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01. 사가랴 - 세례요한을 준비하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3. 3. 22. 17:47

[부모를 통해 세례요한을 보다]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시간적으로 첫 인물은 누구일까?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배경을 보여준다.


▷ 제사장의 가정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 유대 왕 헤롯 때에 : 그의 통치 기간 중에

cf. 헤롯은 누구인가?

1.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한다.

2.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3.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 함으로써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키고자 노력했다.

4.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배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 예수의 탄생배경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자(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영적 암흑기였던 시대를 마감하고 세례요한을 통해 새로운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 아비야 반열(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반열’은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 사가랴 :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 엘리사벳 :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레 21:14)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cf. ‘엘리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이다.

(출 6:23)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출생이 그런 제사장의 가정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 가정의 일관된 신앙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신분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자세까지도 바른 모습(일관된 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

1. ‘의인’은 법률적으로 ‘옳고 정직한’ 의미를 갖는다.

2. 여기에 ‘하나님 앞에’라는 병행표현을 함으로서 단순한 윤리적 측면을 넘어 종교적인 측면의 인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일 수 없다.(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럼에도 누가기자는 그 가정을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 누가복음은 구약적인 의인관을 통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을 계속 소개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보이는 기준은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하는 것’이다. 규례와 계명은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이 친히 당부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이다.

-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비난이나 책망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종교적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 예비된 비움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1.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 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 그들의 관계는 오랜 세월 하나님 앞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cf. 요셉도 마리아의 잉태를 받아들인다.

2.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그런 가운데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부부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그리고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사라와 한나 등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

 

[성실하고 일관되게 직무를 감당하는 사가랴]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1. 세례 요한의 부모는 훌륭한 제사장의 삶을 고백하는, 다른 이에게도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는 삶이었다.

2.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잉태를 못하고 자식이 없으며 나이가 많다는 것은 다음 이야기가 이와 관련된다는 암시의 복선이다.

3. 만약 끝까지 없었다면, 다음 이야기를 위해 이렇게 무엇인가 있을 것같은 암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잉태와 자녀 그리고 나이가 많은 것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포기의 조건인데,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가를 있게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사가랴는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

(눅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눅 1:8) 『사가랴가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일을 하고 있었다.』

→ 당시 자녀가 없다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비난받을 수 있는, 사가랴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나이가 많다는 것에서 점점 가중되고 포기되는 마음으로 힘들었을 수도 있다.

→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한다. 만약 그가 레위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아론의 자손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장직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 결국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고백하는 마음도,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이 두가지가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한다.

cf.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믿음의 고백 사이에서 무엇이 영향을 주고 있을까? 여전히 일관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가랴의 모습을 보자.


▷ 분향의 직무를 맡게 되는 은혜를 입는다.

(눅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눅 1:9) 『어느 날 제사장의 관례를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 제비를 뽑아 :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뤄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cf. 24반열이 1년에 두차례 성전봉사를 할때, 각 반열에는 1천명정도의 제사장이 있었으며 직무분담은 제비뽑기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순종했다. 특히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은 제사장에게 있어 평생에 한번도 어려운 기회였기에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번에 사가랴가 맡은 것이다.

- 주의 성전에 들어가 : 여기서 ‘성전’은 ‘나오스’(ναό́ς)라고 해서 지성소를 포함한 성소로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으며,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 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 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 된다.


▷ 기도의 시간에 천사를 만나다.

(눅 1:10-11)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0-11)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 많은 사람들의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 때에 주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


▷ 1:11-20은 천사와의 대화


▷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가랴

(눅 1:21-23)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 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 사가랴가 나오지 않음에 ‘긴장과 두려움’으로 백성들이 기다린 이유는 분향의 마지막 순서로서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행하는 아론의 축복선포의식을 해야하는데, 성전에 들어간 사가랴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의 규례집에는 백성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제사장은 기도를 길게 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 그런데 긴장 속에서 맞은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함을 보고 그들은 환상을 보았음을 확신한다.

-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 이는 ‘다 되었다’는 의미로 말하지 못하게 되었어도 직무의 날 동안 완전하고 성실하게 이행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정리]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열심히 자신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상황의 어려움이 주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성전에서 분향하는 영광의 순간도, 천사가 나타나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한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란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감당한다.

 

[사가랴, 일관된 기도에 응답받다]

▷ 사가랴의 일상적인 상황

(눅 1: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 사가랴는 분향하고, 사람들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이다. 사가랴에게는 분향하는 것자체만으로도 감격적인 상황이었다.


