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4.05.21 성경인물 복음서 14. 행복한 부모, 건강한 가정-요셉과 마리아부부
  2. 2014.05.15 성경인물 복음서 13. 중풍병자와 서기관의 심리적 현실의 시각차이
  3. 2014.04.27 성경인물 복음서 12. 집에 들어오신 예수와 삶이 바뀐 시몬의 장모
  4. 2014.04.23 성경인물 복음서 11. 권위 있는 새 교훈의 예수와 사람들의 반응
  5. 2014.04.02 성경인물 복음서 10. 표적을 구하는 신하의 아들 치유와 믿음

성경인물 복음서 14. 행복한 부모, 건강한 가정-요셉과 마리아부부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5. 21. 13:34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1. 의로운 의인의 모습-말씀을 잘 알면서도 마음은 따뜻한 요셉..

(마 1:18-19)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신 22:23-24)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

 

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2. 생각이 깊은, 그러나 자신의 선택과 하나님의 인도중 하나님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23)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4-25)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cf. ‘이 일’은 ‘이 일들’로 단수가 아닌 복수형이다. 즉 단순히 마리아의 임신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는 의미이다. ‘생각하다’ 역시 능동적 표현이 아닌 수동형으로 그런 모든 일들이 요셉은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자기 아내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요셉은 그로 인해 번민이 굉장히 심하여 파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cf. 이렇게 번민하며 파혼을 생각하는 요셉에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천사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 천사는 요셉의 감정을 읽어준다.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


마리아는?

도입설명-(눅 1:26-27)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천사의 인사 - (눅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마리아의 반응 -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의 설명 (눅 1:30-33)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모든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의 반응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마리아 반응과 고백의 특징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

⇒ 상황은 굉장히 놀랍고 두렵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굉장히 신중하고 빠른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고백으로 승화시킨다.


마리아의 지혜로움-수태소식이후 마리아는 멀리 있는 엘리사벳에게 간다.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즉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에게 갔고 3개월을 머문 후 요한이 출생하기전 돌아온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

(눅 1:46-48)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함께 하는 부부

(눅 2:1-5)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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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서문밖교회'(14.5.25)에서 행복한 가정 세미나로 한 설교이다. 

 

 

 

1.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마 1:18-19)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 요셉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3. 요셉은 자신의 선택과 하나님의 말씀중 하나님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 1:24-25)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눅 1:30-33)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1. 마리아는 지혜롭고 사리분별이 빠른 사람이다.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


2. 마리아는 지혜로운 행동을 한다.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3.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한다.

(눅 1:46-48)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눅 2:4-5)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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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3. 중풍병자와 서기관의 심리적 현실의 시각차이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5. 15. 15:43

 [중풍병자의 심리적 현실과 믿음]

(막 2: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막 2:3-4)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 중풍병자 : 이 병은 뇌출혈 등으로 몸의 일부분 혹은 전신을 움직일 서 없게 된 되는 증상

- 무리를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 객관적 현실.

cf. 우리 생활 속에서 이런 경우는?

cf. 객관적 현실 중 하나는 무리가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

-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 심리적 현실.

cf. 당시 팔레스타인의 서민의 집 지붕은? 

cf. 집의 지붕을 벗겨 내림으로

cf. 과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했을까? 예수는 이들의 마음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믿음..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예수께서는 이들의 믿음을 보셨다. 이 믿음을 지금 우리는 ‘심리적 현실’이라는 관점으로 말하고 있다. 이 믿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아갈 수 없는데도 그것을 극복하고 방법을 찾아 내고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음에도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다. 예수는 이것을 인정하신다.

-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께 죄사함의 권한이 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지금 중풍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죄사함이다. cf. 심리적 현실과 죄의 기억의 관계는?


[정리]

막혀 있는 객관적 현실 속에서 무엇이 그들을 적극적인 심리적 현실로 보게 했을까? 

 

 

[서기관의 심리적 현실과 불신]

* 서기관의 생각

(막 2:6-7)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cf. 일반 사람들은 예수를 메사야로 보고 따른다.

Q. 무엇이 그들이 메시야를 볼 수 없게 하는가?

cf.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 이들의 객관적 현실은 예수를 메시야로 보고 그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온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심리적 현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cf.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 와서 말씀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서기관은 말씀을 듣지 않는다.


