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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17 성경인물 복음서 04. 마태복음2장과 예수님의 어린시절
  2. 2013.05.29 성경인물 복음서 03. 누가복음 2장과 그리스도탄생의 찬양
  3. 2013.04.17 성경인물 복음서 02. 마리아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4. 2013.03.22 성경인물 복음서 01. 사가랴 - 세례요한을 준비하다.

성경인물 복음서 04. 마태복음2장과 예수님의 어린시절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7. 17. 17:32

 [동방박사의 기쁨과 헤롯의 불안과 분노]

 

(마 2: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동방에서 별을 보고 왔으며 유대의 왕이 나신 것을 알고 왔다며 경배하고자 한다.

↠ 헤롯은 BC 73년에 태어나 BC 40-37년 사이에 로마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고 BC 4년경 사망하였다. 재임기간은 BC 40년경-BC4년.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출신이나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다. 반면 부인 마리암네와 친족과 두 아들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다.

cf. 예수의 탄생시기를 그의 재임기간과 연결하여 BC 5년 후반에서 BC 4년 초반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 박사 : 마고스(μά́γος)는 바벨론에서 기원된 단어로 현자, 교사, 제사장, 의사, 점성가, 예언가, 해몽가, 마술가 등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특히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점성술의 특징이 강하다.

↠ 동방 : ‘해 등의 떠오름’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태양이 떠오르는 지점을 가리키는 ‘동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동쪽이고 천문학이 발달한 페르시아나 바벨론과 아라비아나 메대 등이 그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상당한 유대인이 거주하여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접하기 쉬운 곳은 바벨론이 유력하다. 즉 예수를 경배하러온 박사들은 점성학적 지식과 유대의 전통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대땅에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을 알고 예루살렘까지 온 것이다.

-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 그들이 온 목적은 단순한 공경의 마음을 넘어 경배와 예배를 드리러 왔다.


(마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 소동한지라 : 타랏소(ταρά́σσω) 동요시키다, 선동하다, 소동을 일으키다, 고민하게 하다.

→ 부정과거수동태로 헤롯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심히 교란하고 공포 가운데 발칵 뒤집힌 것을 나타낸다.

→ 권력에 대단한 집착을 가진 헤롯은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통치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특히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소식은 그의 두려움을 자극했을 것이다.

→ 예루살렘 사람들의 불안 : 400년간 예언이 끊기고 더구나 로마의 압제에서 고통받는 그들이 바라본 것은 메시야였다. 그러나 그들은 환영하고 기뻐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헤롯이 그의 잔인함을 드러낼 것에 대해 불안했다.


(마 2:4-6)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헤롯이 성경의 예언을 확인하는 모습에서 그의 불안을 볼 수 있다.

→ 유대교에서 기득권을 가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 기뻐한다기 보다는 헤롯이 메시야를 죽이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후에도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적대시하고 죽이려 한다.

cf. 예언의 실제적인 성취는 누군가에게는 은혜이지만 누구에게는 불안과 긴장을 준다.


(마 2:7-8)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 헤롯은 별이 나타난 시기를 물음으로 메시야가 그 시각에 태어났음을 알고 그 시각을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찾아내 죽이려는 했으며, 적극적으로 물음으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려 한다.

→ 헤롯의 거짓말. 그의 목적은 경배가 아니라 죽일 목적으로 박사로부터 소식을 얻으려 했다.


(마 2:9-11)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박사들의 감정은 매우 큰 기쁨이었다. 별이 메시야 탄생사실과 장소를 확인한 것에 대해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적대로 경배한다.

↠ 황금-예수의 왕권, 유향-신께 드리는 제의적 용도로 쓰이던 물건으로 예수의 신성, 몰약은 시체에 발라 방부제로 쓰인다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

Q.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보며 어떤 감정을 갖는가?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가?


(마 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그들은 꿈을 통해 어떻게 해야할지 지시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길로 돌아간다. 그들이 헤롯에게 돌아간다면 정확한 정보를 주게 되고 아기 예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 그들은 헤롯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 무엇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을까? 이는 그들이 경배한 아기예수를 통해 신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Q. 우리는 어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선택하고 움직이는가?


(마 2:13-15)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동방박사에게 꿈으로 알려주시고 요셉에게도 꿈으로 알려주신다.


(마 2:16-18)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 헤롯은 박사들이 오지 않은 것으로 확실히 메시야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심히 화가 난다.

→ 속다 : 엠파이조(ἐμπαί́ζω)는 ‘~에서 놀다, 조롱하다. 속이다’ 즉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뉘앙스와 놀림당했다는 뉘앙스가 함께 담겨져 있다.

⇒ 헤롯은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불안과 속았다는 놀림의 감정으로 분노로 표출한다. 이는 극단적인 잔인함을 행하게 한다.


[정리]

동방박사와 헤롯은 이방인이다. 그러나 목적이 다르다.

경배하려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하나 불안한 자는 분노조절을 하지 않는다.

 

[요셉의 역할(사명)과 순종]

 

* 주의 사자의 현몽과 급한 명령

(마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 경배를 마친 동방박사들은 떠난다. 이후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난다.

-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 직역 ‘왜냐하면 헤롯이 그를 죽이려고 그 아기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피할 것을 명령하면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cf. 헤롯이 동방박사를 만났을 때는 메시야를 죽이려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동방박사들이 자신에게 오지 않고 고국으로 가버린 것을 알고서는 2살 이하는 학살하게 한다. 이는 요셉에게 주어질 현실이면서 앞으로 닥칠 위기임을 예언해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헤롯의 악한 성향을 알고 있고 메시야를 보호하는 방법을 다시 요셉에게 현몽하여 알려주시는 것이다.

-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 요셉의 역할 및 사명. 4가지 동사 ‘일어나, 데리고, 피하여, 있으라’ ↠ 이 동사에서는 주의 사자의 단호한 의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고, 요셉은 반드시 그 말에 순종해야만 한다.

1. 일어나 :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의미다.

2. 데리고 : 결합시킨다는 의미로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요셉의 몸과 일치시키듯 밀착시켜 데리고 가라는 뉘앙스를 준다.

3. 피하여 : 위험한 존재로부터 도피하여 안전을 구하는 의미로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하여 안전을 구하라는 의미이다.

cf. 도피처가 애굽인 이유는 타국이면서도 15절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다.

4. 특히 ‘있으라’는 의미는 계속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피하는 상태를 유지하며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움직이지 말고 계속 그곳에 있으라는 의미이다.

cf. 이전 마리아의 임신소식(1:20)에는 시간이 걸렸다면 지금은 급하게 움직일 것을 말하고 있다.


*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애굽으로 가다

(마 2:14-15)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요셉은 꿈에서 주의 사자가 말한 4개의 동사를 그대로 따른다.

→ 급하게 밤에 출발한 것은 헤롯의 눈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아기 예수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라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cf. 당시 베들레헤에서 애굽까지 120km가 넘는 거리였고 과정자체도 굉장히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안전하게 그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다.

-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이는 말씀대로 이루려는 하나님의 의도된 인도하심과 노력이다. 호11:1의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출애굽사건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에 이루어진 것을 토대로 미래를 말하고 있다.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마 2:16-18) - 헤롯이 어린 아이들을 학살하다


* 이스라엘로 돌아오다.

(마 2:19-21)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 헤롯은 70세에 병으로 인생을 마친다. 유아학살이란 위험에서 주범인 헤롯이 죽자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다시 그 가족을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하신다. 계시의 전달방법은 이전의 두 번의 경험(1:20, 2:13)과 같이 꿈으로 전달하신다.

-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일어나 데리고’를 다시 말한다. 그러나 ‘피하여, 있으라’는 말하지 않는다. 이유는 헤롯이 죽었기에 더 이상 피해 있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요셉은 역시 동일하게 움직이고 있다.

- 이스라엘 땅으로 : 출애굽에서 하여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듯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이스라엘의 땅을 지정하여 그곳으로 가라고 한다. 요셉에게 애굽에 머무는 것은 영구적인 거주지가 아닌 임시지였으므로 주의 사자의 명령을 받은 요셉은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한다.

Q. 그럼, 요셉은 이스라엘의 땅 중에 어디로 가고 싶었을까? 고향 베들레헴이었을까? 그는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갈릴리 나사렛으로 갈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22절 참조)


* 요셉의 두려움

(마 2:22-23)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 헤롯이 죽은 뒤 유언대로 안티파스, 아켈라오, 빌립 등 세 후계자에 의해 유대는 분할통치

1. 안티파스-요단강 북서지역인 갈릴리와 요단 동편, 사해 북동편 지역인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

2. 아켈라오-헤롯의 왕위를 물려받아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일부지역 등 이스라엘 중심지역을 통치. 로마황제에게 선정(善政)을 한다는 조건하에 왕위를 인준받지만 헤롯만큼 잔인했다.

3. 빌립-가나안의 유다 남방 지역인 이두매 지역과 요단 동편의 한 지역인 드라고닛의 분봉왕

cf. 헤롯이 죽은 것은 주의 사자의 꿈으로 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돌아와 현지에서 들은 것은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Q. 애굽에 있는데 헤롯의 죽음의 소식을 먼저 들었다면 주의 사자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을까 아님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아왔을까? → 성경은 주의 사자에게서 듣고 출발했다고 한다.

Q. 돌아온 이스라엘 땅에서 헤롯의 아들이 유대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은 어떤 감정이 생겼을까?

-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 요셉은 아켈라오가 통치하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기에는 두려웠다. 가족을 보호해야할 요셉에게 아켈라오는 헤롯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그러자 다시 꿈을 통해 지시를 받는다. 두려움이 있어도 그는 스스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주의 사자의 지시를 기다리고 갈릴리로 갈 것을 지시받아 따른다. 그리고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 나사렛 지역, 자신들의 고향으로 가게 된다.

-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정리]

요셉은 꿈에서 받은 지시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다. → 마리아를 데려오는 1장과 유대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것, 다시 귀환하는 것과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에도 꿈에서 지시함을 받아 행한다.

그의 순종은 표현 그대로 움직이는 순종이다.

그것은 그에게 현실적으로만 보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부담의 상황을 보호하심으로 순종하며 선택한다.

보호와 인도하심은 하나님이 하시고, 순종은 요셉이 하며 순종은 요셉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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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03. 누가복음 2장과 그리스도탄생의 찬양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5. 29. 12:28

[그리스도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

눅 2장은 메시야의 탄생배경과 4분류의 찬양이 나온다.

2:1-7 예수의 탄생과 배경

2:8-14 천사의 찬양

2:15-20 목자의 찬양

2:21-35 시므온의 찬양

2:36-38 안나의 찬양

2:39-50 예수의 어린시절과 성전에 오심


오늘 내용?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의지였으며, 이는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내 삶의 자리에 오시는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하다.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 그리스도의 탄생예언과 그 예언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준다.

→ 마태복음은 헤롯과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가이사 아구스도와 로마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했다.

→ 누가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초라한 구유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지만 이 탄생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사건임을 서술하고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 그 때에 : 직역 ‘그 날들에’ 이전에 예언되었거나 예정된 날이 ‘성취됨’, 즉 말했던 그 때가 되어 실제로 그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 cf 비슷한 것으로 ‘때가 차매’(갈 4:4)

- 가이사 아구스도 : BC 27-AD 14 까지 로마제국을 다스린 황제.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로 탁월한 통치능력과 행정력을 가진 정치가이고 치정기간동안 로마에 평화와 번영을 지속했다.

- 영을 내려 : 그가 로마의 속국들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위해 세운 정책 중 하나가 인구조사, 실제적으로 지역에 따라 실행된 인구조사는 팔레스틴의 경우 수리아총독이 다스리는 영역 내에서도 시행되었다.