▷ 천사가 눈 앞에 나타나다.

(눅 1: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 일상적이고 은혜로운 상황에서 특별한 상황이 되었다. 환상이나 꿈이 아닌 실제로 천사가 나타났고 향단의 우편에 서 있다.

Q. 천사는 왜 우편에 있을까? ‘우편’은 영예로운 자리를 상징한다. 곧 사가랴를 찾아온 천사는 불길한 것이 아닌 기쁨을 전하기 위해 왔음을 암시한다.


▷ 사가랴의 반응은 놀람과 무서움

(눅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 생전에 처음 보게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자 사가랴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는 단순한 놀람과 무서움이 아닌 깊은 감정상의 동요의 모습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사의 출현은 사실상 사가랴를 압도하고 있었다.


▷ 천사를 통한 응답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 사가랴여 : 대상의 이름을 부른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부르는 것은 앞으로 있을 평화의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ex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이름을 불렀다. 아담부터~

2. 무서워하지 말라 :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가랴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하는 것은?

a. 대상이 지금 어떤 모습인줄 알게 해줌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두려움에 집중하여 자신이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대상에게 무서워 하지 말라고 함으로 객관적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대상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알게 해준다.

b. 대상의 상황과 그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I 메시지이다. 즉, 단순한 명령이 아닌 대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반응으로 우리가 배울 점이다. 그러나 ex 우리는 아이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볼때 용납하지 못한다.

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하나님이 주의 깊게 들으셨기 때문에’라는 의미로,

a. 사가랴의 평소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와 b. 그의 기도를 들으셨음으로 그에 대한 응답이기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c. 간구함 : 일반적인 ‘기도하다’(프로슈코마이 προσεύχομαι)가 아닌 ‘데에시스’(δέ́ησις)로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다. 즉, 사가랴의 기도는 단순히 자녀를 달라는 기도가 아닌 암울한 자기 시대의 역사 가운데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특별한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의 천사의 계시가 단순히 아들을 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하는 것이다.

→cf. 사가랴의 바른 기도자세 : 자신의 연약함과 시대의 아픔을 같이 기도하기

4.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그동안 계속된 간구에 대한 첫 응답의 내용이다.

a. ~이라 하라 : 단순한 예견이 아니라 명령의 의미가 있다.

b. 여기서 이름을 정하는 일은 아버지의 권한인데,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 아기를 자기 것으로 택하셨음을 알려준다.

c. 요한은 히브리어로 ‘요하난’(נחוי)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의미. 은혜를 간구한 사가랴의 응답이다.


▷ 요한이 감당할 사역의 내용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 태어날 아이에 대하여 일차적으로는 사가랴가 기뻐하고,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 ‘기뻐하고’(카라, χαρ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기쁨을 표현하는 경우에 누가가 자주 사용하던 단어이다.

- ‘즐거워’(아갈리아시스, ά́γαλλί́ασις) 역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를 경험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에 달한 행복을 나타낸다.

- ‘즐거워하리니’(카레손타이, χαρή́σονται)는 위의 ‘카라’와 동일한 어원.

Q. 왜 사가랴의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민족이 기쁨을 얻게 되는가?

→ 요한은 개인의 아들만으로 얻은 기쁨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써 메시야에게로 인도하는 결과 그들이 얻게될 기쁨, 즉 그가 걸어갈 길이 메시야를 예비하는 종말적 사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요한의 삶의 내용

(눅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 요한은 다른 사람과의 상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한 절대적 평가를 받게 된다. ex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 나실인으로서의 삶(민 6장)을 말한다. 특히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거나 시체만지는 것도 금지되었는데 요한에게 술금지만 나온 것은 제사장의 집안은 독주금지명령(레 10:9)을 특별히 강조한 듯하다.

Q. 나실인으로서 제사장으로서 구별된 삶은 아버지의 삶과 무관할까, 영향을 줄까?

→ 요한이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지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정의 분위기와 아버지의 모델됨은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하나님의 영감, 감동, 능력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생애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이끌림을 받음을 말하며, 그 시작이 ‘모태부터’라고 함으로 계속하여 일생을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알려준다.


▷ 요한의 사명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돌아온다. 이는 14절과 연결된다.

→ 요한의 사역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실제 요한은 일생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백성만을 대상으로 회개와 메시야 도래의 메시지를 전했다.

-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돌이킨다는 의미.

→ 이는 요한의 주요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케 함으로 되돌아옴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말라기 예언의 성취다.