* 예수님의 반응  (막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 예수께서는 그들이 속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중심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셨다.

Q. 만약 우리의 경우는 어떠실까? 우리가 자녀나 남편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cf. 문제는 서기관도 우리도 그 순간까지 전혀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의도  (막 2:9-10)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Q. 둘중 어느것이 쉬울까?

cf.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고 예수님도 메시야로서 권세를 표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을 치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은?

(막 2:10-11) 『[10]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중풍병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 내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 신적인 선언을 하신다.

-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 완전한 치유선언을 하신다.


* 사람들의 반응

(막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즉각적인 치료는 모든 사람과 서기관 앞에서 보여졌고, 예수의 치료선언과 죄사함선언은 메시야로서 증명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정리]

중풍병자의 심리적 현실은 객관적 현실을 극복하게 한다. 믿음으로 나아가며 예수를 메시야로 바라보며 죄사함과 치유선포를 받는다.

서기관의 심리적 현실은 자신이 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예수를 한 인간으로만 보기 때문에 놀라운 객관적 현실 속에서도 전혀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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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2. 집에 들어오신 예수와 삶이 바뀐 시몬의 장모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4. 27. 14:54

 

 

(막 1:29-31)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 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분별력, ‘분화’


(막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Q. 예수께서는 왜 그 집에 들어갔을까? 숙박하러, 아님 시몬의 초대로? → 그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서 다양한 일을 하셨다. 그 중에 그 집에 있는 무언가를 특별하게 고치시고 살리시고 문제를 해결하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 맹인의 눈을 고치신다. (마 9:28-29)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신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신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 집에서 성경에 대해 자세히 풀어 말씀하신다. (막 10: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서 딸을 살린다. (막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 향유옥합을 드리는 여인의 마음을 받으신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예수께서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 속으로 가정 속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그리고 그 집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만나시고 그것을 고치고 살리고 해결하신다는 것이다.

cf. 우리 집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무슨 문제를 보시게 될까? 고치고 살리고 해결하실 가정의 문제는?


* 시몬의 집에는 무슨 문제가 있을까? 장모가 열병으로 아프다.

(막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 열병 : ‘고온이 동반되는 중한 열병’으로 유대인들은 이 병을 ‘불’ 또는 ‘뼈 속의 불’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높은 열을 동반하는 심각한 병으로 습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인근 지역의 흔한 풍토병이었을 것이다.

- 누워 있는지라 : 미완료 과거형으로 장모는 이 병으로 꽤 오랫동안 고생한 것으로 보인다.

cf. 우리 삶과 가정에 심하고 오래된 병이 있다면 무엇일까? ex 심리적으로 오래된 역기능적 가족분위기 등. 심하게는 도박, 폭력, 알콜, 중독에 노출된 가정부터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가족역할 등..


* 이런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막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 예수께 이야기한다. cf. 예수는 그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요청한다.

→ 누가 이야기하는가? 중보기도.


* 예수께서 움직이신다.

(막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 누워있는, 문제속에 빠져 있던 장모를 일으키신다. 말씀으로만 하지 않고 손을 잡아 일어나게 하신다. 누워있던 장모는 힘이 없다. 계속 누워있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손을 잡아 일어나게 하신다. 그럼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덜 힘들다. 예수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자 열병이 떠난다.

cf. 죽었던 소녀를 일어나게 하실 때도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cf. (눅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 예수의 감정과 마음이 나온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에 대해 분노하시고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 여자의 삶이 바뀐다.

(막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 아파서 누워있던, 계속 해서 고통속에 있던 장모는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일어나 그들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뀐다. 즉 삶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할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 일어난 장모는 그 역할을 하게 된다.

cf. 역기능적 가족역할에서 분화되고 건강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리]

우리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 그가 우리 집에 무언가를 만나주신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예수께 고하는 것이다.