- 천하로 다 호적하라 : 즉 호적령을 황제와 관련시켜 ‘천하에 다 호적하라’고 하고 수리아 호적조서도 황제의 명령에 의해 되어진 것을 나타냄으로 팔레스틴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예수의 탄생이 단지 평범한 일이 아닌 천하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임을 알게 한다.

→ 당시 최고의 권력자도, 이방인일지라도, 말씀의 성취를 위해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 ex 유대인을 돌아가게 하고 성전건축을 도운 바사 왕 고레스, 반대로 예언대로 예루살렘을 파괴한 베벨론 왕 느부갓네살.

⇒ 황제로서 세금의 효율적 수거와 제국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실행한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간섭을 알지 못해도 미가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누가복음은 황제라는 실제 인물과 호족령을 기록함으로 예수의 탄생이 로마신화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임을 확증하고 있다.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 예수 탄생의 역사적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일반 역사상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말함으로 예수탄생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 구레뇨는 BC12-2에 집정관 내지 총독으로, AD 6-9에 총독으로 임직했고 두 번 호적조사를 했다. 첫째는 예수탄생 전후에, 둘째는 6년경(행5:37)에 했다.

(행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유대인의 반감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모든 사람이 → 황제의 호족령에 따라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향한다. ⇒ 천하 모든 사람이 다 호적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온 세상이 반응해야 함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고향으로 돌아가매 → 황제의 호족령은 자기 출생지나 고향에서 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각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으로 가는 전통과 관습에 연결된다. 이에 요셉이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은 곧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며 유다지파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메시야 탄생의 장소에 대한 예언의 성취도 된다. ⇒ 이는 표면상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역사와 구원을 주관하고 계획하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다윗의 집 족속 : 단순한 족보의 의미를 넘어 ‘다윗의 집’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 다윗의 집을 견고케 하시고 영원하게 하시며 언약의 자손을 주시겠다(삼하 7:11-16)고 했다.

- 갈릴리 나사렛 동네 : 구약의 역사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변방의 작은 마을이며, 예수께서는 공생애 전 유년기의 대부분을 초라하고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이곳에서 인간적으로 낮고 천한 신분을 생애를 사셨다.

-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일반적으로 ‘다윗의 성’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다윗이 자란 곳이라 ‘자기 성’이라 불렀을 정도로 애착을 갖는 곳이다.

(삼상 20:6)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 베들레헴은 거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나사렛에서 약 145km이다.

⇒ ‘다윗의 집, 다윗의 동네’는 단순한 족보와 지역의 의미를 넘어 언약적 측면과 메시야의 상징을 강조하며 다윗의 집과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다윗의 언약을 상기하게 한다. 또한 베들레헴은 ‘떡 집’이란 의미와 함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표현한 예수의 표현이 연결된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눅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 당시의 호적이 납세를 위한 조사임으로 여인들도 호적의 대상이긴 했지만 반듯이 본인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요셉과 동행한다. 그 이유는?

1. 정혼은 했으나 아직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임신한 마리아를 나사렛에 남겨둠으로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를 당할 수 있기에

2. 요셉과 마리아는 메시야탄생에 대한 천사의 예고를 이미 들었기에 경건하고 의로운 요셉은 미가5:2의 예언을 알고 있었고 그 예언이 순조롭게 성취되도록 도우려 했을 것이다.

⇒ 요셉과 마리아의 동행은 어떤 이유와 목적이었더라도 하나님의 예언성취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Q. 예언 성취의 의지를 보이시는 하나님은 왜 그들이 있을 여관도 없으며 강보에 싸인 구유에 아기예수를 뉘이게 했을까?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 이는 예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정리]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의지다. 구약의 약속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의 시행이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인 나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의지다.

 

[천사의 탄생소식전달과 찬송]

 

2:1-7 예수의 탄생과 배경

2:8-14 천사의 찬양

2:15-20 목자의 찬양

2:21-35 시므온의 찬양

2:36-38 안나의 찬양

2:39-50 예수의 어린시절과 성전에 오심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 지역은 베들레헴이고 거기의 목자들이 밤을 지내며 양떼를 지키고 있다. 마태복음의 동방박사와 달리 누가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자들의 구주도 되신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심에 전혀 무지했고 민감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Q. 우리는 얼마나 민감한가? 우리도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집중할 뿐인가?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 그런 그들에게 천사가 갑자기 나타났다.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에 갑작스럽게 출현한다.

-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중 하나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 즉 하나님의 영광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두루 비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가 주어질 것을 암시한다.

⇒ 그리스도의 탄생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목자들의 삶에 천사가 나타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춤으로 그들을 찬양하게 한다. Q.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우리의 삶에 어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했는가?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무서워하지 말라 → 천사는 자신의 출현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목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한다. 자신의 출현의도는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 목자들과 인류에게 큰 기쁨이 되는 놀라운 복음을 전하러 왔기 때문이다. cf. 우리는 대상(ex자녀)에게 어떤 의도로 다가가며 그들이 느낀 감정과 오해를 어떻게 풀어주는가?

-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천사는 자신의 출현의도를 분명하게 말한다.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을 전하다’는 의미이지만 성경은 특별한 상황에 대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정신적 신체적 고통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사실을 나타낼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cf. 유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가져오다. 복음을 전파하다.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좋은 소식, 복음, good news → evangelize(복음을 전하다) evangelism(복음주의), The Evangel(복음서)

- 온 백성에게 미칠 → 좋은 소식이 누구에게 가는가? 대상의 범위를 정해준다. ‘백성’(라오스 λαό́ς)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일반민족까지 가리키며,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누가복음은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백성’임을 말하고 있다.

(눅 2:11-12)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 오늘 → 역사적인 특정적인 한 시점의 날을 의미한다. 그가 그리스도다.

- 너희가 가서 .. 아기를 보리니 : ‘휴리스코’(εὐρί́σκω) 찾다, 발견하다. → 천사는 ‘가라’고 적극적인 명령을 하지는 않지만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경험으로 인해 능동적으로 베들레헴으로 향하여 아기 예수를 발견한다.

-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보통아기와 달리 구유에 있다. 목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메시야가 그렇게 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목자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을 것이고 표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 천사가 목자들에게 와서 영광과 은혜를 보여주고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이 보는 것을 표적이 되게 한다.

cf. 이후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에게도 그들의 삶에 와서 준 메시지가 평생을 기다리게 했다.

Q.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발견하게 하고 표적으로 삼게 하는가?

(눅 2:13-14)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 하늘의 군대, 천사들과 같은 표현으로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해 기록한 것임에도 구약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목자들 주위에 내려와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장엄한 광경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지극히 높은 곳 vs 땅, 하나님 vs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영광 vs 평화

cf.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진정한 평화는 하늘의 보좌를 내려놓고 이땅에 오셔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신 성육신을 통해 가능하다.

[정리]

일상 속에 있는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고 그들을 인도한다.

우리의 일상에 오신 성육신은 하늘과 땅, 영광과 평화를 연결한다.

천사는 찬양하고 인도자가 되었다.

 

 

[목자들의 증거와 찬양]


* 천군 천사의 찬양

(눅 2:13-14)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간다.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 천사들은 그 자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 천사는 자신들이 할 일을 하고 자신이 있어야할 곳으로 간다.

2. 목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준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보러가자’ → 목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보러간다.

↠ 천사는 하늘로, 목자는 베들레헴으로 간다.

→ 천사가 목자에게 알게 한 일과 이루어진 일 - 말뿐이 아니라 ‘사건, 일’을 의미한다.

↠ 히브리인에게 말은 곧 실체를 갖는 일과 마찬가지로 여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실체이다.

Q.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게 되고 무엇을 보러가나?


(눅 2:16-17)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 빨리 가서 : 목자들은 서둘러서 갔다. 왜?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기 위해

-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 아뉴리스코(ἀνευρί́σκω) ‘찾다. 발견하다’ → 반복의 개념이 있는 접두어 ‘아나’(ἀνά)를 합성함으로 반복하여 찾아냈다는 의미다. 즉 아기를 찾으려고 목자들은 노력했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또한 아기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지 못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cf. 천사들은 한번 찾아 못찾으면 포기했을 사람이 아닌 여러번 찾으러 다니는 목자를 불러서 가게 했다.

Q. 우리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찾아 몇 번을 찾아갈까?

- 보고 : 12절에서 천사가 ‘아기를 보리니’라는 예언이 이루진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 : 직역 ‘자신들에게 말하여진 그 말씀’ → 천사라는 말은 원어에 없다. 목자들은 천사에 초점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들은 말, 자기들에게 말하여진 그 말씀’에 초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cf. 목자들은 초점을 잃지 않았다. 신비의 경험이 아닌 말씀이 이루어진 것에 초점을 두었다.

Q. 내 삶에 일어난 일에 무엇을 초점으로 맞출까?

- 전하니 : 목자들은 천사들이  표적으로 가르쳐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12)를 확실히 믿었을 뿐 아니라 그 계시 내용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 대상은 마리아와 요셉뿐 아니라 만난 사람들 모두였다. 그들은 메시아 탄생의 복음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다. 목자들의 능동적이고 주저함이 없는 적극적인 증인의 역할을 보여준다.


* 듣는 사람들과 마리아의 반응

(눅 2:18-19)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 듣는 자가 다 : 목자들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야 탄생 소식을 전했음을 암시한다. 곧 그리스도 탄생을 처음 전해 들었던 목자들은 동시에 첫 번째 복음전파자가 된 것이다.

- 놀랍게 여기되 : 다우마조(θαθμάζω) 이상하게 여기다, 기이하게 여기다 →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초자연적인 사건이 이루어짐에 대해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나타낸다.

- 새기어 : 쉰테레오(συτηρέω) 마음 속에 간직하다.

-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 직역 ‘그녀의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 자신이 직접 들은 수태고지(눅1:27-38)와 목자가 전해준 소식을 실제로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며 이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떤 존재로 성장할 것인지를 계속해서 곰곰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cf. 단순히 복음을 들은 자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진 자의 차이가 크다.

↠ 듣는 자가 다 vs 마리아,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 vs 이 모든 말을, 놀랍게 여기다 vs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다.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목자들은 듣고 본 것이 다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것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미하면서 돌아갔다.』

-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 목자들은 1.들은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았다. 2. 듣고 본 그것을 증거했다. → 전도자의 증거가 완전한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 목자들은 영광과 찬양을 한다.

↠ 목자들은 복음전도자로서 증거와 찬양을 같이 보고 있다.

- 돌아가니라 :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돌아간다.


[정리]

목자들은 들은 것을 보며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 증거와 찬양을 한다.

목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한다.

복음을 들은 자와 말씀이 자신의 삶에 이루어진 것을 마음의 새기는 마리아의 모습은 다르다.


[아기 예수의 할례와 사명자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과 고백]

Q.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나?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아가나? 내 삶이 메시야와 관련있나?


* 아기 예수의 할례

(눅 2: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할례할 팔일이 되매 → 할례는 언약백성으로서 거쳐야 하는 정결의식이다. (레 12:3)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Q.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예수는 할례가 필요할까? 아기 예수는 이 정결의식을 받음으로 죄인과 같이 되기를 거절하지 않으셨고, 자신도 율법 아래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위해 친히 율법 아래에 있으신 것이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갈 4:4-5)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할례는 언약의식이면서 율법이 명령하는 정결례이며, 이름의 의미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이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할례받음으로 자기 백성의 속량을 위한 자발적인 헌신임을 말해준다.