(말 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은 성령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감동으로 엘리야의 감동은 하나님의 감동이다. ‘능력’은 하나님의 감동과 연결되어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에 의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 주 앞에 먼저 와서 : 요한이 있을 자리는 ‘주 앞에’이다.

-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 돌아오는 방향 : 죄인의 삶의 방식으로 불화를 일으키던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의 방식으로 돌이키고, 서로 화해함으로 하나님을 찾게 한다.

-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요한의 임무는 엘리야의 감동으로 메시야를 예비할 수 있도록 백성을 세워 준비케 하는 것이다. 실제 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메시야를 준비케 한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7:19-23)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사가랴의 반응과 의심-연약함

(눅 1: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 일관된 기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사가랴를 많이 당황하게 한다. 이는 인간적 판단을 앞세움으로 응답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cf. (창 18:10-14)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사가랴가 말하지 못하게 됨은 벌인가 은혜인가?

(눅 1:19-20)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의 모습은 다니엘서에서 나온다. 거기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며(단 8:16, 9:22), 다니엘에게 이상을 해석하면서 미래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고(8:17), 다니엘에게 명철과 지혜를 주었다.(9:22) 이를 잘 아는 제사장 사가랴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어 분명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소식은 믿을만함을 알게 한다.

-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 천사의 역할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 ‘좋은 소식’이라고 함으로 메시야와 관련된 이 ‘좋은 소식’을 사가랴는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 사가랴가 말하지 못하게 됨은 예언을 믿지 못함으로 일어난 상황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성취된 예언이 확증될때 다시 말하게 됨으로 사가랴에게는 더욱 확신을 갖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요한의 출생이전까지 비밀로 할 수 있게 한다.


[정리]

사가랴의 기도는 개인을 넘어 민족의 구원을 바라보는 일관된 고백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었다는 것은 그에게 엘리야의 역할을 할 요한이 준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사장으로서 일관된 삶을 살아온 사가랴에게 요한의 삶과 사명에 대한 예언은 새로 주어진 사명이다.

사가랴의 자연스러운 연약함은 말하지 못하게 되지만, 이는 복음과 예언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고 이후 더욱 예언을 확신함으로 요한을 예언대로 키우는 역할을 하게 한다.

 

[사가랴, 임신을 숨기는 이유?]

제사장으로서 일관된 삶을 살아오던 사가랴, 그에게는 자녀가 없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나타났고 자녀가, 요한이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간구함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Q. 왜 천사는 제사장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분향하는 직무를 맡은 날 나타났을까?

1. 사가랴는 반열의 차례에 따라 매년 2번씩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전에 갔었다. 그는 나이가 많았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 그 직무를 감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어느날 제비를 통해 분향직무를 맡는다. 제사장으로서 최고의 영예로운 직무를 맡게 되었다. 

2. 바로 그때 천사가 나타난다. (요즘 한 개그처럼) 분향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천사가 온 것일까, 천사가 오기 위해 분향직무를 맡게 했을까? 우리는 직감적으로 느낀다. 천사와 분향직무는 특별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 우리에게는 언제 이런 영예를 경험할까? 사가랴처럼 무엇이 있어야 한다면? 제사장으로서 일관된 삶, 일관된 직무의 헌신, 그런 중에 무언가 부족하고 결핍된 삶의 상황들(이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 영향받지 않은 오래된 간구(삶에 대한 애도를 지나 승화)..

→ 하나님은 언제 오시나? 사가랴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부족한 삶의 상황과 애도를 지난 승화), 그런 중에 하나님의 의도된 시기와 방법으로..

⇒ 사가랴에게 분향직무와 천사의 방문과 수태고지는 하나님의 최고의 의도된 순간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나의 일관된 삶과 헌신 중에 최고의 순간을 하나님은 준비하신다.


Q. 이런 일생 최고의 순간을 맞은 사가랴는 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다니나? 그러나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게 된다.

cf. 오히려 말하지 못함은 그에게 벌이 아닌 은혜였고 하나님의 보호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태어날 요한과 관련된 메시야의 비밀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의 임신과 사가랴의 행동

(눅 1:24-25) 『[24]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눅 1:24-25) 『[24] 그 뒤에 얼마 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서 살면서 말하기를 [25] 주께서 나를 어여삐 보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나의 치욕을 씻어 주셨다 하였다.』

-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 최고의 영예의 순간 얼마뒤 아내가 임신을 한다. 예언은 어긋남 없이 성취되었다.

