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10. 표적을 구하는 신하의 아들 치유와 믿음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4. 2. 14:17

[아버지의 청함과 이중적인 인식]

 

그 아들이 어떻게 치유되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이 전적으로 치유되기 원할까?


(요 4:46-47)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상황1.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 이곳은 예수께서 첫 표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상황2. 왕의 신하는 아들이 병이 들었고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34km 정도 떨어진 가나까지 온다.

a. ‘병들었더니’ - 그의 아들은 병이 들었다. 문법적으로 미완료시제라고 해서 계속해서 병을 앓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아스데네오’(ἀσθενέ́ω)는 기본적으로 ‘약하다, 힘이 없다’는 의미로 오랜 병으로 심히 연약해져 있었을 것이다. 병명은 무엇인지 모르나 당시의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힘든 상태였음을 짐작케 한다.

b. 당시의 의술로는 어렵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다른 방법을 찾았고 그것은 예수께 부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 거리를 아들의 회복을 위해 간청하기 위해 왔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c. ‘듣고’ - 시간적 의미로 ‘들었을 때에, 들은 후에, 듣고 나서’로 번역되는데 그는 예수께서 매우 특별한 분임을 소문 혹은 직접 목격인지는 몰라도 알고 있었고, 예수께서 가나에 오신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청한 것을 볼 때  갈릴리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d. ‘가서’ - ‘아페르코마이’(ἀπέ́ρχομαι)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떠나갔다 따라갔다’는 의미로 자신의 공무가 있음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급하게 아들을 살리기 위해 왔을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표현이다.

e. ‘청하다’ - ‘에로타오’(ἐρωτά́ω)의 미완료시제로 아버지는 계속 요청하고 있음을 말한다.

-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 아버지가 청한 내용이다.

↔ 여기까지만 볼때는 아버지의 행동과 청함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에 보게될 내용을 볼 때 그가 갖는 아들의 치유에 대한 그의 인식은 겉과 속이 다름을 보게 된다.

↭ 한 사례 속에서 첫째 이유는 아들을 아버지가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아버지의 차단의 가면이다.

셋째 이유는 아버지의 이중메시지다.

⇒ 그럼, 아버지는 정말 아들이 치유받기를 겉으로는 원하면서 속마음은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다. 속마음도 원한다. 하지만 속마음을 상대에게 전함에 있어 그 표현방식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겉표현이 얼마나 다르고 일치하는지 보아야 한다. 언제까지?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줄때까지.. cf.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알리려고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신다.


-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 아버지가 청한 내용이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상황3.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왜냐하면 저가 이제 곧 죽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a. 이는 아들의 상태가 절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b.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시제를 사용함으로 그가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c. ‘죽게’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상태 혹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cf.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고쳐달라고 예수께 청하는 아버지의 인식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cf. 마 8:5-13, 눅 7:1-10의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 이야기와 비슷하다. 이 이야기가 각색되었다는 주장과 신분과 병의 상태가 다른 점을 보아 근거가 없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비슷하기도 하지만 백부장은 칭찬은 들었으나 신하는 책망을 듣는다.

cf. 아버지의 청함.

- 회당장 야이로의 청함. (막 5:22-23)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청함. (마 17:14-15)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cf. 죽어가는 아들을 보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 골고다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Q. 아버지의 이중인식, 청함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무엇이 잘못인가? 예수는 이렇게 직면하신다.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는 지금 아들을 살리려고 오는 아버지를 향해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망하고 있다. 책망의 내용은 그 아버지에게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표적’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저급한 믿음에 대해서다. 여기서 나오는 믿음은 그런 것이 없을 때 확실히 믿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 아버지의 믿음에는 아들의 치유를 바라면서도 동시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정리]

나의 표현에는 이중적인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이게 아버지의 행동은 굉장히 훌륭해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 차이를 지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계와 과정 그리고 확인]

(요 4:47, 49)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를 책망하신다. ‘표적과 기사를 쫓는 사람들로, 그것이 없다면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습은 예수와 복음을 아는 것보다 자신의 급한 바램, 욕구에 더 집착하는 모습이다.