* 마리아의 정결예식

(눅 2: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 산모의 정결예식이다(레 12:1-8를 참조). 당시 산모는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하고, 그 후로는 33일 동안 집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초태생인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고, 제물로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cf. 이 시점은 아직 헤롯이 음모를 알기 전으로 이후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 아기 예수의 헌신례

(눅 2: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모세의 율법에 철저히 순종하는 신앙인이다. 첫태생인 아기 예수를 드리려 한다. 주께 드리는 것은 장자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속죄를 위한 값을 치루는 것이다.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 이것은 산모가 지켜야할 정결례식에 드려야할 제물이다. 요셉부부는 가난하기 때문에 일년된 어린양이 아니라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했다.


*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성령의 지시와 인도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시므온은 뒤에서 말하듯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지내온 것같다.

- 의롭고 경건하여 → ‘의롭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의 법을 준수하는’ 정직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앞에 무죄하거나 흠이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경건하다’는 종교적 의무에 투철하고 헌신된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미로서 신앙적인 태도를 지녔음을 말한다.

-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 시므온의 기다림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하며, 이들에게 메시야의 오심은 백성을 구원하는 위로를 간절히 고대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cf. 안나에게도 의미상 대구적인 표현이 나온다.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성령이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와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거룩한 상태로 그의 삶을 인도하시며 계속 머물러 계신 것을 말한다.

Q. 내 삶에는 무엇이 인도하고 있나?


(눅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Q. 하나님에게 어떤 사명을 받고 싶은가요?

-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 그리스도를 보아야 죽는다. 자신의 죽음의 시점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Q. 과연 시므온은 이것을 언제 받았고 쉽게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을까?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 시대적 상황 : 말라기 이후 영적 암흑기를 지내고 있는 그때 시므온과 같은 의인을 세우시고 성령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 있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

→ 개인적 상황 : 성전에 들어가는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개인사정으로 성전에 못올 수 있다. 그런데 아기예수가 성전에 올때 그가 성전에 오도록 인도함을 받았고, 성령의 지시가 온전히 이루어짐을 경험한다.

- 마침 : ‘그리고 때에’ 시므온의 발걸음과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는 부모의 발걸음을 잘 맞추어 극적으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절묘한 인도하심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 부모는 율법의 관례대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갔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 아기를 안고 : ‘양팔 안으로 그를 받았다’ 그는 예수를 두 팔로 정성껏 안는다.

- 하나님을 찬송하여 :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찬양하고 감격한다.


(눅 2:29-32)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 시므온은 지금까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명으로 살아왔으며 이제 그 사명이 성취되고 끝났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성취는 그에게 참 평안을 얻게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편협한 선민의식과 달리 온 인류에게로 향하고 있음과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찬양한다.


* 부모의 반응

(눅 2: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 여기서는 요셉의 반응을 더 강조하고 있다. 그의 놀랍게 여김은 얼마동안 계속 되었음을 말한다.


* 시므온의 축복

(눅 2:34-35)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 아기를 안고 있던 시므온이 부모를 축복하며 마리아에게는 특별히 축복한다.

-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 그리스도의 오심은 누구에게는 구원에 참여하며 높아지나 어떤 이에게는 심판에 빠지게 한다.

-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예수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워지는 분이다. 이 표적은 반대하여 말하는, 적대적으로 말하는 대상이다. 실제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에 의해서 비방과 적대적인 공생애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을 위한 표적이 되었다.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 이는 마리아의 마음에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배척 수난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영혼을 뒤흔들 듯한 고통으로 가득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 안나의 찬양

(눅 2:36-38)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성전에서 구주탄생의 두 번째 증거자인 안나는, 결혼 이후 과부가 된 후 오랜 시간을 성전에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냈다. 유대사회와 초대교회에서 노인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특히 남편이 죽고 독신으로 살며 하나님께 헌신한 여자는 더욱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육체는 쇠퇴하였겠으나 영적 감수성은 매우 깊고 생명력이 넘쳤을 것이다. 그의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리는 삶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해오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 시므온이 찬양하고 부모에게 축복과 예언을 하던 그때에 안나가 나아온다. 이는 우연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나타낸다.

-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성전에 항상 있고 영적으로 민감한 안나가 아기 예수를 본 후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주탄생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메시야의 도래를 바라보던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모습이기도 하다.


* 나사렛으로 돌아오다

(눅 2: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 이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크다. 먼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마2:11) 이집트로 이주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이주하며(마 2:13-15), 이주후 헤롯의 유아학살령(마 2:16)과 헤롯의 사망(마2:19)이후 비로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정리]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대로 살아가며 천사가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온 시므온은 그의 사명이 완성됨을 경험한다.

자신의 삶을 드려 성전에서 지낸 안나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아온 삶이다.

이제 마리아는 아들의 삶을 보며 감당해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

성경인물 복음서 02. 마리아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4. 17. 12:51

 

[마리아는 왜 엘리사벳에게 갔을까?]


▷ 마리아의 방문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39-40) 『[39]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서둘러 가서,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 ‘이때’는 천사가 떠난 직후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떠난 것을 표현한다. ‘일어나’(아나스타사 ’αναστασα)는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여행을 위해 준비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즉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에게 갔고 3개월을 머문 후 요한이 출생하기전 돌아온다.

- 빨리 산골로 가서 : 산골(오레이넨 όρεινην)은 유대산지를 가리키며, 엘리사벳의 동네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에 의하면 나사렛에서 150km 떨어진 헤브론 남쪽 유타(Juttah) 지방으로 추정한다. 이는 나사렛에서 출발하여 4일 이상 걸려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 문안하니 : ‘아스파조마이’(άσπάζομαι) ‘인사하다, 환영하다, 경의를 표하다, 포옹하다’ 단순히 형식적이고 고상한 인사가 아닌 늙은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천사의 이야기를 눈으로 확인함과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 인사하는 것이다.


Q. 마리아가 처한 상황은 무엇이고 왜 엘리사벳에게 갔을까?

▷ 정황에 대한 상상력

Q1. 왜 마리아는 ‘빨리’ 즉 서둘러서 엘리사벳의 집에 갔을까? 천사가 나타나 자신에게 특별한 은혜가 임한 것을 안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의 임신을 들었을 때 급하게 그에게로 가기로 결정하고 출발한다.

cf. 누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온 것을 메시야가 오심을 준비하는 고백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한다. 엘리사벳은 태동을 느낀다. 즉 급하게 온 마리아의 상황은 위험한 상황이지만 누가는 엘리사벳의 태동을 통해 서로의 특별한 은혜를 나누는 3개월이 되게 한다.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Q2. 만약 마리아에게 이런 나눔을 할 수 있었던 엘리사벳이 없거나 가지 않았다면? 나사렛에서 그대로 계속 있었어야 했다면? 이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침묵하였던 것과 달리 더욱 감추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정혼한 여인의 간음으로 받아들여져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다.

(신 22:23-24)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cf. 약혼은 정혼을 의미하며, 히브리어로 ‘키두쉰’은 거룩을 의미하는 ‘카도쉬’에서 파생되었다. 실제적인 혼인관계로 이해되고 남편이 있는 여인이 된다. 유대인에게 ‘약혼’은 법적 구속력이 있게 혼인을 약속한다는 표현이다. 부부생활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려온 뒤에서야(혼인식 뒤에야) 시작되었다. 그런데 마리아의 경우 임신했다는 것은 남편있는 여인의 간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제일 무거운 형벌인 돌에 맞아 죽게 된다. 문제는 정혼한 상태에서 임신한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모두에게(친정과 시댁의 부모와 공동체까지) 씻을 수 없는 수치가 되고 가장 기본구조인 가족공동체가 깨지는 위가에 처하게 된다.

Q3. 결국 마리아가 나사렛에 그대로 있었다면? 굉장히 위험했을 것이다. 요셉도 조용히 파혼을 하려 했고, 사람들이 임신사실을 알았을 때 마리아를 돌로 쳐 죽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cf. 천사가 수태고지를 말할 때 마리아도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했고 그 이야기는 요셉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엘리사벳과는 나누게 될 것이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Q4. 그렇다면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았을까? 마리아는 말없이 갔을까, 아니면 말하고 엘리사벳에게 갔을까?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은 직후 간 것으로 볼때 일반사람들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요셉이 고민한 것으로 볼때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 천사의 수태고지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cf. 그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일단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에게로 가 있으라고 했을까?

Q5. 약혼녀의 임신사실을 알게된 요셉은 어떻게 하려 했나?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태복음의 특성상 ‘의롭다’는 것은 ‘율법적이다’는 느낌을 준다. 즉 그가 율법적으로 행동해야 했고 가만히 끊으려 했던 것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셉의 결정은 이미 율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방법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끊으려’ 했다. 즉 율법적으로 돌에 맞아 죽게 하지 않는다. 아니면 자신의 집안도 수치가 되기에 말하지 못할 수도 없다. 상황적으로 볼때 일반사람들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 대해 요셉은 깊은 고민을 하여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마 1:18-19)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Q6.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가고, 이후 이것을 고민하는 요셉에게 천사의 현몽은 언제 있었을까? 바로는 아닌 것같고 요셉이 그 일을 생각한 것을 볼때 여러날의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cf.천사는 요셉의 감정을 그대로 읽어준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cf. ‘이 일’은 ‘이 일들’로 단수가 아닌 복수형이다. 즉 단순히 마리아의 임신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는 의미이다. ‘생각하다’ 역시 능동적 표현이 아닌 수동형으로 그런 모든 일들이 요셉은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자기 아내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요셉은 그로 인해 번민이 굉장히 심하여 파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cf. 이렇게 번민하며 파혼을 생각하는 요셉에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천사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 천사는 요셉의 감정을 읽어준다.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 천사는 사가랴와 마리아에게도 ‘무서워하지 말라’ 한다. 이는 자신에게 나타난 천사에 대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기에 안정시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그가 고민하고 있는 정황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성령으로 된 것임을 말해준다.

Q7. 요셉은 마리아를 어느 시점에 데려 오나? 요셉은 천사의 현몽으로 마리아의 이야기를 믿게 되었고 마음의 걸림이 해결되자 마리아를 데려온다. 이런 과정은 어느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마 1:20) 『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Q8. 요셉은 마리아를 언제 데려오나? 마리아가 석달뒤에 갔다는 것은 요셉의 고민이 정리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일 것이다. 아내를 데려왔다는 것은 그 3개월이 약혼의 기간이 지났음을 의미할 수 있다.

(눅 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 1:24-25)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Q9. 그렇다면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온 곳은? 같은 동네인 나사렛이 아닌 150km 떨어진 엘리사벳의 집일 수 있고, 혹은 거기서 돌아온 마리아를 데려왔을 수도 있다.

⇒ 즉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듣고 요셉에게 말한뒤 엘리사벳에게 와서 석달간 피해 지낸다. 그 사이 마리아는 단순한 피신이 아닌 엘리사벳과의 특별한 메시아에 대한 나눔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 기간동안 요셉은 고민했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주었으며 이후 정식으로 결혼생활을 하도록 되었다.


[정리]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요셉에게 알리고 급히 엘리사벳에게 갔다.

이것은 천사의 말을 확인하는 은혜이며 동시에 피신이었다.

이 기간동안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고 데려오도록 했다.

마리아는 이 기간을 추억할 때 피신의 시간이 아닌 나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신중한 고백]

▷ 천사를 만나는 마리아와 사가랴의 공통과 차이

 

마리아

사가랴

천사방문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인사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놀람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부름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진정

핵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이름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32] 그가 큰 자가 되고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물음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대답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예표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말씀은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고백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천사의 방문

(눅 1:26-27)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 내용의 중심과 대상은 마리아와 임신이지만 주어는 천사 가브리엘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

-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 나사렛을 잘 모르기에 큰 지역부터 알려준다.