-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 임신후 엘리사벳은 다섯달 동안 공공연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 숨어 있다-페리크륍토(περικρύπτω) - ‘~둘레에’(페리, περί) + 숨기다 은폐하다(크륍토, κρύπτω) → 사방으로 은폐하다, 둘레를 감싸 빈틈없이 숨기다.

→ 재귀대명사를 목적어로 미완료과거형이므로, ‘그녀는 그녀 자신을 완전히 감싸 계속 은폐하고 있었다’ 즉 그녀는 가족이외에는 아무 사람도 접촉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Q. 오래 기다린 임신인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었나, 노산이기에 조심하기 위함일까, 사가랴의 일시적 실어증에 대해 사람들의 종교적 비난을 피하기 위함일까?

⇒ 결국 오랫동안 기다린 임신, 축하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알릴 임신을 숨기기로 한 것은 그들의 합일한 선택이었다.

Q. 왜 그들 부부의 선택인가? 엘리사벳은 모든 것을 알고 있나? → 알고 있다. 엘리사벳이 해산을 하고 할례를 주며 이름을 지을 때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게 한다.

(눅 1: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 엘리사벳의 고백, 사가랴의 고백에서는 아브라함이 생각났다면 이 고백에서는 한나가 생각나게 한다. 불임으로 슬프고 원통해하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시고 그 아이가 젖이 뗄때 하나님께 드리며 고백한다.(삼상 1-2장)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 돌아보다(에페이돈, ἐπειδον)는 ‘~위를 보다’는 의미로 ‘관심을 기울이다. 주목하다’의 의미. 즉 주께 관심을 기울이고 주목하신 것이 자신이 살아온 하루하루의 날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 우리는 우리 삶에 부족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하루하루를 주목하고 계심을 엘리사벳은 고백하고 있다.


Q. 다섯달을 숨어 있던 엘리사벳은 언제 멈추나?


(눅 1:26-38)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cf. 1. 요한의 수태고지와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알리는 천사의 표현이 비슷하다.

2. 사가랴가 최고의 영예의 순간이라면, 마리아는 평범한 일상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3. 육개월이 된 엘리사벳의 임신은 마리아에게 확신을 준다.


▷ 마리아의 방문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39-40) 『[39]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서둘러 가서,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엘리사벳,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친다]

오늘 나눌 부분은 그렇게 마리아가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바로 엘리사벳의 집에 왔을 때 엘리사벳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과 삶에 어떤 적용과 은혜를 말하는지 찾아보고자 한다.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천사를 만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급하게 길을 떠나 150km나 떨어진 사가랴의 집으로 갔고 엘리사벳을 문안한다.


▷ 이때 엘리사벳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

(눅 1:41-42)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1-42)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아기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42] 큰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1. 듣는다 - 감각동사로서 엘리사벳의 모든 반응은 들음에서 시작했다.

→ 아코우오(ἀκού́ω, hear) 듣는다 청취하다 들려오다 소문을 내다 보고되다 깨닫다

2. 들음은 뱃속의 무언가를 움직이게 했다. 그것이 아기의 태동으로 묘사된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오는 것을 듣는다. 그러자 태중에 아이가 뛰논다.

→ 마리아의 문안을 듣기전까지 엘리사벳은 조용히 숨어지냈다.

(눅 1:24)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3. 뱃속부터의 역동은 성령충만으로 나온다. 충만은 채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채워짐을 의미한다.

4. 채워진 성령이 큰소리로 외치게 한다.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불러 : 아나포네오(ἀναφωνέ́ω) = 아나(ἀνά́, 위로 향하여) + 포네오(φωνέω, 부르짖다)

소리 : 크라우게(κραυγη) 단순한 소리가 아닌 외침, 부르짖음

곧 엘리사벳의 ‘큰 소리로 불러’는 사람이 아닌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소리이고, 매우 큰 음량으로 하늘을 향해 메시야를 임신한 마리아를 만난 기쁨과 감격을 표출하고 있다.

⇒ 엘리사벳은 듣고, 역동적 움직임이 있고, 뱃 속부터 채워지고, 그 채워진 것이 하늘을 향한 표출했다.


Q. 다섯달을 숨어 있었던 엘리사벳이 왜 마리아의 방문을 들을 때 바뀔까?

1. 엘리사벳의 표현의 변화는 성격의 변화인가? 그녀는 임신 경험이 없는 초산이면서 동시에 노산이다. 그 사실은 그를 굉장히 기쁘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몸의 변화는 있으나 성격의 변화까지 이어지는 않는다. 5개월을 숨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을 볼때 그것이 오히려 엘리사벳의 자연스러운 성향이었을 것이다.