(요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Q. 우리의 모습에도 ‘표적과 기사’를 보려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럼, 죽음을 말하는 신하와 달리 예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죽는다고 말하는 신하에게 예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신다.

cf. (마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확인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그런데 지금까지 표적과 기사를 원했던 신하는 조금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간다’ 예수께서는 가지 않으시고 말씀만 하신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 죽음을 말하던 신하의 귀에 살아 있다고 말하는 예수의 말씀은 어떻게 들렸을까? 그 말씀이 어떻게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바로 믿는다. 그리고 바로 움직인다. 신하는 그 말을 믿게 되고 ‘가라’는 명령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며 신뢰를 보인다.

Q. 죽어가는 대상을 예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신다. 예수의 하신 말씀이 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우리가 보기에 죽어가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ex 실제로 어려움이 생기고 우리가 죽는 것처럼 느끼지만 시간이 흘러 오히려 그것이 은혜인 적이 있는가?

※ 신앙의 단계 : 새롭게 하신 말씀을 듣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행동한다.


* 말씀의 확인은 언제 되는가? 예수께서 가라고 하신 그 길을 갈때

(요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 말씀의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부터.. 그러나 확인은 이후에 한다.

(요 4:52-53)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 말씀을 확인한다. 그 시점을 확인하는 이유는 우연인지, 의술인지, 예수님의 능력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 변화와 은혜와 역사의 시기가 우리의 삶이 예수의 말씀으로 인도받을 때이다.

Q.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확인하는가?

- 어제 일곱시 : 유대시간으로 7시는?

-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이 확인은 그에게 흔들리지 않을 믿음의 근거가 된다. ex 그랬다더라가 아닌 분명한 자기 체험이 된다.

-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이 확인과 확신은 모두를 바꾸고 믿게 했다.

-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 본문에서 처음 그를 ‘아버지’로 표현한다. cf 결국 아버지는 말씀과 관련이 있다?


[정리]

믿음의 단계에는 먼저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따르고 후에 확인할 때 자신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가 된다.

오늘 나를 향해 하시는 말씀과 그것을 통해 나의 믿음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꿈이 살아나다. 그리고 여주인이 확인해주다.]

 

(요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런 아들에 대해 예수는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바로 믿고 간다.

(요 4: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의 아버지, 그는 살리려고 먼길을 왔고 예수께 청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그는 믿고 간다.


그 아들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이에 아버지는 바로 출발한다. 그리고 가는 도중 종을 만나서 정말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믿음에는 단계’가 있음을 나누었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따르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


과연 아버지에게 죽어가는 아들은 무엇일까? 꿈, 희망, 미래다.

즉 아버지에게 자신의 꿈이, 미래가, 희망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아버지에게 아들은 죽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미래가 꿈이 죽어가고 있다. 살리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는 그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를 살리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는 안타까움, 불안, 근심, 속상함 등... 여러 감정이 있다. 우리도 죽어가지만 살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꿈이고 미래이며 희망이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고 미래이고 희망에 대해 예수는 무엇이라 말할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느니라"(요4:50)

며칠전 이 말씀이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들렸다. ‘가라. 네 꿈이 살아 있다. 네 비젼이 살아있다. 네 삶이 살아있다. 교회가 가정이 자녀가 내 삶이 살아있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을까?

아버지는 언제 아들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가?


그가 가는 도중 종들을 만난다.

* 종들은 언제 출발하고 왜 주인에게로 갔을까?

→ 아버지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출발한 것처럼, 그 종들도 아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출발했다.

cf. 여기서 종들이 임의로 외출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을 보낸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을 옆에서 간호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주인이며 어머니일 것이고, 그는 남편의 마음을 잘 알기에 빨리 알려주려고 종들을 보냈을 것이다. 분명하게 나아진 것이 확인되었기에 출발시켰을 것이다. 

→ 결국 그들은 주인과 여주인의 마음을 담아 출발한 것이다. 여주인의 역할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는 자이고, 남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자이다.

Q. 우리의 삶에 여주인과 종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우리의 마음을 알고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전해주고자 하는 자.

[정리]

믿음으로 나아갈 때 중간에서 확인하게 하신다.

그 마음을 아는 여주인이 종들을 보냄 같이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있다.

서로에게 그런 역할을 할 종(동역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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