → 무리의 반응이다. 몹시 놀라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무리의 해석이다. → 당시 그들의 관심은 메시야, 다윗의 자손인 왕을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들의 부족을 메시야가 와서 해결해 줄 것을 바랬는데 그것을 예수의 치유과정에서 보니 놀라게 된 것이다.

cf. 여론의 움직임? 메시야를 원하는 민중들의 바램이기도 하다.

Q. 우리는 부족한 우리의 삶을 예수께 데려가 보여드리고 해결하심을 보고 그분이 어떻게 보이나? 우리 삶 속에서 이렇게 놀랄만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 해석을 했는가? →


 

 

cf. 분위기는 어떨까?

Q. 우리는 기적의 현장 안에 있는가, 멀리 겉도는가? 


▷ 겉도는 자들의 해석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 바리새인들은 듣고 ...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

→ 악의적인 바리새인의 비방은 그들의 원인이 ‘귀신들림’인 것은 보았으나 예수께서 이야기는 정확히 환자를 보지도 않은채 예수를 비방하기 위한 것이다.

cf. 한국적 무속의 논리?

→ 바리새인들은 무리의 해석, 즉 ‘다윗의 자손’이길 바라는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Q. 같은 것을 보고 어떻게 왜 이렇게 다를까? 무엇이 이렇게 다르게 해석하게 하는가?

cf. 그들은 예수님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 (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모순된 이야기다. 그런데도 악의에 찬 비방을 한다. 의도된 비방과 깎아내리는 해석이다.

cf. 모든 귀신들을 통치하는 지휘자인 ‘바알세블’(Bεελζεβουλ 베엘제블)은 유대인들이 사단을 경멸조로 부르는 호칭이다. 즉 ‘똥, 파리’를 의미하는 ‘제블’(בובז) + ‘주(主), 주인’을 의미하는 ‘빠알’(לעב)의 합성어로 ‘똥의 주인, 파리의 주’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알세블을 힘입었다는 표현은 예수도 더러운 귀신이 드렸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험담하려는 악한 의도를 갖고 있다.

(말 2: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Q. 내 삶에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 고백하려 할 때 오히려 악한 의도로 우리의 해석과 고백을 넘어지게 하는 경험이 있는가?


▷ 예수님의 반응은?

(마 12:25-26)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

-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 예수님의 논점? ‘나라’이다. 왕은 나라가 있고 그 나라가 곧 왕을 표현하므로 예수께서 ‘왕’이 아닌 ‘나라’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바리새인의 악한 의도의 비방과 논리적 모순을 드러나게

Q. 왜 나라인가?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과 같으니.. 마 13:24, 31, 33, 44, 45. 47, 18:23, 20:1, 22:2, 5

⇒ 예수님의 의사소통은 일치형. 같은 주제로 일관적이고 자기주장이 분명하며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편협되지 않다.

cf. 사티어의 의사소통방식중 바리새인의 의사소통은? 비난형 초이성형 회유형 산만형 중?


(마 12:27-28)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의 아들(추종자, 제자)들은 전례되어 내려오는 여러방법을 사용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

-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 ‘힘입어’ (ἐν ~안에서) 즉,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안에서 충만하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가 앞에 있다는 의미.

Q. 우리는 무엇을 ‘힘입고, 어떤 나라 안에’ 있는가? 부활의 삶은 세상의 해석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마 12:29-30)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 예수께서는 세상을 힘입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한다.


[정리]

예수 앞에 귀신 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환자가 나타났으나 치료받는다.

→ 우리도 그런 환자가 될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다.

무리는 그의 치료하심을 보고 놀라고 부족한 가운데 고백한다. → 우리도 무리처럼 우리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기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이 바리새인의 무지한 비방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

⇒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그러한 시각으로 세상과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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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21. 사랑받지 못한 바리새인의 정죄 vs 사랑을 많이 받은 죄인의 표현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5. 3. 25. 12:46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정서적 박탈’ -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결코 충족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거나 감정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 장소-바리새인의 집, 등장인물-바리새인과 예수

→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신 이유는? 식사 초대를 받아서,

cf. 당시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런 예수께서 왜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가?

(눅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cf. 마태 26:6-13, 마가 14:3-9, 요한 12:1-8 →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향유 한 옥합을 예수께 분다. 제자들은  분개하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장례를 위함이라 한다. 단, 요한복음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마리아라고 말하고 내용은 같다.

→ 이 세 말씀은 예수의 죽음이 가까운 마지막 안식일에 유대 베다니에 있었던 일이라면, 오늘 말씀은 시간과 지역도 등장인물도 다르다. 갈릴리 전기 사역 중에 있었던 일이고 어느 한 여인의 헌신적인 태도와 죄인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용서에 초점이 있다.