2. 첫태동이었을까? 아니면 평상시와 다른 태동이었을까? 6개월된 태아가 태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의사출신인 누가는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연결하여 이해되고 묘사하고 있다. 역동적인 태동의 시작이 마리아의 문안을 듣는 순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들었을 때에

3. 역동적인 태동의 시작은 마리아의 방문을 들었을 때부터? 그것은 마리아를 보고 느껴진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느껴졌다는 것. 그래서 엘리사벳은 이어지는 찬가를 부르며 마리아를 맞이한다.

⇒ [누가의 입장]

1. 5개월을 숨어 있을(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던 엘리사벳의 성향으로 볼때, 누가가 이부분을 강조했던 것은 엘리사벳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누가는 단순한 태동이 아닌 역동적인 태동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성령충만과 연결한다.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반응은 그녀도 놀랄 정도로 단순한 태동 그 이상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ex) (마 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3. 역동적 태동과 성령충만은 세례요한의 모습이다. 이는 복중에서 반응하는 메시야를 향한 역동적인 모습이다.

a. 가브리엘의 예언 (눅 1:15-17)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b. 복중에서부터 메시야를 향한 충만함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엘리사벳의 변화는 단순한 태동이 아닌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역동하는 메시아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복중의 태아의 주도적인 반응이다.

cf. 누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엘리사벳의 노래중에 있다.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cf. 5개월간 엘리사벳은 무엇을 했을까? 태교인가? 남편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실제로 자신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임신이 되면서 그녀는 5개월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뱃 속의 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메시야를 기다릴 것을 알고 이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되자 반대로 태아가 역동하기 시작했다. 즉 엘리사벳과 태아는 메시아에 대한 민감함이 발달하고 있었고, 후에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그 민감함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엘리야의 심정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cf. 공통점?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가듯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간다. 엘리사벳이 반응하듯 요한도 동일한 반응을 한다.


▷ 엘리사벳의 노래

(눅 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 여자 중에 →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복된’이란 최상급의 표현. 즉 엘리사벳이 바라본 마리아는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잉태함으로 세상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된 여인으로 느껴졌다.

-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복이 있다 = ευ(좋은) + λόγος(말해진 것), 칭찬하다, 종교적으로 축복하다)


▷ 엘리사벳의 감격과 찬양

(눅 1: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눅 1:43)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 내 주의 어머니

→ 상황 : 누가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들어옴을 듣고 태중에 역동적인 태동을 느낀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아닌 하늘을 향해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당황했을 마리아는 그의 찬양을 듣게 된다.

- 이 어찌 된 일인가 → 그토록 묵상하던 메시아의 어머니가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에 기쁨과 놀라움을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ex) 후에 있을 요한의 감격 (마 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4)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 엘리사벳의 노래에서 보듯,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태중에 아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던 엘리사벳의 반응이 그의 고백에서 나온다.

- 기쁨 : 아갈리아스(ἀγαλλί́αις) 하늘로 솟아오를 정도로 몹시 기뻐하다는 의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 메시야와 관련된 기쁨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ex)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의 임신을 말할 때 즐거워하라 한다. 이는 그의 임신이 메시야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cf.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기쁘게 했을까?

→ 한 여인은 나이들어 임신하고, 한 여인은 결혼전에 임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의 이유는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메시야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은 어떻게 뱃 속부터 메시야를 환영하는가? - 무의식적 반응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1.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직분을 일관되게 감당하면서 메시야에 대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그들의 간구와 메시야의 준비를 함께 연결하여 요한을 주셨다. 그들의 오래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가 된다.

2. 엘리사벳의 깊은 곳에는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있고, 그 갈망과 요한의 태동은 성령충만으로 이어진다.

3.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통찰과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이 같이 표현된다. 그녀가 임신초기의 마리아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6개월간의 묵상의 결과이다. 즉 유경험자의 축복이다. cf. 마리아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나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다.


cf. 이는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된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마리아의 고백은 말씀이 그대로, 전혀 조금도 훼손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하며,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이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고백이다.


cf. 동일한 고백이 누가복음에 있다. 사역 활동중인 예수께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높여 말한다. 그에 대한 예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엘리사벳과 마리아와 연결된다.

(눅 11:27-28)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정리]

엘리사벳은 말씀과 메시야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었다.

그 묵상은 태교로 이어지고,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에 반응하게 한다.