-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 누가가 요셉이 다윗의 가문 출신임을 굳이 밝히는 것은 메시야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구약의 예언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cf.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눅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 은혜를 받은 자여 → 카리토오(χαριτό́ω) ‘값없이 은혜를 베풀다, 거저 주다’ 이 단어가 완료수동태분사로 쓰여서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시는 은혜와 호의를 입은 자이며 그 상태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천사의 나타남 이전부터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다는 것.

cf. 그러한 은혜를 마리아는 알고 있었나? 우리의 삶은 어떤 상태로 계속 되고 있을까?

- 평안할지어다 → 카이로(χαί́ρω, rejoice) ‘유쾌하게 되다, 행복하다, 유복하다, 안녕(일반적으로 특히 인사로서)

→ 은혜받음, 평안하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 천사의 소리이며 우리의 상태


▷ 마리아의 반응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 천사의 방문은 준비되거나 예상된 방문이 아니다. 마리아는 초자연적인 실체가 자신에게 갑자기 나타났기에 심하게 놀란다. 그럼에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미를 신중하게 생각한다.

cf. 마리아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에 대해 빠르게 판단하고 있다. 이런 신속한 판단이 끝에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천사의 예고-예수의 오시는 목적은 구원과 다스림이다.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 인간의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약한 자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사이며,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받게 되는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

cf.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즉 은혜받기 합당한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은혜를 발견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기준에서 호의를 베푸실 때만 가능하다.


(눅 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잉태하여,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 미래시제로서 단언의 의미이며, 천사의 예고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이 안되는 미래의 일들에 대해 확실성을 보장하고 있다.

- 예수 → 히브리어 ‘여호수아’와 동일하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 예수의 잉태는 그 아들을 통한 인류구원이다. 미래시제를 통해 확실성을 예수의 오시는 목적을 보이고 있다.

cf. 우리의 삶에는 있는가? 지금 우리는 이 확실한 미래를 듣고 가고 있다.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 그가 큰 자가 되고 → 미래의 어느시점에 비로소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큰 자라는 사실을 단언하는 표현이다.

-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 성부의 성자가 된다.

cf. 사람에 의해 진실한 고백으로 예수께서 이렇게 불린 적은 없다

1 하나님에 의해 수세 때와 변화산 때에만 있다.(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2. 사람에 의해

a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하자 -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b 백부장의 고백-(막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c 베드로의 고백-(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

d 나다나엘의 고백 -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3. 불신과 조롱으로

a 재판때 불신의 질문 - (마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b 조롱하면서 (마 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 귀신과 사단에 의해

a 귀신에게서-(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막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b 사탄의 시험중에 -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 그 조상 다윗의 왕위 → 단순한 다윗 가문의 출생을 의미를 넘어 메시야는 다윗혈통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예수께서 유대인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예언한 것이다.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 야곱의 집 → 좁은 의미의 혈통을 넘어 영적인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하심을 나타낸다.

▷ 모든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의 반응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 현재시제를 사용함으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 현재상태를 나타내며, 이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 마리아의 분명한 반응은 상황을 정확히 인지 판단하고 있다.

cf. 사가랴의 의심과는 마리아의 반응은 다르다. 사가랴는 안됨을 말하고 마리아는 어떻게 가능하는가를 묻는다. (눅 1: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 천사의 대답-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 성령이 임함을 말함으로 예수탄생의 신비함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마리아의 자궁에 생명이 생겨나게 하는 창조의 능력이다.

- 덮으시리니 → 에피스키아조(ἐπισκιά́ζω) 그늘지게 하다, 싸다. 구약에서 구름이 성막을 덮듯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함을 나타낸다.

cf. 우리의 삶에는 어떤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덮혀 있을까?


(눅 1:36-37)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친족 → 정확이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다. 엘리사벳은 레위지파이고 마리아는 유다지파이므로 이 둘은 조상의 혼인으로 형성된 친족일 것이다.

-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 모든 생식기능이 완전하게 정지되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마리아가 알고 있는 친족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한다.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이중부정으로 통해 강조하고 있다.


▷ 마리아의 고백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38) 『마리아가 말하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말씀이 조금도 훼손됨 없이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 인간의 상식으로는 납득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있다는 천사의 말을 받아들임을 고백한다.


▷ 마리아 반응과 고백의 특징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

⇒ 상황은 굉장히 놀랍고 두렵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굉장히 신중하고 빠른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고백으로 승화시킨다.


▷ 복있는 여인으로 불려진다.

(눅 1:42-45)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의 찬양과 고백-하나님의 이미지]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 급하게 엘리사벳의 집으로 간다. 그런 그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복중에 성령충만하고 기쁨이 넘치고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1:39-45)


▷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런 엘리사벳의 환대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1. 마리아가 처한 상황은 어떤가? 일반인이 보았을 때 율법적으로 결혼전 임신으로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다. 그런 마리아가 다른 지역으로 간 것은 도주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2. 이런 상황에서 천사를 만난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간”(39) 것은 어떤 마음일까? 불안과 두려움에 의한 도주인가, 기쁨을 표현한 발걸음인가?

3. 그렇게 도착한 사가랴의 집에서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환대와 큰 소리의 찬양은 어떻게 들렸을까? 같이 성령충만함을 나누나, 아님 불안과 두려움의 자신과 다른 엘리사벳을 보며 당황해 할까?

⇒ 그러나 46-56절에서 마리아의 찬양은 불안이 아닌 기쁨을, 두려움이 아닌 성령충만을 보인다.


(출 4:18-20) 『[18]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 마리아의 찬양 - 감정

(눅 1: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 찬양하며 - 메갈뤼노(μεγαλύ́νω)  ‘훌륭하게 만들다, 증가하다, (상징적으로) 찬양하다, 크게 하다, 웅장하게 하다, 크게 보이다’

→ 비유적 의미로 주를 ‘크게 높여 드리다’는 의미로서 주를 찬양하는 마리아의 마음이 형식적이 아닌 진지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임을 나타낸다.

직설법 현재형을 사용함으로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생생한 느낌을 전함으로 마리아의 진실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 기뻐하였음은 - 아갈리아오(ἀγαλλιά́ω) ‘하늘로 치솟아오를 것같은 충만한 기쁨’을 의미함으로 마리아의 기쁨이 그대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cf. 영혼(soul)-마음(spirit)(표준새번역, 마음-영혼), 주-하나님 내 구주, 찬양하다-기뻐하다 : 평행대구구조로서 시적 감흥을 더욱 살리는 문장이다.

⇒ 마리아의 감정은 현재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적으로 높여 들이고 있고, 자신도 너무나 기뻐함으로 높여드림을 말한다. cf. 지금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상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닌 그것을 넘어 찬양과 기뻐함이 넘치고 있다.


▷ 마리아의 찬양 - 이유

(눅 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 호티(ὅτι)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기 때문이라고 찬양한다.

- 비천함 : 타페이노시스(ταπείνωσις) (지위나 감정에 대해) 억압, 굴욕, 낮은 신분.

  비천한 :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짓눌린, 굴욕감을 느끼는, 낙담시키는, 초라한, 낮은 등급

- 돌아보셨음이라 :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 = 위에서(에피 ἐπι) + 바라보다(블레포 βλέβω)

- 보라 이제 후로는 →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무엇인가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말한다. 즉 낮고 비천한 한 여인이 메시야를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가장 복되고 귀한 여인으로 변화되었고 그 모습이 모든 세대에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말한다.

- 복이 있다고 → 마카리조(μακαρίζω) 아름답게 하다, 행복하다고 하다.

⇒ 사람은 자신의 비천함에만 집중하며 힘들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낮은 모습을 위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신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은 그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기뻐한다고 하며, 한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cf. 하나님을 몰랐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오히려 자신의 현재 부족한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것을 봐달라고 기도한다.


▷ 마리아의 찬양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긍휼하심

(눅 1:49-50)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 능하신 이가 ...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 마리아는 메시야 탄생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그분이 거룩하심을 고백함으로 자신의 삶과 상황을 연결하고 있다.

-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 거룩하심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을 고백한다.

⇒ 마리아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긍휼하심이 있음을 고백한다.

cf.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있다고 보고 있을까?


▷ 마리아의 찬양 - 마리아가 보는 것

(눅 1:51-53)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함으로 마리아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음을 말함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의 비천한 계집종의 위치에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 비록 세상에서 권세있는 자들이라도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합당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리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반대로 세상 가운데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또는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이 높이신다고 고백한다.

- 주리는 자를 좋은 것(ἀγαθό́ς)으로 배불리셨으며 →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선한 것으로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의미. 이는 단순한 채움이 아닌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가득 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 ‘빈손으로’는 ‘좋은 것’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부족할 것 없는 부자임에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텅비었음을 말하며, 보내셨다는 말은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의미.

⇒ 마리아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굉장히 건강하며 바르다. 그 이미지는 자신의 부족과 비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을 올려다보게 한다.

cf. 이러한 이미지가 어린 예수님이 성장하는데 아버지가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좋은 아버지상을 주었을 것이다. 

cf.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ἀγαθό́ς)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마리아의 찬양 - 역사속에서의 구체적인 모습

(눅 1:54-55)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 하나님의 행동 : 도우신다, 긍휼히 여기신다, 기억하신다, 말씀하신 것같이 영원히 하신다.

→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고백하고 있다.

cf. 마리아의 일관된 고백 → 여종인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1:56)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석 달쯤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정리]

굉장히 위급한 상황임에도 마리아는 기쁨과 찬양을 고백한다.

이는 일관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건강하고 바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하나님의 이미지는 바른 메시야상에 대한 고백과 어린 예수님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다.



[마리아의 찬양과 고백-하나님의 이미지]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 급하게 엘리사벳의 집으로 간다. 그런 그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복중에 성령충만하고 기쁨이 넘치고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1:39-45)


▷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런 엘리사벳의 환대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1. 마리아가 처한 상황은 어떤가? 일반인이 보았을 때 율법적으로 결혼전 임신으로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다. 그런 마리아가 다른 지역으로 간 것은 도주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2. 이런 상황에서 천사를 만난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간”(39) 것은 어떤 마음일까? 불안과 두려움에 의한 도주인가, 기쁨을 표현한 발걸음인가?

3. 그렇게 도착한 사가랴의 집에서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환대와 큰 소리의 찬양은 어떻게 들렸을까? 같이 성령충만함을 나누나, 아님 불안과 두려움의 자신과 다른 엘리사벳을 보며 당황해 할까?

⇒ 그러나 46-56절에서 마리아의 찬양은 불안이 아닌 기쁨을, 두려움이 아닌 성령충만을 보인다.


(출 4:18-20) 『[18]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 마리아의 찬양 - 감정

(눅 1: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 찬양하며 - 메갈뤼노(μεγαλύνω)  ‘훌륭하게 만들다, 증가하다, (상징적으로) 찬양하다, 크게 하다, 웅장하게 하다, 크게 보이다’

→ 비유적 의미로 주를 ‘크게 높여 드리다’는 의미로서 주를 찬양하는 마리아의 마음이 형식적이 아닌 진지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임을 나타낸다.

직설법 현재형을 사용함으로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생생한 느낌을 전함으로 마리아의 진실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 기뻐하였음은 - 아갈리아오(ἀγαλλιά́ω) ‘하늘로 치솟아오를 것같은 충만한 기쁨’을 의미함으로 마리아의 기쁨이 그대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cf. 영혼(soul)-마음(spirit)(표준새번역, 마음-영혼), 주-하나님 내 구주, 찬양하다-기뻐하다 : 평행대구구조로서 시적 감흥을 더욱 살리는 문장이다.

