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03. 누가복음 2장과 그리스도탄생의 찬양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5. 29. 12:28

[그리스도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

눅 2장은 메시야의 탄생배경과 4분류의 찬양이 나온다.

2:1-7 예수의 탄생과 배경

2:8-14 천사의 찬양

2:15-20 목자의 찬양

2:21-35 시므온의 찬양

2:36-38 안나의 찬양

2:39-50 예수의 어린시절과 성전에 오심


오늘 내용?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의지였으며, 이는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내 삶의 자리에 오시는 하나님의 의지이기도 하다.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 그리스도의 탄생예언과 그 예언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준다.

→ 마태복음은 헤롯과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가이사 아구스도와 로마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했다.

→ 누가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초라한 구유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지만 이 탄생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사건임을 서술하고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 그 때에 : 직역 ‘그 날들에’ 이전에 예언되었거나 예정된 날이 ‘성취됨’, 즉 말했던 그 때가 되어 실제로 그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 cf 비슷한 것으로 ‘때가 차매’(갈 4:4)

- 가이사 아구스도 : BC 27-AD 14 까지 로마제국을 다스린 황제.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로 탁월한 통치능력과 행정력을 가진 정치가이고 치정기간동안 로마에 평화와 번영을 지속했다.

- 영을 내려 : 그가 로마의 속국들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위해 세운 정책 중 하나가 인구조사, 실제적으로 지역에 따라 실행된 인구조사는 팔레스틴의 경우 수리아총독이 다스리는 영역 내에서도 시행되었다.

- 천하로 다 호적하라 : 즉 호적령을 황제와 관련시켜 ‘천하에 다 호적하라’고 하고 수리아 호적조서도 황제의 명령에 의해 되어진 것을 나타냄으로 팔레스틴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예수의 탄생이 단지 평범한 일이 아닌 천하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임을 알게 한다.

→ 당시 최고의 권력자도, 이방인일지라도, 말씀의 성취를 위해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 ex 유대인을 돌아가게 하고 성전건축을 도운 바사 왕 고레스, 반대로 예언대로 예루살렘을 파괴한 베벨론 왕 느부갓네살.

⇒ 황제로서 세금의 효율적 수거와 제국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실행한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간섭을 알지 못해도 미가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 누가복음은 황제라는 실제 인물과 호족령을 기록함으로 예수의 탄생이 로마신화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임을 확증하고 있다.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 예수 탄생의 역사적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일반 역사상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말함으로 예수탄생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 구레뇨는 BC12-2에 집정관 내지 총독으로, AD 6-9에 총독으로 임직했고 두 번 호적조사를 했다. 첫째는 예수탄생 전후에, 둘째는 6년경(행5:37)에 했다.

(행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유대인의 반감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 모든 사람이 → 황제의 호족령에 따라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향한다. ⇒ 천하 모든 사람이 다 호적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온 세상이 반응해야 함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고향으로 돌아가매 → 황제의 호족령은 자기 출생지나 고향에서 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가는 것은 각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으로 가는 전통과 관습에 연결된다. 이에 요셉이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은 곧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며 유다지파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메시야 탄생의 장소에 대한 예언의 성취도 된다. ⇒ 이는 표면상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역사와 구원을 주관하고 계획하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다윗의 집 족속 : 단순한 족보의 의미를 넘어 ‘다윗의 집’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 다윗의 집을 견고케 하시고 영원하게 하시며 언약의 자손을 주시겠다(삼하 7:11-16)고 했다.

- 갈릴리 나사렛 동네 : 구약의 역사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변방의 작은 마을이며, 예수께서는 공생애 전 유년기의 대부분을 초라하고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이곳에서 인간적으로 낮고 천한 신분을 생애를 사셨다.

-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 일반적으로 ‘다윗의 성’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다윗이 자란 곳이라 ‘자기 성’이라 불렀을 정도로 애착을 갖는 곳이다.

(삼상 20:6)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 베들레헴은 거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나사렛에서 약 145km이다.

⇒ ‘다윗의 집, 다윗의 동네’는 단순한 족보와 지역의 의미를 넘어 언약적 측면과 메시야의 상징을 강조하며 다윗의 집과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다윗의 언약을 상기하게 한다. 또한 베들레헴은 ‘떡 집’이란 의미와 함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표현한 예수의 표현이 연결된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눅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 당시의 호적이 납세를 위한 조사임으로 여인들도 호적의 대상이긴 했지만 반듯이 본인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요셉과 동행한다. 그 이유는?