그럼 예수께서 바꿔놓으신다. 그것을 일어나게 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할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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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1. 권위 있는 새 교훈의 예수와 사람들의 반응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4. 23. 12:29

 

 

(막 1:21-22)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3-28)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눅 4:31-32) 『[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눅 4:33-37)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정리]

내 속을 꿰뚫는 소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우리의 반응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권위 있는 새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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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복음서 10. 표적을 구하는 신하의 아들 치유와 믿음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4. 2. 14:17

[아버지의 청함과 이중적인 인식]

 

그 아들이 어떻게 치유되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이 전적으로 치유되기 원할까?


(요 4:46-47)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상황1.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 이곳은 예수께서 첫 표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상황2. 왕의 신하는 아들이 병이 들었고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34km 정도 떨어진 가나까지 온다.

a. ‘병들었더니’ - 그의 아들은 병이 들었다. 문법적으로 미완료시제라고 해서 계속해서 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아스데네오’(ἀσθενέ́ω)는 기본적으로 ‘약하다, 힘이 없다’는 의미로 오랜 병으로 심히 연약해져 있었을 것이다. 병명은 무엇인지 모르나 당시의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힘든 상태였음을 짐작케 한다.

b. 당시의 의술로는 어렵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찾았고 그것은 예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 거리를 아들의 회복을 위해 간청하기 위해 왔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c. ‘듣고’ - 시간적 의미로 ‘들었을 때에, 들은 후에, 듣고 나서’로 번역되는데 그는 예수께서 매우 특별한 분임을 소문 혹은 직접 목격인지는 몰라도 알고 있었고, 예수께서 가나에 오신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청한 것을 볼 때  갈릴리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d. ‘가서’ - ‘아페르코마이’(ἀπέ́ρχομαι)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떠나갔다 따라갔다’는 의미로 자신의 공무가 있음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급하게 아들을 살리기 위해 왔을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표현이다.

e. ‘청하다’ - ‘에로타오’(ἐρωτά́ω)의 미완료시제로 아버지는 계속 요청하고 있음을 말한다.

-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 아버지가 청한 내용이다.

↔ 여기까지만 볼때는 아버지의 행동과 청함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에 보게될 내용을 볼 때 그가 갖는 아들의 치유에 대한 그의 인식은 겉과 속이 다름을 보게 된다.

↭ 한 사례 속에서 첫째 이유는 아들을 아버지가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아버지의 차단의 가면이다.

셋째 이유는 아버지의 이중메시지다.

⇒ 그럼, 아버지는 정말 아들이 치유받기를 겉으로는 원하면서 속마음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다. 속마음도 원한다. 하지만 속마음을 상대에게 전함에 있어 그 표현방식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겉표현이 얼마나 다르고 일치하는지 보아야 한다. 언제까지?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줄때까지.. cf.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알리려고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신다.


-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 아버지가 청한 내용이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상황3.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왜냐하면 저가 이제 곧 죽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a. 이는 아들의 상태가 절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b.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시제를 사용함으로 그가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c. ‘죽게’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상태 혹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cf.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고쳐달라고 예수께 청하는 아버지의 인식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cf. 마 8:5-13, 눅 7:1-10의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이야기가 각색되었다는 주장과 신분과 병의 상태가 다른 점을 보아 근거가 없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비슷하기도 하지만 백부장은 칭찬은 들었으나 신하는 책망을 듣는다.

cf. 아버지의 청함.

- 회당장 야이로의 청함. (막 5:22-23)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청함. (마 17:14-15)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cf. 죽어가는 아들을 보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 골고다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Q. 아버지의 이중인식, 청함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무엇이 잘못인가? 예수는 이렇게 직면하신다.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는 지금 아들을 살리려고 오는 아버지를 향해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망하고 있다. 책망의 내용은 그 아버지에게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표적’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저급한 믿음에 대해서다. 여기서 나오는 믿음은 그런 것이 없을 때 확실히 믿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 아버지의 믿음에는 아들의 치유를 바라면서도 동시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정리]

나의 표현에는 이중적인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이게 아버지의 행동은 굉장히 훌륭해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 차이를 지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계와 과정 그리고 확인]

(요 4:47, 49)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를 책망하신다. ‘표적과 기사를 쫓는 사람들로, 그것이 없다면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습은 예수와 복음을 아는 것보다 자신의 급한 바램, 욕구에 더 집착하는 모습이다.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Q. 우리의 모습에도 ‘표적과 기사’를 보려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럼, 죽음을 말하는 신하와 달리 예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죽는다고 말하는 신하에게 예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신다.

cf.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확인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그런데 지금까지 표적과 기사를 원했던 신하는 조금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간다’ 예수께서는 가지 않으시고 말씀만 하신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 죽음을 말하던 신하의 귀에 살아 있다고 말하는 예수의 말씀은 어떻게 들렸을까? 그 말씀이 어떻게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바로 믿는다. 그리고 바로 움직인다. 신하는 그 말을 믿게 되고 ‘가라’는 명령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며 신뢰를 보인다.