⇒ 마리아의 감정은 현재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적으로 높여 들이고 있고, 자신도 너무나 기뻐함으로 높여드림을 말한다. cf. 지금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상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닌 그것을 넘어 찬양과 기뻐함이 넘치고 있다.


▷ 마리아의 찬양 - 이유

(눅 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 호티(ὅτι)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기 때문이라고 찬양한다.

- 비천함 : 타페이노시스(ταπείνωσις) (지위나 감정에 대해) 억압, 굴욕, 낮은 신분.

  비천한 :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짓눌린, 굴욕감을 느끼는, 낙담시키는, 초라한, 낮은 등급

- 돌아보셨음이라 : 에피블레포(ἐπιβλέ́πω) = 위에서(에피 ἐπι) + 바라보다(블레포 βλέ́βω)

- 보라 이제 후로는 →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무엇인가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말한다. 즉 낮고 비천한 한 여인이 메시야를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가장 복되고 귀한 여인으로 변화되었고 그 모습이 모든 세대에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말한다.

- 복이 있다고 → 마카리조(μακαρίζω) 아름답게 하다, 행복하다고 하다.

⇒ 사람은 자신의 비천함에만 집중하며 힘들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낮은 모습을 위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신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은 그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기뻐한다고 하며, 한 시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cf. 하나님을 몰랐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오히려 자신의 현재 부족한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것을 봐달라고 기도한다.


▷ 마리아의 찬양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긍휼하심

(눅 1:49-50)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 능하신 이가 ...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 마리아는 메시야 탄생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그분이 거룩하심을 고백함으로 자신의 삶과 상황을 연결하고 있다.

-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 거룩하심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을 고백한다.

⇒ 마리아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긍휼하심이 있음을 고백한다.

cf.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있다고 보고 있을까?


▷ 마리아의 찬양 - 마리아가 보는 것

(눅 1:51-53)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함으로 마리아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음을 말함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의 비천한 계집종의 위치에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 비록 세상에서 권세있는 자들이라도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합당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리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반대로 세상 가운데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또는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이 높이신다고 고백한다.

- 주리는 자를 좋은 것(ἀγαθό́ς)으로 배불리셨으며 →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선한 것으로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의미. 이는 단순한 채움이 아닌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가득 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 ‘빈손으로’는 ‘좋은 것’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부족할 것 없는 부자임에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텅비었음을 말하며, 보내셨다는 말은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의미.

⇒ 마리아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굉장히 건강하며 바르다. 그 이미지는 자신의 부족과 비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을 올려다보게 한다.

cf. 이러한 이미지가 어린 예수님이 성장하는데 아버지가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좋은 아버지상을 주었을 것이다. 

cf.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ἀγαθό́ς)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마리아의 찬양 - 역사속에서의 구체적인 모습

(눅 1:54-55)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 하나님의 행동 : 도우신다, 긍휼히 여기신다, 기억하신다, 말씀하신 것같이 영원히 하신다.

→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고백하고 있다.

cf. 마리아의 일관된 고백 → 여종인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1:56)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석 달쯤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정리]

굉장히 위급한 상황임에도 마리아는 기쁨과 찬양을 고백한다.

이는 일관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건강하고 바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하나님의 이미지는 바른 메시야상에 대한 고백과 어린 예수님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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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01. 사가랴 - 세례요한을 준비하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3. 22. 17:47

[부모를 통해 세례요한을 보다]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시간적으로 첫 인물은 누구일까?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배경을 보여준다.


▷ 제사장의 가정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 유대 왕 헤롯 때에 : 그의 통치 기간 중에

cf. 헤롯은 누구인가?

1.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한다.

2.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3.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 함으로써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키고자 노력했다.

4.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배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 예수의 탄생배경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자(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영적 암흑기였던 시대를 마감하고 세례요한을 통해 새로운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 아비야 반열(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반열’은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 사가랴 :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 엘리사벳 :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레 21:14)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cf. ‘엘리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이다.

(출 6:23)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출생이 그런 제사장의 가정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 가정의 일관된 신앙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신분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자세까지도 바른 모습(일관된 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

1. ‘의인’은 법률적으로 ‘옳고 정직한’ 의미를 갖는다.

2. 여기에 ‘하나님 앞에’라는 병행표현을 함으로서 단순한 윤리적 측면을 넘어 종교적인 측면의 인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일 수 없다.(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럼에도 누가기자는 그 가정을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 누가복음은 구약적인 의인관을 통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계속 소개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보이는 기준은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하는 것’이다. 규례와 계명은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이 친히 당부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이다.

-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비난이나 책망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종교적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 예비된 비움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1.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 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 그들의 관계는 오랜 세월 하나님 앞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cf. 요셉도 마리아의 잉태를 받아들인다.

2.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그런 가운데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부부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그리고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사라와 한나 등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

 

[성실하고 일관되게 직무를 감당하는 사가랴]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1. 세례 요한의 부모는 훌륭한 제사장의 삶을 고백하는, 다른 이에게도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는 삶이었다.

2.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잉태를 못하고 자식이 없으며 나이가 많다는 것은 다음 이야기가 이와 관련된다는 암시의 복선이다.

3. 만약 끝까지 없었다면, 다음 이야기를 위해 이렇게 무엇인가 있을 것같은 암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잉태와 자녀 그리고 나이가 많은 것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포기의 조건인데,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있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사가랴는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

(눅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눅 1:8) 『사가랴가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일을 하고 있었다.』

→ 당시 자녀가 없다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비난받을 수 있는, 사가랴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나이가 많다는 것에서 점점 가중되고 포기되는 마음으로 힘들었을 수도 있다.

→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한다. 만약 그가 레위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아론의 자손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장직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 결국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고백하는 마음도,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이 두가지가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한다.

cf.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믿음의 고백 사이에서 무엇이 영향을 주고 있을까? 여전히 일관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가랴의 모습을 보자.


▷ 분향의 직무를 맡게 되는 은혜를 입는다.

(눅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눅 1:9) 『어느 날 제사장의 관례를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 제비를 뽑아 :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뤄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cf. 24반열이 1년에 두차례 성전봉사를 할때, 각 반열에는 1천명정도의 제사장이 있었으며 직무분담은 제비뽑기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순종했다. 특히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은 제사장에게 있어 평생에 한번도 어려운 기회였기에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번에 사가랴가 맡은 것이다.

- 주의 성전에 들어가 : 여기서 ‘성전’은 ‘나오스’(ναό́ς)라고 해서 지성소를 포함한 성소로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으며,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 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 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 된다.


▷ 기도의 시간에 천사를 만나다.

(눅 1:10-11)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0-11)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 많은 사람들의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 때에 주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


▷ 1:11-20은 천사와의 대화


▷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가랴

(눅 1:21-23)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 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 사가랴가 나오지 않음에 ‘긴장과 두려움’으로 백성들이 기다린 이유는 분향의 마지막 순서로서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행하는 아론의 축복선포의식을 해야하는데, 성전에 들어간 사가랴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의 규례집에는 백성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제사장은 기도를 길게 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 그런데 긴장 속에서 맞은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함을 보고 그들은 환상을 보았음을 확신한다.

-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 이는 ‘다 되었다’는 의미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어도 직무의 날 동안 완전하고 성실하게 이행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정리]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열심히 자신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상황의 어려움이 주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성전에서 분향하는 영광의 순간도, 천사가 나타나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한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란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감당한다.

 

[사가랴, 일관된 기도에 응답받다]

▷ 사가랴의 일상적인 상황

(눅 1: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 사가랴는 분향하고, 사람들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이다. 사가랴에게는 분향하는 것자체만으로도 감격적인 상황이었다.


▷ 천사가 눈 앞에 나타나다.

(눅 1: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 일상적이고 은혜로운 상황에서 특별한 상황이 되었다. 환상이나 꿈이 아닌 실제로 천사가 나타났고 향단의 우편에 서 있다.

Q. 천사는 왜 우편에 있을까? ‘우편’은 영예로운 자리를 상징한다. 곧 사가랴를 찾아온 천사는 불길한 것이 아닌 기쁨을 전하기 위해 왔음을 암시한다.


▷ 사가랴의 반응은 놀람과 무서움

(눅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 생전에 처음 보게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자 사가랴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는 단순한 놀람과 무서움이 아닌 깊은 감정상의 동요의 모습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사의 출현은 사실상 사가랴를 압도하고 있었다.


▷ 천사를 통한 응답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 사가랴여 : 대상의 이름을 부른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부르는 것은 앞으로 있을 평화의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ex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이름을 불렀다. 아담부터~

2. 무서워하지 말라 :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가랴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하는 것은?

a. 대상이 지금 어떤 모습인줄 알게 해줌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두려움에 집중하여 자신이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대상에게 무서워 하지 말라고 함으로 객관적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대상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알게 해준다.

b. 대상의 상황과 그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I 메시지이다. 즉, 단순한 명령이 아닌 대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반응으로 우리가 배울 점이다. 그러나 ex 우리는 아이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볼때 용납하지 못한다.

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하나님이 주의 깊게 들으셨기 때문에’라는 의미로,

a. 사가랴의 평소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와 b. 그의 기도를 들으셨음으로 그에 대한 응답이기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c. 간구함 : 일반적인 ‘기도하다’(프로슈코마이 προσεύχομαι)가 아닌 ‘데에시스’(δέ́ησις)로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다. 즉, 사가랴의 기도는 단순히 자녀를 달라는 기도가 아닌 암울한 자기 시대의 역사 가운데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특별한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의 천사의 계시가 단순히 아들을 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하는 것이다.

→cf. 사가랴의 바른 기도자세 : 자신의 연약함과 시대의 아픔을 같이 기도하기

4.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그동안 계속된 간구에 대한 첫 응답의 내용이다.

a. ~이라 하라 : 단순한 예견이 아니라 명령의 의미가 있다.

b. 여기서 이름을 정하는 일은 아버지의 권한인데,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 아기를 자기 것으로 택하셨음을 알려준다.

c. 요한은 히브리어로 ‘요하난’(נחוי)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의미. 은혜를 간구한 사가랴의 응답이다.


▷ 요한이 감당할 사역의 내용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 태어날 아이에 대하여 일차적으로는 사가랴가 기뻐하고,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 ‘기뻐하고’(카라, χαρ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기쁨을 표현하는 경우에 누가가 자주 사용하던 단어이다.

- ‘즐거워’(아갈리아시스, ά́γαλλί́ασις) 역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를 경험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에 달한 행복을 나타낸다.

- ‘즐거워하리니’(카레손타이, χαρή́σονται)는 위의 ‘카라’와 동일한 어원.

Q. 왜 사가랴의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민족이 기쁨을 얻게 되는가?

→ 요한은 개인의 아들만으로 얻은 기쁨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써 메시야에게로 인도하는 결과 그들이 얻게될 기쁨, 즉 그가 걸어갈 길이 메시야를 예비하는 종말적 사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요한의 삶의 내용

(눅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 요한은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한 절대적 평가를 받게 된다. ex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 나실인으로서의 삶(민 6장)을 말한다. 특히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거나 시체만지는 것도 금지되었는데 요한에게 술금지만 나온 것은 제사장의 집안은 독주금지명령(레 10:9)을 특별히 강조한 듯하다.