1. 정혼은 했으나 아직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임신한 마리아를 나사렛에 남겨둠으로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를 당할 수 있기에

2. 요셉과 마리아는 메시야탄생에 대한 천사의 예고를 이미 들었기에 경건하고 의로운 요셉은 미가5:2의 예언을 알고 있었고 그 예언이 순조롭게 성취되도록 도우려 했을 것이다.

⇒ 요셉과 마리아의 동행은 어떤 이유와 목적이었더라도 하나님의 예언성취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Q. 예언 성취의 의지를 보이시는 하나님은 왜 그들이 있을 여관도 없으며 강보에 싸인 구유에 아기예수를 뉘이게 했을까?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 이는 예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정리]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의지다. 구약의 약속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의 시행이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인 나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의지다.

 

[천사의 탄생소식전달과 찬송]

 

2:1-7 예수의 탄생과 배경

2:8-14 천사의 찬양

2:15-20 목자의 찬양

2:21-35 시므온의 찬양

2:36-38 안나의 찬양

2:39-50 예수의 어린시절과 성전에 오심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 지역은 베들레헴이고 거기의 목자들이 밤을 지내며 양떼를 지키고 있다. 마태복음의 동방박사와 달리 누가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자들의 구주도 되신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심에 전혀 무지했고 민감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Q. 우리는 얼마나 민감한가? 우리도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집중할 뿐인가?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 그런 그들에게 천사가 갑자기 나타났다.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에 갑작스럽게 출현한다.

-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중 하나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 즉 하나님의 영광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두루 비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가 주어질 것을 암시한다.

⇒ 그리스도의 탄생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목자들의 삶에 천사가 나타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춤으로 그들을 찬양하게 한다. Q.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우리의 삶에 어떤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했는가?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무서워하지 말라 → 천사는 자신의 출현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목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한다. 자신의 출현의도는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 목자들과 인류에게 큰 기쁨이 되는 놀라운 복음을 전하러 왔기 때문이다. cf. 우리는 대상(ex자녀)에게 어떤 의도로 다가가며 그들이 느낀 감정과 오해를 어떻게 풀어주는가?

-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천사는 자신의 출현의도를 분명하게 말한다.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을 전하다’는 의미이지만 성경은 특별한 상황에 대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정신적 신체적 고통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사실을 나타낼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cf. 유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가져오다. 복음을 전파하다.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 좋은 소식, 복음, good news → evangelize(복음을 전하다) evangelism(복음주의), The Evangel(복음서)

- 온 백성에게 미칠 → 좋은 소식이 누구에게 가는가? 대상의 범위를 정해준다. ‘백성’(라오스 λαό́ς)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일반민족까지 가리키며,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누가복음은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백성’임을 말하고 있다.

(눅 2:11-12)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 오늘 → 역사적인 특정적인 한 시점의 날을 의미한다. 그가 그리스도다.

- 너희가 가서 .. 아기를 보리니 : ‘휴리스코’(εὐρί́σκω) 찾다, 발견하다. → 천사는 ‘가라’고 적극적인 명령을 하지는 않지만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경험으로 인해 능동적으로 베들레헴으로 향하여 아기 예수를 발견한다.

-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보통아기와 달리 구유에 있다. 목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메시야가 그렇게 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목자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을 것이고 표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 천사가 목자들에게 와서 영광과 은혜를 보여주고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이 보는 것을 표적이 되게 한다.

cf. 이후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에게도 그들의 삶에 와서 준 메시지가 평생을 기다리게 했다.

Q.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발견하게 하고 표적으로 삼게 하는가?

(눅 2:13-14)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 하늘의 군대, 천사들과 같은 표현으로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해 기록한 것임에도 구약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목자들 주위에 내려와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장엄한 광경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지극히 높은 곳 vs 땅, 하나님 vs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영광 vs 평화

cf.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진정한 평화는 하늘의 보좌를 내려놓고 이땅에 오셔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신 성육신을 통해 가능하다.

[정리]

일상 속에 있는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고 그들을 인도한다.

우리의 일상에 오신 성육신은 하늘과 땅, 영광과 평화를 연결한다.

천사는 찬양하고 인도자가 되었다.

 

 

[목자들의 증거와 찬양]


* 천군 천사의 찬양

(눅 2:13-14)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간다.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 천사들은 그 자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 천사는 자신들이 할 일을 하고 자신이 있어야할 곳으로 간다.

2. 목자들은 ‘우리에게 알려준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보러가자’ → 목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보러간다.

↠ 천사는 하늘로, 목자는 베들레헴으로 간다.