Q. 죽어가는 대상을 예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신다. 예수의 하신 말씀이 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우리가 보기에 죽어가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ex 실제로 어려움이 생기고 우리가 죽는 것처럼 느끼지만 시간이 흘러 오히려 그것이 은혜인 적이 있는가?

※ 신앙의 단계 : 새롭게 하신 말씀을 듣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행동한다.


* 말씀의 확인은 언제 되는가? 예수께서 가라고 하신 그 길을 갈때

(요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 말씀의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부터.. 그러나 확인은 이후에 한다.

(요 4:52-53)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 말씀을 확인한다. 그 시점을 확인하는 이유는 우연인지, 의술인지, 예수님의 능력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 변화와 은혜와 역사의 시기가 우리의 삶이 예수의 말씀으로 인도받을 때이다.

Q.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확인하는가?

- 어제 일곱시 : 유대시간으로 7시는?

-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이 확인은 그에게 흔들리지 않을 믿음의 근거가 된다. ex 그랬다더라가 아닌 분명한 자기 체험이 된다.

-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이 확인과 확신은 모두를 바꾸고 믿게 했다.

-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 본문에서 처음 그를 ‘아버지’로 표현한다. cf 결국 아버지는 말씀과 관련이 있다?


[정리]

믿음의 단계에는 먼저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따르고 후에 확인할 때 자신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가 된다.

오늘 나를 향해 하시는 말씀과 그것을 통해 나의 믿음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꿈이 살아나다. 그리고 여주인이 확인해주다.]

 

(요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런 아들에 대해 예수는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바로 믿고 간다.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의 아버지, 그는 살리려고 먼길을 왔고 예수께 청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그는 믿고 간다.


그 아들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이에 아버지는 바로 출발한다. 그리고 가는 도중 종을 만나서 정말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믿음에는 단계’가 있음을 나누었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따르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


과연 아버지에게 죽어가는 아들은 무엇일까? 꿈, 희망, 미래다.

즉 아버지에게 자신의 꿈이, 미래가, 희망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아버지에게 아들은 죽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미래가 꿈이 죽어가고 있다. 살리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는 그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를 살리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는 안타까움, 불안, 근심, 속상함 등... 여러 감정이 있다. 우리도 죽어가지만 살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꿈이고 미래이며 희망이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고 미래이고 희망에 대해 예수는 무엇이라 말할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느니라"(요4:50)

며칠전 이 말씀이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들렸다. ‘가라. 네 꿈이 살아 있다. 네 비젼이 살아있다. 네 삶이 살아있다. 교회가 가정이 자녀가 내 삶이 살아있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을까?

아버지는 언제 아들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가?


그가 가는 도중 종들을 만난다.

* 종들은 언제 출발하고 왜 주인에게로 갔을까?

→ 아버지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출발한 것처럼, 그 종들도 아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출발했다.

cf. 여기서 종들이 임의로 외출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을 보낸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을 옆에서 간호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주인이며 어머니일 것이고, 그는 남편의 마음을 잘 알기에 빨리 알려주려고 종들을 보냈을 것이다. 분명하게 나아진 것이 확인되었기에 출발시켰을 것이다. 

→ 결국 그들은 주인과 여주인의 마음을 담아 출발한 것이다. 여주인의 역할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는 자이고, 남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자이다.

Q. 우리의 삶에 여주인과 종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우리의 마음을 알고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전해주고자 하는 자.

[정리]

믿음으로 나아갈 때 중간에서 확인하게 하신다.

그 마음을 아는 여주인이 종들을 보냄 같이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있다.

서로에게 그런 역할을 할 종(동역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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