Q. 나실인으로서 제사장으로서 구별된 삶은 아버지의 삶과 무관할까, 영향을 줄까?

→ 요한이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정의 분위기와 아버지의 모델됨은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하나님의 영감, 감동, 능력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생애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이끌림을 받음을 말하며, 그 시작이 ‘모태부터’라고 함으로 계속하여 일생을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알려준다.


▷ 요한의 사명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돌아온다. 이는 14절과 연결된다.

→ 요한의 사역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실제 요한은 일생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백성만을 대상으로 회개와 메시야 도래의 메시지를 전했다.

-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돌이킨다는 의미.

→ 이는 요한의 주요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케 함으로 되돌아옴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말라기 예언의 성취다.

(말 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은 성령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감동으로 엘리야의 감동은 하나님의 감동이다. ‘능력’은 하나님의 감동과 연결되어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에 의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 주 앞에 먼저 와서 : 요한이 있을 자리는 ‘주 앞에’이다.

-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 돌아오는 방향 : 죄인의 삶의 방식으로 불화를 일으키던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의 방식으로 돌이키고, 서로 화해함으로 하나님을 찾게 한다.

-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요한의 임무는 엘리야의 감동으로 메시야를 예비할 수 있도록 백성을 세워 준비케 하는 것이다. 실제 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메시야를 준비케 한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7:19-23)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사가랴의 반응과 의심-연약함

(눅 1: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 일관된 기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사가랴를 많이 당황하게 한다. 이는 인간적 판단을 앞세움으로 응답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cf. (창 18:10-14)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사가랴가 말하지 못하게 됨은 벌인가 은혜인가?

(눅 1:19-20)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의 모습은 다니엘서에서 나온다. 거기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며(단 8:16, 9:22), 다니엘에게 이상을 해석하면서 미래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고(8:17), 다니엘에게 명철과 지혜를 주었다.(9:22) 이를 잘 아는 제사장 사가랴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어 분명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소식은 믿을만함을 알게 한다.

-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 천사의 역할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 ‘좋은 소식’이라고 함으로 메시야와 관련된 이 ‘좋은 소식’을 사가랴는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 사가랴가 말하지 못하게 됨은 예언을 믿지 못함으로 일어난 상황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성취된 예언이 확증될때 다시 말하게 됨으로 사가랴에게는 더욱 확신을 갖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요한의 출생이전까지 비밀로 할 수 있게 한다.


[정리]

사가랴의 기도는 개인을 넘어 민족의 구원을 바라보는 일관된 고백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었다는 것은 그에게 엘리야의 역할을 할 요한이 준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사장으로서 일관된 삶을 살아온 사가랴에게 요한의 삶과 사명에 대한 예언은 새로 주어진 사명이다.

사가랴의 자연스러운 연약함은 말하지 못하게 되지만, 이는 복음과 예언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고 이후 더욱 예언을 확신함으로 요한을 예언대로 키우는 역할을 하게 한다.

 

[사가랴, 임신을 숨기는 이유?]

제사장으로서 일관된 삶을 살아오던 사가랴, 그에게는 자녀가 없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나타났고 자녀가, 요한이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간구함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Q. 왜 천사는 제사장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분향하는 직무를 맡은 날 나타났을까?

1. 사가랴는 반열의 차례에 따라 매년 2번씩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전에 갔었다. 그는 나이가 많았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 그 직무를 감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어느날 제비를 통해 분향직무를 맡는다. 제사장으로서 최고의 영예로운 직무를 맡게 되었다. 

2. 바로 그때 천사가 나타난다. (요즘 한 개그처럼) 분향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천사가 온 것일까, 천사가 오기 위해 분향직무를 맡게 했을까? 우리는 직감적으로 느낀다. 천사와 분향직무는 특별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 우리에게는 언제 이런 영예를 경험할까? 사가랴처럼 무엇이 있어야 한다면? 제사장으로서 일관된 삶, 일관된 직무의 헌신, 그런 중에 무언가 부족하고 결핍된 삶의 상황들(이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 영향받지 않은 오래된 간구(삶에 대한 애도를 지나 승화)..

→ 하나님은 언제 오시나? 사가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부족한 삶의 상황과 애도를 지난 승화), 그런 중에 하나님의 의도된 시기와 방법으로..

⇒ 사가랴에게 분향직무와 천사의 방문과 수태고지는 하나님의 최고의 의도된 순간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나의 일관된 삶과 헌신 중에 최고의 순간을 하나님은 준비하신다.


Q. 이런 일생 최고의 순간을 맞은 사가랴는 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다니나? 그러나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게 된다.

cf. 오히려 말하지 못함은 그에게 벌이 아닌 은혜였고 하나님의 보호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태어날 요한과 관련된 메시야의 비밀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의 임신과 사가랴의 행동

(눅 1:24-25) 『[24]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 1:24-25) 『[24] 그 뒤에 얼마 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서 살면서 말하기를 [25] 주께서 나를 어여삐 보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나의 치욕을 씻어 주셨다 하였다.』

-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 최고의 영예의 순간 얼마뒤 아내가 임신을 한다. 예언은 어긋남 없이 성취되었다.

-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 임신후 엘리사벳은 다섯달 동안 공공연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 숨어 있다-페리크륍토(περικρύπτω) - ‘~둘레에’(페리, περί) + 숨기다 은폐하다(크륍토, κρύπτω) → 사방으로 은폐하다, 둘레를 감싸 빈틈없이 숨기다.

→ 재귀대명사를 목적어로 미완료과거형이므로, ‘그녀는 그녀 자신을 완전히 감싸 계속 은폐하고 있었다’ 즉 그녀는 가족이외에는 아무 사람도 접촉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Q. 오래 기다린 임신인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었나, 노산이기에 조심하기 위함일까, 사가랴의 일시적 실어증에 대해 사람들의 종교적 비난을 피하기 위함일까?

⇒ 결국 오랫동안 기다린 임신, 축하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알릴 임신을 숨기기로 한 것은 그들의 합일한 선택이었다.

Q. 왜 그들 부부의 선택인가? 엘리사벳은 모든 것을 알고 있나? → 알고 있다. 엘리사벳이 해산을 하고 할례를 주며 이름을 지을 때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게 한다.

(눅 1: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 엘리사벳의 고백, 사가랴의 고백에서는 아브라함이 생각났다면 이 고백에서는 한나가 생각나게 한다. 불임으로 슬프고 원통해하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시고 그 아이가 젖이 뗄때 하나님께 드리며 고백한다.(삼상 1-2장)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 돌아보다(에페이돈, ἐπειδον)는 ‘~위를 보다’는 의미로 ‘관심을 기울이다. 주목하다’의 의미. 즉 주께 관심을 기울이고 주목하신 것이 자신이 살아온 하루하루의 날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 우리는 우리 삶에 부족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하루하루를 주목하고 계심을 엘리사벳은 고백하고 있다.


Q. 다섯달을 숨어 있던 엘리사벳은 언제 멈추나?


(눅 1:26-38)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cf. 1. 요한의 수태고지와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알리는 천사의 표현이 비슷하다.

2. 사가랴가 최고의 영예의 순간이라면, 마리아는 평범한 일상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3. 육개월이 된 엘리사벳의 임신은 마리아에게 확신을 준다.


▷ 마리아의 방문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39-40) 『[39]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서둘러 가서,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엘리사벳,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친다]

오늘 나눌 부분은 그렇게 마리아가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바로 엘리사벳의 집에 왔을 때 엘리사벳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과 삶에 어떤 적용과 은혜를 말하는지 찾아보고자 한다.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천사를 만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급하게 길을 떠나 150km나 떨어진 사가랴의 집으로 갔고 엘리사벳을 문안한다.


▷ 이때 엘리사벳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

(눅 1:41-42)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1-42)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아기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42] 큰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1. 듣는다 - 감각동사로서 엘리사벳의 모든 반응은 들음에서 시작했다.

→ 아코우오(ἀκού́ω, hear) 듣는다 청취하다 들려오다 소문을 내다 보고되다 깨닫다

2. 들음은 뱃속의 무언가를 움직이게 했다. 그것이 아기의 태동으로 묘사된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오는 것을 듣는다. 그러자 태중에 아이가 뛰논다.

→ 마리아의 문안을 듣기전까지 엘리사벳은 조용히 숨어지냈다.

(눅 1:24)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3. 뱃속부터의 역동은 성령충만으로 나온다. 충만은 채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채워짐을 의미한다.

4. 채워진 성령이 큰소리로 외치게 한다.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불러 : 아나포네오(ἀναφωνέ́ω) = 아나(ἀνά́, 위로 향하여) + 포네오(φωνέω, 부르짖다)

소리 : 크라우게(κραυγη) 단순한 소리가 아닌 외침, 부르짖음

곧 엘리사벳의 ‘큰 소리로 불러’는 사람이 아닌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소리이고, 매우 큰 음량으로 하늘을 향해 메시야를 임신한 마리아를 만난 기쁨과 감격을 표출하고 있다.

⇒ 엘리사벳은 듣고, 역동적 움직임이 있고, 뱃 속부터 채워지고, 그 채워진 것이 하늘을 향한 표출했다.


Q. 다섯달을 숨어 있었던 엘리사벳이 왜 마리아의 방문을 들을 때 바뀔까?

1. 엘리사벳의 표현의 변화는 성격의 변화인가? 그녀는 임신 경험이 없는 초산이면서 동시에 노산이다. 그 사실은 그를 굉장히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몸의 변화는 있으나 성격의 변화까지 이어지는 않는다. 5개월을 숨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을 볼때 그것이 오히려 엘리사벳의 자연스러운 성향이었을 것이다.

2. 첫태동이었을까? 아니면 평상시와 다른 태동이었을까? 6개월된 태아가 태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의사출신인 누가는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연결하여 이해되고 묘사하고 있다. 역동적인 태동의 시작이 마리아의 문안을 듣는 순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었을 때에

3. 역동적인 태동의 시작은 마리아의 방문을 들었을 때부터? 그것은 마리아를 보고 느껴진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느껴졌다는 것. 그래서 엘리사벳은 이어지는 찬가를 부르며 마리아를 맞이한다.

⇒ [누가의 입장]

1. 5개월을 숨어 있을(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던 엘리사벳의 성향으로 볼때, 누가가 이부분을 강조했던 것은 엘리사벳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누가는 단순한 태동이 아닌 역동적인 태동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성령충만과 연결한다.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반응은 그녀도 놀랄 정도로 단순한 태동 그 이상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ex) (마 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3. 역동적 태동과 성령충만은 세례요한의 모습이다. 이는 복중에서 반응하는 메시야를 향한 역동적인 모습이다.

a. 가브리엘의 예언 (눅 1:15-17)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b. 복중에서부터 메시야를 향한 충만함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엘리사벳의 변화는 단순한 태동이 아닌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동하는 메시아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복중의 태아의 주도적인 반응이다.

cf. 누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엘리사벳의 노래중에 있다.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cf. 5개월간 엘리사벳은 무엇을 했을까? 태교인가? 남편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실제로 자신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임신이 되면서 그녀는 5개월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뱃 속의 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메시야를 기다릴 것을 알고 이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되자 반대로 태아가 역동하기 시작했다. 즉 엘리사벳과 태아는 메시아에 대한 민감함이 발달하고 있었고, 후에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그 민감함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엘리야의 심정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cf. 공통점?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가듯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간다. 엘리사벳이 반응하듯 요한도 동일한 반응을 한다.


▷ 엘리사벳의 노래

(눅 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 여자 중에 →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복된’이란 최상급의 표현. 즉 엘리사벳이 바라본 마리아는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잉태함으로 세상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된 여인으로 느껴졌다.