→ 천사가 목자에게 알게 한 일과 이루어진 일 - 말뿐이 아니라 ‘사건, 일’을 의미한다.

↠ 히브리인에게 말은 곧 실체를 갖는 일과 마찬가지로 여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실체이다.

Q.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게 되고 무엇을 보러가나?


(눅 2:16-17)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 빨리 가서 : 목자들은 서둘러서 갔다. 왜?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기 위해

-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 아뉴리스코(ἀνευρί́σκω) ‘찾다. 발견하다’ → 반복의 개념이 있는 접두어 ‘아나’(ἀνά)를 합성함으로 반복하여 찾아냈다는 의미다. 즉 아기를 찾으려고 목자들은 노력했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또한 아기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지 못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cf. 천사들은 한번 찾아 못찾으면 포기했을 사람이 아닌 여러번 찾으러 다니는 목자를 불러서 가게 했다.

Q. 우리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찾아 몇 번을 찾아갈까?

- 보고 : 12절에서 천사가 ‘아기를 보리니’라는 예언이 이루진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 : 직역 ‘자신들에게 말하여진 그 말씀’ → 천사라는 말은 원어에 없다. 목자들은 천사에 초점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들은 말, 자기들에게 말하여진 그 말씀’에 초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cf. 목자들은 초점을 잃지 않았다. 신비의 경험이 아닌 말씀이 이루어진 것에 초점을 두었다.

Q. 내 삶에 일어난 일에 무엇을 초점으로 맞출까?

- 전하니 : 목자들은 천사들이  표적으로 가르쳐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12)를 확실히 믿었을 뿐 아니라 그 계시 내용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 대상은 마리아와 요셉뿐 아니라 만난 사람들 모두였다. 그들은 메시아 탄생의 복음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다. 목자들의 능동적이고 주저함이 없는 적극적인 증인의 역할을 보여준다.


* 듣는 사람들과 마리아의 반응

(눅 2:18-19)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 듣는 자가 다 : 목자들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야 탄생 소식을 전했음을 암시한다. 곧 그리스도 탄생을 처음 전해 들었던 목자들은 동시에 첫 번째 복음전파자가 된 것이다.

- 놀랍게 여기되 : 다우마조(θαθμάζω) 이상하게 여기다, 기이하게 여기다 →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초자연적인 사건이 이루어짐에 대해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나타낸다.

- 새기어 : 쉰테레오(συτηρέω) 마음 속에 간직하다.

-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 직역 ‘그녀의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 자신이 직접 들은 수태고지(눅1:27-38)와 목자가 전해준 소식을 실제로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며 이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떤 존재로 성장할 것인지를 계속해서 곰곰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cf. 단순히 복음을 들은 자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진 자의 차이가 크다.

↠ 듣는 자가 다 vs 마리아,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 vs 이 모든 말을, 놀랍게 여기다 vs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다.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목자들은 듣고 본 것이 다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것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미하면서 돌아갔다.』

-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 목자들은 1.들은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았다. 2. 듣고 본 그것을 증거했다. → 전도자의 증거가 완전한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 목자들은 영광과 찬양을 한다.

↠ 목자들은 복음전도자로서 증거와 찬양을 같이 보고 있다.

- 돌아가니라 :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돌아간다.


[정리]

목자들은 들은 것을 보며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 증거와 찬양을 한다.

목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한다.

복음을 들은 자와 말씀이 자신의 삶에 이루어진 것을 마음의 새기는 마리아의 모습은 다르다.


[아기 예수의 할례와 사명자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과 고백]

Q.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나?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아가나? 내 삶이 메시야와 관련있나?


* 아기 예수의 할례

(눅 2: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할례할 팔일이 되매 → 할례는 언약백성으로서 거쳐야 하는 정결의식이다. (레 12:3)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Q.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예수는 할례가 필요할까? 아기 예수는 이 정결의식을 받음으로 죄인과 같이 되기를 거절하지 않으셨고, 자신도 율법 아래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위해 친히 율법 아래에 있으신 것이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갈 4:4-5)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할례는 언약의식이면서 율법이 명령하는 정결례이며, 이름의 의미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이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할례받음으로 자기 백성의 속량을 위한 자발적인 헌신임을 말해준다.


* 마리아의 정결예식

(눅 2: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 산모의 정결예식이다(레 12:1-8를 참조). 당시 산모는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하고, 그 후로는 33일 동안 집안에서 머물러야 한다.