- 한 바리새인 → ‘많은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이란 의미로 당시 예수께 적대적이었던 다른 바리새인과 달리 자기 집에 식사초대를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눅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 죄를 지은 한 여자 → 하마르타노(ἁμαρτά́νω) 과녁에서 빗나가다. ↠ 이 여인은 아마 ‘창녀’였을 것이다.

- 향유 담은 옥합 → 부유한 여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구하기 어렵고 귀하며 한 번 개봉하면 모두 소모해야 하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봉하지 않았다.

→ 그런 향유를 붓기 위해 그 집에 들어오고 예수님의 뒤 발 곁에 선다.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8) 『예수의 등 뒤로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 여인의 4가지 행동

①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

②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③ 자기 머리털로 닦고 →

④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

cf. 미완료시제

※ 여인은 어떤 마음이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 바리새인의 반응?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 바리새인이 본 여인의 모습은? 죄인.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 예수의 반응? → 바리새인 시몬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나?

(눅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 호칭의 차이, 예수께서는 “시몬아”, 바리새인은 “선생님”

cf. 지금 예수께서는 한 바리새인을 부드럽고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속으로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단정을 내리면서도 겉으로는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인과 완전히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눅 7:41-42)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 탕감해주다(χαρί́ζομαι 카리조마이), 원래의 의미는 ‘즐거운 어떤 것을 행하다, 은혜를 베풀다’ 신약에서는 ‘용서하다’

→ 사랑하다(아가파오 ἀγαπά́ω) 이해타산으로 된 거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베풂과 보답

cf. ⇒ 무엇을 위해 죄인인지 아닌지 구분하는가? 바리새인은 죄인으로 정죄하고 끝내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탕감과 아가페 사랑과 연결시켜 말한다.


(눅 7: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cf. 예수님의 대화법, 부드러우면서도 강요나 강제성이 없이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그런데 이 판단이 이미 갖고 있는 바리새인의 단정과 정죄를 넘어선다.


(눅 7:44-46)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이르시되 → 중요하고 감동이 되는 부분이다. 예수의 시선이 시몬에게서 여인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여인을 보면서 시몬에게 말하다.

→ 바리새인과 여인의 차이

바리새인

여인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50)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

→ 이유?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②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Q. 이 여인은 누구일까? 어느정도 예수님에게 어떤 도우을 받았길래 귀한 향유를 드릴 수 있었을까?

cf. 요 8:1-11. 간음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과 용서

(요 8:9-11)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Q. 우리가 드릴 눈물과 향유는, 최고의 사랑은 무엇인가?


▷ 예수와 바리새인의 다름 → 바리새인이 보는 것과 예수께서 보신 것은 왜 이리 다를까?

① 바리새인은 예수를 초대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단정을 내리지만,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집에도 가신다.

② 바리새인이 본 여인의 행동과 눈물은 부정함과 다른 사람도 부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신 눈물은 사랑을 많이 받은 증거라고 하신다. 즉, 바리새인은 여인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만, 예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많이 받은 자라고 보신다. cf. 우리 아이가, 우리 가족이 어떻게 보이나?


▷ 바리새인과 여인의 다름

① 바리새인 자신은 올바름의 기준이 있고 그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고, 여인은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사랑을 많이 받은 자이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② 바리새인은 비교비유에서 이성적으로 많이 탕감받은 자라고 생각한다고 하고 속으로 정죄하고 단정내리면서 겉으로는 아닌척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사랑을 그대로 예수께 눈물과 향유로 쏟아붓고 있다.

③ 바리새인에게 보이는 것은 ‘정서적 박탈’이다. 이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결코 충족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거나 감정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나 여인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표현한다.


Q. 우리는 많이 사랑받은 사람인가? 그 사랑을 어떻게 받고 있고 표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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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20. 세례요한의 기다림과 예수의 대답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5. 3. 18. 13:51

 

(마 11:2-6)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7:18-23)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세례요한의 상황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눅 7: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 세례요한은 지금 어디에 있고 왜 거기에 있나? 주의 길을 예비하던 요한은 옥에 갇히고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확인하기 위해 제자를 보내어 확인을 한다.

- 옥(데스모테리오 δεσμωτηρί́ω) → ‘사슬로 매다, 족쇄를 채우다’는 말로 신체를 구속하기 위해 죄인을 가두어 두는 감옥.

cf.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아들로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 의해 사해 동쪽에 위치한 마카이루스(Machaerus) 성내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었지만 예수에 대한 소식을 열심히 들었고 깊은 관심을 가진다. 이는 제자들을 보낼 정도로 깊은 관심이며, 특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 할 정도로 그의 소식에 집중하고 있다.

cf. 세례요한의 관심은 감옥에 가기 전이나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그리스도 메시야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는 그의 인생을 드린 문제이고 헌신이다.

Q.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집중하는가? 이런 것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묻나? 반면에 요한은 무엇을 묻나?