-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복이 있다 = ευ(좋은) + λόγος(말해진 것), 칭찬하다, 종교적으로 축복하다)


▷ 엘리사벳의 감격과 찬양

(눅 1: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눅 1:43)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 내 주의 어머니

→ 상황 : 누가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들어옴을 듣고 태중에 역동적인 태동을 느낀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아닌 하늘을 향해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당황했을 마리아는 그의 찬양을 듣게 된다.

- 이 어찌 된 일인가 → 그토록 묵상하던 메시아의 어머니가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에 기쁨과 놀라움을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ex) 후에 있을 요한의 감격 (마 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4)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 엘리사벳의 노래에서 보듯,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태중에 아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던 엘리사벳의 반응이 그의 고백에서 나온다.

- 기쁨 : 아갈리아스(ἀγαλλί́αις) 하늘로 솟아오를 정도로 몹시 기뻐하다는 의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 메시야와 관련된 기쁨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ex)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의 임신을 말할 때 즐거워하라 한다. 이는 그의 임신이 메시야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cf.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기쁘게 했을까?

→ 한 여인은 나이들어 임신하고, 한 여인은 결혼전에 임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의 이유는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메시야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은 어떻게 뱃 속부터 메시야를 환영하는가? - 무의식적 반응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1.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직분을 일관되게 감당하면서 메시야에 대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그들의 간구와 메시야의 준비를 함께 연결하여 요한을 주셨다. 그들의 오래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가 된다.

2. 엘리사벳의 깊은 곳에는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있고, 그 갈망과 요한의 태동은 성령충만으로 이어진다.

3.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통찰과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이 같이 표현된다. 그녀가 임신초기의 마리아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6개월간의 묵상의 결과이다. 즉 유경험자의 축복이다. cf. 마리아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나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다.


cf. 이는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된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마리아의 고백은 말씀이 그대로, 전혀 조금도 훼손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하며,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이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고백이다.


cf. 동일한 고백이 누가복음에 있다. 사역 활동중인 예수께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높여 말한다. 그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엘리사벳과 마리아와 연결된다.

(눅 11:27-28)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정리]

엘리사벳은 말씀과 메시야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었다.

그 묵상은 태교로 이어지고,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에 반응하게 한다.

엘리사벳은 뱃 속의 소리에 민감하고 기쁨의 감정으로 표출하며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자신의 경험은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되며 그런 마리아에게 희망이 된다.

⇒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에 대한 고백과 표현을 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은 메시야를 준비한다]


(눅 1:41-45)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럼,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 제사장의 가정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 유대 왕 헤롯 때에?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런 시기이지만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다.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다. 즉 이들은 제사장 가정이다.

⇒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출생의 비밀은 그런 제사장의 가정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 가정의 일관된 신앙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신분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자세까지도 바른 모습(일관된 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 ‘하나님 앞에 의인’의 삶을,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하는’ 삶을 사는 가정이다.

⇒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 예비된 비움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 완벽해 보이는 이 가정에 비움, 즉 채워지길 바라는 것이 있다. 자식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식이 없고 나이도 많다. 점점 가능성이 없다.

Q. 우리 가족은 이런 두가지의 모습이 있을까? 무엇이 완벽하고 무엇이 비워있는가?


▷  그런 상황이지만 사가랴는 여전히 일관되게 직무를 감당한다.

(눅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cf.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믿음의 고백 사이에서 무엇이 영향을 주고 있을까? 그런 속에서 여전히 일관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가랴의 모습을 보자.


▷ 분향의 직무를 맡게 되는 은혜를 입는다. - 이것은 특별한 은혜다.

(눅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가랴에게, 기도의 시간에 천사가 나타난다.

(눅 1:10-11)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 1:11-20은 천사와의 대화, 이중에 자세히 보고 싶은 것은 13절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하나님이 주의 깊게 들으셨기 때문에’라는 의미,

a. 사가랴는 상황과 고백 사이에 평소에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

b. 하나님은 그런 그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것

c. 간구함 : 일반적인 ‘기도하다’(프로슈코마이 προσεύχομαι)가 아닌 ‘데에시스’(δέ́ησις)로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다. 즉, 사가랴의 기도는 단순히 자녀를 달라는 기도가 아닌 암울한 자기 시대의 역사 가운데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특별한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의 천사의 계시가 단순히 아들을 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하는 것이다.

→cf. 사가랴의 바른 기도자세 : 자신의 연약함과 시대의 아픔을 같이 기도하기

Q. 우리는 어떤 간구가 있었고 응답이 있었나? 그동안의 간구와 응답을 잊고 있지 않나?


▷ 이후 사가랴는 요한의 출생까지 말을 못하고 엘리사벳은 5개월간 임신을 들어내지 않는다.

(눅 1:24-25) 『[24]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 엘리사벳의 고백, 돌아보다(에페이돈, ἐπειδον)는 ‘~위를 보다’는 의미로 ‘관심을 기울이다. 주목하다’의 의미. 즉 주께 관심을 기울이고 주목하신 것이 자신이 살아온 하루하루의 날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 우리는 우리 삶에 부족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하루하루를 주목하고 계심을 엘리사벳은 고백하고 있다.


Q. 다섯달을 숨어 있던 엘리사벳은 언제 멈추나? 가브리엘을 통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으로 왔을 때다.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천사를 만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급하게 길을 떠나 150km나 떨어진 사가랴의 집으로 갔고 엘리사벳을 문안한다.


▷ 이때 엘리사벳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 4단계

(눅 1:41-42)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1. 듣는다 - 감각동사로서 엘리사벳의 모든 반응은 들음에서 시작했다.

→ 아코우오(ἀκού́ω, hear) 듣는다 청취하다 들려오다 소문을 내다 보고되다 깨닫다

2. 들음은 뱃속의 무언가를 움직이게 했다. 그것이 아기의 태동으로 묘사된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마리아의 문안을 듣기전까지 조용히 숨어지던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오는 것을 듣는다. 그러자 태중에 아이가 뛰논다.

3. 뱃속부터의 역동은 성령충만으로 나온다. 충만은 채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채워짐을 의미한다. cf. 그 뱃 속은 비워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충만하다.

4. 채워진 성령이 큰소리로 외치게 한다.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불러 : 아나포네오(ἀναφωνέ́ω) = 아나(ἀνά́, 위로 향하여) + 포네오(φωνέω, 부르짖다)

소리 : 크라우게(κραυγη) 단순한 소리가 아닌 외침, 부르짖음

곧 엘리사벳의 ‘큰 소리로 불러’는 사람이 아닌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소리이고, 매우 큰 음량으로 하늘을 향해 메시야를 임신한 마리아를 만난 기쁨과 감격을 표출하고 있다.

⇒ 엘리사벳은 듣고, 역동적 움직임이 있고, 뱃 속부터 채워지고, 그 채워진 것이 하늘을 향한 표출했다.

Q.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낄까?      어떤 반응을 하나? 비움 or 충만?

   어디를 향해 어떻게 반응하나? 비움에 대한 or 충만으로 하늘을 향해?

⇒ 엘리사벳의 핵심은 메시야에 대한 듣고 느끼고 충만하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cf. 5개월간 엘리사벳은 무엇을 했을까? 태교인가? 남편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실제로 자신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임신이 되면서 그녀는 5개월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뱃 속의 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메시야를 기다릴 것을 알고 이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되자 반대로 태아가 역동하기 시작했다. 즉 엘리사벳과 태아는 메시아에 대한 민감함이 발달하고 있었고, 후에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그 민감함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엘리야의 심정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cf. 공통점?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가듯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간다. 엘리사벳이 반응하듯 요한도 동일한 반응을 한다.


▷ 엘리사벳의 노래

(눅 1:42-45)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 상황 : 누가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먼저는 마리아가 자신의 임신을 말한 것이 아니다. 먼저는 마리아가 들어옴을 듣고 태중에 역동적인 태동을 엘리사벳이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가 아닌 하늘을 향해 고백하고 있다. 그런 중에 당황했을 마리아는 그의 찬양을 듣게 된다.

→ 엘리사벳의 노래에서 보듯,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태중에 아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던 엘리사벳의 반응이 그의 고백에서 나온다.

- 기쁨 : 아갈리아스(ἀγαλλί́αις) 하늘로 솟아오를 정도로 몹시 기뻐하다는 의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 메시야와 관련된 기쁨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cf.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기쁘게 했을까?

→ 한 여인은 나이들어 임신하고, 한 여인은 결혼전에 임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의 이유는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메시야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은 어떻게 뱃 속부터 메시야를 환영하는가? - 무의식적 반응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1.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직분을 일관되게 감당하면서 메시야에 대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그들의 간구와 메시야의 준비를 함께 연결하여 요한을 주셨다. 그들의 오래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가 된다.

2. 엘리사벳의 깊은 곳에는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있고, 그 갈망과 요한의 태동은 성령충만으로 이어진다.

3.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통찰과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이 같이 표현된다. 그녀가 임신초기의 마리아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6개월간의 묵상의 결과이다. 즉 유경험자의 축복이다. cf. 마리아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나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다.


cf. 이는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된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마리아의 고백은 말씀이 그대로, 전혀 조금도 훼손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하며,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이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고백이다.


[정리]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비움에 대한 간구는 메시야였다. 그 응답으로 요한이다.

엘리사벳은 말씀과 메시야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 묵상은 태교로 이어지고,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에 반응하게 한다.

엘리사벳은 뱃 속의 소리에 민감하고 기쁨의 감정으로 표출하며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자신의 경험은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되며 그런 마리아에게 희망이 된다.

⇒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에 대한 고백과 표현을 한다.


 

[세례요한의 출산-부부고백과 이웃의 반응]

(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부부의 고백 ① 엘리사벳이 출산하다.

- 낳으니 : 겐나오(γεννάω) 부모가 되다, 자식을 얻다. → 의미 : 부모가 아이를 출산함으로써 혈연적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고 또한 부모로서의 권리가 생겨난다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cf. 천사의 예언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표현한다.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cf. 엘리사벳의 노산의 기적적인 출산은 뒤에 이어질 마리아의 처녀출산의 기적도 연결된다.


(눅 1: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 하더라.』

-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 : ‘그가 그의 긍휼을 크게 눈에 뜨게 하고 계셨다’는 의미.

→ 대가 끊어질 상황에서, 특히 늙도록 출산하지 못하는 수치적인 상황에서, 엘리사벳의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의 능력과 백성을 향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증거로 표현하고 있다.

▸이웃의 반응①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 엘리사벳의 출산의 소식은 하나님의 긍휼의 기적이라고 서로 말했고 이것을 서로 들었다.

▸이웃의 반응② 함께 즐거워 하더라 → 이웃의 축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cf. 천사의 예언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눅 1: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cf. 할례 : 아기의 출산 후 7일동안 부정하다(레12:2)고 여겨 8일째에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한다. 

▸이웃의 반응③ 할례하러 와서 : 출산을 즐거워 하던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들이 요한의 할례식에 참석하러 왔다.

▸이웃의 반응④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에게도 같은 이름을 짓는 것은 당시의 사회풍속이다. 즉 그들은 즐겁게 축하면서도 관례적으로 행동한다.


(눅 1: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부부의 고백② 관례적인 이웃의 반응과 달리 엘리사벳은 미리 준비된 이름을 말한다.

→ 이웃과는 달리 당시의 시대적 풍속과는 거리가 있는 엘리사벳의 모습이다. 이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들의 일관된 모습은 전통과 신앙을 유지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관례와 무관한 이름을 짓는 것은 특별한 고백이다.

cf. 하나님도 그러한 풍속을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천사를 통해 이름을 주고 부부는 그 이름을 선택한다. 부부는 신앙의 관례 속에서 하나님을 인도를 선택 고백하고 있다.