-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초태생인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고, 제물로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cf. 이 시점은 아직 헤롯이 음모를 알기 전으로 이후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 아기 예수의 헌신례

(눅 2: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모세의 율법에 철저히 순종하는 신앙인이다. 첫태생인 아기 예수를 드리려 한다. 주께 드리는 것은 장자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속죄를 위한 값을 치루는 것이다.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 이것은 산모가 지켜야할 정결례식에 드려야할 제물이다. 요셉부부는 가난하기 때문에 일년된 어린양이 아니라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했다.


*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성령의 지시와 인도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시므온은 뒤에서 말하듯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지내온 것같다.

- 의롭고 경건하여 → ‘의롭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의 법을 준수하는’ 정직함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앞에 무죄하거나 흠이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경건하다’는 종교적 의무에 투철하고 헌신된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미로서 신앙적인 태도를 지녔음을 말한다.

-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 시므온의 기다림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하며, 이들에게 메시야의 오심은 백성을 구원하는 위로를 간절히 고대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cf. 안나에게도 의미상 대구적인 표현이 나온다.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성령이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와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거룩한 상태로 그의 삶을 인도하시며 계속 머물러 계신 것을 말한다.

Q. 내 삶에는 무엇이 인도하고 있나?


(눅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Q. 하나님에게 어떤 사명을 받고 싶은가요?

-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 그리스도를 보아야 죽는다. 자신의 죽음의 시점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Q. 과연 시므온은 이것을 언제 받았고 쉽게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을까?


(눅 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 시대적 상황 : 말라기 이후 영적 암흑기를 지내고 있는 그때 시므온과 같은 의인을 세우시고 성령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 있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

→ 개인적 상황 : 성전에 들어가는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개인사정으로 성전에 못올 수 있다. 그런데 아기예수가 성전에 올때 그가 성전에 오도록 인도함을 받았고, 성령의 지시가 온전히 이루어짐을 경험한다.

- 마침 : ‘그리고 때에’ 시므온의 발걸음과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는 부모의 발걸음을 잘 맞추어 극적으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절묘한 인도하심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 부모는 율법의 관례대로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갔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 아기를 안고 : ‘양팔 안으로 그를 받았다’ 그는 예수를 두 팔로 정성껏 안는다.

- 하나님을 찬송하여 :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찬양하고 감격한다.


(눅 2:29-32)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 시므온은 지금까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명으로 살아왔으며 이제 그 사명이 성취되고 끝났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성취는 그에게 참 평안을 얻게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편협한 선민의식과 달리 온 인류에게로 향하고 있음과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찬양한다.


* 부모의 반응

(눅 2: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 여기서는 요셉의 반응을 더 강조하고 있다. 그의 놀랍게 여김은 얼마동안 계속 되었음을 말한다.


* 시므온의 축복

(눅 2:34-35)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 아기를 안고 있던 시므온이 부모를 축복하며 마리아에게는 특별히 축복한다.

-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 그리스도의 오심은 누구에게는 구원에 참여하며 높아지나 어떤 이에게는 심판에 빠지게 한다.

-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예수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워지는 분이다. 이 표적은 반대하여 말하는, 적대적으로 말하는 대상이다. 실제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에 의해서 비방과 적대적인 공생애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을 위한 표적이 되었다.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 이는 마리아의 마음에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배척 수난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영혼을 뒤흔들 듯한 고통으로 가득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 안나의 찬양

(눅 2:36-38)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성전에서 구주탄생의 두 번째 증거자인 안나는, 결혼 이후 과부가 된 후 오랜 시간을 성전에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냈다. 유대사회와 초대교회에서 노인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특히 남편이 죽고 독신으로 살며 하나님께 헌신한 여자는 더욱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육체는 쇠퇴하였겠으나 영적 감수성은 매우 깊고 생명력이 넘쳤을 것이다. 그의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리는 삶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해오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 시므온이 찬양하고 부모에게 축복과 예언을 하던 그때에 안나가 나아온다. 이는 우연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나타낸다.

-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 성전에 항상 있고 영적으로 민감한 안나가 아기 예수를 본 후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주탄생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메시야의 도래를 바라보던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모습이기도 하다.


* 나사렛으로 돌아오다

(눅 2: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 이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크다. 먼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마2:11) 이집트로 이주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이주하며(마 2:13-15), 이주후 헤롯의 유아학살령(마 2:16)과 헤롯의 사망(마2:19)이후 비로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정리]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대로 살아가며 천사가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온 시므온은 그의 사명이 완성됨을 경험한다.

자신의 삶을 드려 성전에서 지낸 안나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아온 삶이다.

이제 마리아는 아들의 삶을 보며 감당해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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