▷ 세례 요한의 질문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눅 7:19-20)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 오실 그이 → 이 표현은 구약에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 복음서와 신약에 여러번 나온다.

-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질문의 뉘앙스는 ‘바로 당신께서 오실 그분이십니까? 혹시 당신이 오실 그분이 맞습니까?’

-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직역 ‘혹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

- 기다리다(프로스도카오 προσδοκαω = πρό́ς(프로스) + δοκέ́ω(도케오, 생각하다)

→ πρό́ς는 ‘어떤 대상을 향한 정신과 욕구의 감정’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 ‘어떤 대상을 향해 정신과 욕구의 감정’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 ..

→ 직설법 현재형으로 쓰여서 계속적인 진행과 반복의 의미가 있다. 즉 ‘우리가 다른 메시야를 계속 기다릴까요?’ 이 말속에는 ‘혹시 당신 말고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나요?’라는 의구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Q. 세례 요한의 기다림은 우리의 기다림과 얼마나 다를까?

→ 우리도 기다린다. 요한과는 달리 현실적인 기다림을 생각한다.

(수 5: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 세례 요한의 호소

* 이것을 상담버젼으로 표현한다면, 세례요한은 상담자에게 와서 이렇게 묻는다.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상담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담자가 호소한 문제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 세례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천사로부터 사명을 받는다.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젊어서는 말씀대로 준비한다.

(마 3:1-3)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 예수를 만났을 때는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cf. 무서운 메시야관 → (눅 3:16-17)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상담버젼으로 ‘내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할까요? 나는 어릴적 태어나기 전부터 메수를 기다려야 했고 실제로 성장하면서 광야에서 그 일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내가 소개한 메시야가 내가 생각한 그런 메시야의 활동과 달라요. 그럼 난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할까요?

※ 세례요한의 질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까요인가 아님 다른 것인가?

ex.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 당신이 나의 하나님 맞습니까?


▷ 예수님의 대답

→ 우리라면 어떤 대답을 할까? 기다리냐고 물으니 ‘기다림’에 대해 대답할까. 그러나 요한의 질문의 핵심 ‘기다림’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 그럼, 예수의 대답은?

(마 11:4-6)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 예수께서는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생생한 현장의 소식을 보라고 한다. 지금의 예수의 모습은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메시야의 모습과 다르기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까를 묻는 세례요한에게 전해주라고 한다.

cf. 지금 세례요한은 평생을 기다린 메시야와 예수의 행적을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 다르게 표현하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묻을 것이다. 정말 메시야 맞는가?

-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이는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것이다.

    ① 맹인이 보며(사 29:18, 마 9:27-31) ②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사 35:6, 마 9:1-8) ③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사 35:6, 마9:1-8) ④ 못 듣는 자가 들으며(사 29:18, 35:5, 마 9:32-34) ⑤ 죽은 자가 살아나며(사26:19, 마9:18-26) ⑥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사 61:1, 마 9:35),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사 35:4, 61:2)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했다. →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세상의 죄에 대해 심판자로 메시야를 기대했을 것이다.

⇒ 자신의 생각에 갇혀 안보고 안들으려는 세례요한에게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듣게 하신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성경적인 것이다. 즉, 성경이 메시야이신 예수께 이루어지고 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성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적 메시야관을 갖고 있는 세례요한에게 성경적 메시야관으로 볼 수 있게 한다.

-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실족하다(스칸달리조 σκανδαλί́ζω) ‘길 가운데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

cf. 요한의 메시야를 정확히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서 실족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가시적인 불의를 척결하고 죄인을 심판하며 고난받는 의인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메시야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 복이 있도다 → 이에 예수께서는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신다.

→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리냐고 묻는다면, 예수께서는 지금 네게 일어나고 있는 일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계신가를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 오늘 말씀을 정리

- 내용을 전달한다. 요한은 제자를 통해 예수께 질문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 한다.

- 세례요한의 질문은 자신의 삶을 드린 본질적인 질문이다. 가장 궁금한 질문이고, 자신의 삶이 메시야의 엘리야역할이기에 그 역할을 잘했는지, 평생 주어진 사역을 잘 했는지, 특히 이를 위해 광야에서 고생했던 이유도, 그의 사명도 표현하게 한다. 바로 이런 질문을 예수께 한다.

- 세례요한의 질문은 호소문제로 그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의 호소질문은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냐’고 묻지만 ‘정말 당신 메시야 인가요’를 묻고 있는 것이다.

- 이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기다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메시야인가를 묻는 그의 핵심에 성경적인 자신의 활동을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다.

⇒ 이는 언제까지냐고 물으며 부정하는 우리의 질문과 호소에 지금 현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실 것이다. 즉 주님 언제까지 기다릴까요? 이에 대답하신다. 네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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