→ 부인의 역할 : 남편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다. 요한을 말한다는 것은 그것에 동의하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 이웃도 하나님의 긍휼을 들었고 함께 즐거워 했고 관례적인 이름을 말한다.)

⇒ 부부는 그 가정과 자녀에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함께 고백하고 있다.


(눅 1: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이웃의 반응⑤ 이름한 이가 없다 →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그녀의 말에 반대하고 있다. 이는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전혀 없다’는 강한 부정이다. 결국 답답한 친척들은 아이의 이름에 관하여 최종적인 권한을 가진 아비 사가랴에게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Q. 하나님은 왜 집안에 요한이란 이름이 없음에도, 그들의 관례를 아심에도 요한이란 이름을 주셨을까? 요한의 의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 하나님의 일관된 핵심은 그들을 은혜입게 한다. 요한의 임신예언과 과정, 긍휼로 받아드려지는 출산과 이후의 요한의 삶은 메시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관되게 역사하고 있다.


(눅 1: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이웃의 반응⑥ 물으니 : 친척들은 어떤 몸짓을 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래서 전통을 잘 아는 사가랴에 물어 전통적인 이름을 지으려 한다, 


(눅 1: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부부의 고백③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 사가랴는 서판을 달라 하고 그 이 이름을 요한이라 한다. 사가랴 역시 엘리사벳과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 ⇒ 이들의 동일한 고백은 관례를 넘어 그동안 일관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과 그들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합친 고백을 표현하고 있다.

▸이웃의 반응⑦ 다 놀랍게 여기더라 →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경이로움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a.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몸짓만으로 의사소통한 사가랴에게서 동일한 대답을 들은 것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놀랍게 했다. b.또한 엘리사벳의 이야기가 독자적인 이야기가 아닌 부부의 합의된 것임을 알게 된 것도 놀라우며, c.전통적인 삶을 살아온 두부부에게서 그와 다른 모습을 본 것도 그들에게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부부의 고백④ 이에 반해 부부는 의심에서 고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내왔기에 요한이란 이름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눅 1:18,20)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눅 1: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 직역 : 이에 즉시 그의 입과 그의 혀가 열렸다.

▸하나님의 활동-사가랴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쓴 즉시 바로 그 현장에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또한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20)의 약속대로 그날 풀어주셨다.

▸부부의 고백⑤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정확히 기억했다면 그날 자신의 입이 열릴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날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임신과 과정을 보면서 점점 그러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부부의 고백⑥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 a.사가랴는 혀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말을 하게 되자 말과 찬양을 동시에 한다. 즉 실어증에서 풀리자마자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일회적인 찬양이 아니라 계속적인 찬양임을 보여준다. b.10개월간의 기다림과 기대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함에 대한 회개와 약속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됨을 찬양하는 것이다. c. 동시에 민족적으로 기다리던 메시야를 드디어 보게 됨을 바라보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눅 1: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이웃의 반응⑧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 그동안 사가랴가 말하지 못함에 대해 이미 들은 이웃은 그가 출산한 것도 놀라운데 말하게 되고 찬양하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이 기적의 상황을 보며 그들은 경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웃의 반응⑨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 요한의 출생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소문이 되어 퍼졌다.


(눅 1: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웃의 반응⑩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주었기에 그 놀라움과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었다. 즉 사가랴의 부부가 경험한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사람들에게까지 경험되게 되었다.

▸이웃의 반응⑪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 감탄사적인 의미. 요한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뿐 아니라 강한 설레임과 기대감을 표현한다.

-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정리]

10개월의 임신과정과 출산은 사가랴부부로 하여금 의심에 대한 회개와 약속에 대해 신실하고 일관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이는 그들의 신앙이 일관됨에 대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신앙적이 되고 그에 대한 찬양으로 고백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웃의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게 일반적이고 관례적이다. 그러나 사가랴부부의 고백과 찬양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한다.



[사가랴의 찬가속에 나오는 고백]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람의 생각이 아닌 성령의 충만으로 감동받은 예언을 한다.

- 예언하여 → 프로페튜오(προφητεύω)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 단순한 앞일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함으로 선지자적 관점에서 찬양하고 있으며 이 예언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고 있다.


(눅 1:68-79)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 원문구조분석

68 A 하나님의 돌아보심

69   B 구원의 뿔을 일으키심

70     C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심

71       D 원수로부터 구원하심

72,73    M 언약을 기억하심

74,75       D'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

76     C'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음

77   B' 구원을 알게 함

78,79 A' 평강의 길로 인도하심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 사가랴는 자신이 바라보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는 그의 삶을 통해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시고 속량하시기에 찬양받을 만한 분이심을 말한다.

a. 돌아보사(에피스켑토마이 ἐπισκέ́πτομαι) 도움을 주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다’ → 그의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백성을 보살피는 분으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요한의 탄생은 역시 자기 백성을 돌보시려고 오셨을 찬양하는 것이다.

b. 속량하다(뤼트로오 λυτρόω) 구속 해방 자유 → 장자의 속전, 노예상태의 해방 등 누군가가 한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 사가랴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구원의 은혜를 미리 내다보고 전심으로 찬양하고 있다.

Q.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바라보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찬양하고 고백하는가?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구원의 뿔 → ‘힘 능력’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런 힘과 능력을 지닌 구세주를 상징한다.

-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혈연적 관계로서 ‘가문’을 말하며,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나와 그들을 억압과 압제에서 구원할 것을 믿고 있었다.

↠ 사가랴는 이스라엘백성이 그토록 기다리는 구약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말하는 메시야가 바로 구약에서 이미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임을 고백하고 있다.

Q.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메시야로 이어지는 사가랴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보게 하는가?


(눅 1: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메시야의 사역은 구약시대부터 계속적으로 예언되어 왔으며 이제야 비로소 성취된다고 고백한다.

- 선지자(프로페테스 προφητης) ‘앞에서 미리 말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메시야의 출현과 구원사역을 예언했다.

-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와 같이, ~대로’로 선지사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똑같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 사가랴에게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며, 그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음을 찬양한다.

Q. 말씀의 신실함을 고백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현실과 말씀이 분리된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는가?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cf. = (시 106:10)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 원수, 미워하는 모든 자? 1. 지배국으로 유대인을 압제하고 속박하는 로마제국이나 그러한 세력들, 2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섭리에 방해가 되는 사단과 그의 세력

↠ 사가랴는 하나님의 장대한 구속역사 속에서 메시야를 노래하고 있음으로 이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훼방하는 자들임을 고백한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이 이러한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를 찬양하고 있다.

Q. 장대한 구속역사 속에서 메시야를 찬양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근시안적인 우리의 조급함을 보이는 우리의 고백을 보게 하는가?


(눅 1:72-73)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 ‘긍휼을 베푸시며, 긍휼을 행하시며’로서 이는 정적인 긍휼이 아닌 역동적이고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 사가랴는 조상과 모든 백성들을 향해 직접적이고 역동적으로 베풀어지는 긍휼임을 찬양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수많은 실패와 죄악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으로 구현된다. cf. 이러한 적극적인 하나님의 긍휼행하기는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어 택한 백성들을 위해 대신 죽게 하셨다.

-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Q. 사가랴는 왜 하나님의 언약을 ‘거룩한 언약’이라 했을까?

a. 하나님이 주도하여 맺으셨기 때문에 절대적인 위엄이 있는 언약, 즉 반드시 이루어질 믿을 만한 언약으로 언약의 성취를 강조한다.

b.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여 성결성을 강조한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사역이 담겨져 있다.

-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cf. (창 17:4-9)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원수를 물리치고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맹세하셨다. 이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것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실성이 보장된다.

Q. 거룩하고 성결한 하나님의 약속을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막연함으로 조급한 우리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게 하는가?


(눅 1:74-75)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cf.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a.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는다. → 71절의 약속이, 원수에게서 구원하시는 일이 일어난다.

b. 종신토록 + 주의 앞에서 +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 섬기게 하리라

→ 종신토록 : 우리의 생명이 살아 있는 모든 날들 동안에,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끊임없이 성실하게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것

→ 주의 앞에서 :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듯 만인제사장적인 모습

→ 성결 : 호시오테스(ὁσιό́της) 경건과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즉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항상 그 앞에서 깨끗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의 :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 ‘옳음 정의’ 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

→ 성결과 의 : 두 단어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압축하여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는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오직 메시야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 메시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 두려움 없이 : 부정의 ‘아’(α) + 놀람 두려움(포보스 φόβος) → 두려워하지 않는, 놀라지 않는 → 일차적으로는 원수들로 인한 두려움과 놀람,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놀람 → 하나님은 이 모든 두려움을 없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섬기게 하리라 : 라트류오(λατρεύω)는 종이 주인을 섬길때 철저한 복종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 사가랴는 원수로부터의 구원을 고백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고백한다.

Q. 사가랴는 시간과 마음과 감정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데 우리의 섬김은 너무나 조건부적이지 않을까?


(눅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cf. (눅 1: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 사가랴의 찬가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자신의 아들, 곧 세례 요한의 장래의 사명에 대한 예언을 노래한다. 이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 즉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불려질 것을 예언한다

-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 구체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어떤 길을 준비하는지 말해준다. 요한은 ‘주 앞에 앞서 간다. 그리고 그의 길을 준비한다.’

cf. 천사의 예언과 일치한다.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사가랴는 구약의 선지자와 자기 아들의 선지자의 삶을 연결하여 함께 고백하고 있다.

Q. 구약의 말씀과 천사의 예언으로 아들에 대한 꿈을 꾸는 사가랴의 모습은 우리가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과 어떻게 다른가?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cf.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죄짓고 죄사함을 받는 대상은 주의 백성이다. 이들이 얻는 죄사함은 포로가 자유의 몸이 되듯 죄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이들을  위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죄의 속박과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 역사 안에서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고백하는 사가랴에게 이것은 다윗의 집을 통해 오는 구원의 그리스도의 길을 알게 할 세례요한이 사명으로 외칠 내용이다.

Q. 구원과 그리스도의 길을 외칠 아들의 사명을 아는 사가랴의 고백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어떤 길을 가고자 원하는지 분명한 차이를 보게 하는가?


(눅 1:78-79)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cf.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 돋는 해 → 단순한 일출이 아니라 메시야를 의미하며 그 메시야가 돋는 해가 세상을 비추듯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을 비추고 있다.

- 비치고 : 에피파이노(ἐπιφαί́νω) = 위에서(에피 ἐπι) + 밝히다 드러내다(파이노 φαίνω) → 메시야의 빛이 위에서 비쳐지고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을 비침으로 긍휼과 생명의 길로 비춘다.

- 임하여(에피스켑토마이 ἐπισκέ́πτομαι) → 68절의 ‘돌아보사’와 같은 단어로 미래형이다.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보심과 하나님의 긍휼의 해가 위에서부터 임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 평강(에이레네 εἰρήνης)는 전쟁이나 투쟁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평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의 의미이다.

cf.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인도하시리로다 : 카튜뒤노(κατεθύνω) = ~ 따라서(카타 κατά) + 곧게 하다 바르게 하다(유뒤노 εὐθύνω) → 똑바로 하다, 곧게 하다, 바로 안내하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 한다는 의미

↠ 사가랴는 돌아보고 속량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메시야의 해의 비침과 평강으로 인도하심으로 연결한다.

Q.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메시야로 확장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우리의 변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는가?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정리]

사가랴의 찬양은 그의 하나님과 메시야를 향한 고백이고 아들의 사명에 대한 예언이고 기도이다.

그의 고백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비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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