엘리사벳은 뱃 속의 소리에 민감하고 기쁨의 감정으로 표출하며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자신의 경험은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되며 그런 마리아에게 희망이 된다.

⇒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에 대한 고백과 표현을 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은 메시야를 준비한다]


(눅 1:41-45)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럼,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 제사장의 가정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 유대 왕 헤롯 때에?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런 시기이지만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다.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다. 즉 이들은 제사장 가정이다.

⇒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출생의 비밀은 그런 제사장의 가정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 가정의 일관된 신앙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신분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자세까지도 바른 모습(일관된 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 ‘하나님 앞에 의인’의 삶을,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하는’ 삶을 사는 가정이다.

⇒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 예비된 비움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 완벽해 보이는 이 가정에 비움, 즉 채워지길 바라는 것이 있다. 자식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식이 없고 나이도 많다. 점점 가능성이 없다.

Q. 우리 가족은 이런 두가지의 모습이 있을까? 무엇이 완벽하고 무엇이 비워있는가?


▷  그런 상황이지만 사가랴는 여전히 일관되게 직무를 감당한다.

(눅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cf.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믿음의 고백 사이에서 무엇이 영향을 주고 있을까? 그런 속에서 여전히 일관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가랴의 모습을 보자.


▷ 분향의 직무를 맡게 되는 은혜를 입는다. - 이것은 특별한 은혜다.

(눅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사가랴에게, 기도의 시간에 천사가 나타난다.

(눅 1:10-11)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 1:11-20은 천사와의 대화, 이중에 자세히 보고 싶은 것은 13절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하나님이 주의 깊게 들으셨기 때문에’라는 의미,

a. 사가랴는 상황과 고백 사이에 평소에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의미

b. 하나님은 그런 그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것

c. 간구함 : 일반적인 ‘기도하다’(프로슈코마이 προσεύχομαι)가 아닌 ‘데에시스’(δέ́ησις)로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다. 즉, 사가랴의 기도는 단순히 자녀를 달라는 기도가 아닌 암울한 자기 시대의 역사 가운데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특별한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의 천사의 계시가 단순히 아들을 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하는 것이다.

→cf. 사가랴의 바른 기도자세 : 자신의 연약함과 시대의 아픔을 같이 기도하기

Q. 우리는 어떤 간구가 있었고 응답이 있었나? 그동안의 간구와 응답을 잊고 있지 않나?


▷ 이후 사가랴는 요한의 출생까지 말을 못하고 엘리사벳은 5개월간 임신을 들어내지 않는다.

(눅 1:24-25) 『[24]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 엘리사벳의 고백, 돌아보다(에페이돈, ἐπειδον)는 ‘~위를 보다’는 의미로 ‘관심을 기울이다. 주목하다’의 의미. 즉 주께 관심을 기울이고 주목하신 것이 자신이 살아온 하루하루의 날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 우리는 우리 삶에 부족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하루하루를 주목하고 계심을 엘리사벳은 고백하고 있다.


Q. 다섯달을 숨어 있던 엘리사벳은 언제 멈추나? 가브리엘을 통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으로 왔을 때다.

(눅 1:39-40)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천사를 만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급하게 길을 떠나 150km나 떨어진 사가랴의 집으로 갔고 엘리사벳을 문안한다.


▷ 이때 엘리사벳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 4단계

(눅 1:41-42)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1. 듣는다 - 감각동사로서 엘리사벳의 모든 반응은 들음에서 시작했다.

→ 아코우오(ἀκού́ω, hear) 듣는다 청취하다 들려오다 소문을 내다 보고되다 깨닫다

2. 들음은 뱃속의 무언가를 움직이게 했다. 그것이 아기의 태동으로 묘사된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마리아의 문안을 듣기전까지 조용히 숨어지던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오는 것을 듣는다. 그러자 태중에 아이가 뛰논다.

3. 뱃속부터의 역동은 성령충만으로 나온다. 충만은 채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채워짐을 의미한다. cf. 그 뱃 속은 비워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충만하다.

4. 채워진 성령이 큰소리로 외치게 한다.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불러 : 아나포네오(ἀναφωνέ́ω) = 아나(ἀνά́, 위로 향하여) + 포네오(φωνέω, 부르짖다)

소리 : 크라우게(κραυγη) 단순한 소리가 아닌 외침, 부르짖음

곧 엘리사벳의 ‘큰 소리로 불러’는 사람이 아닌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소리이고, 매우 큰 음량으로 하늘을 향해 메시야를 임신한 마리아를 만난 기쁨과 감격을 표출하고 있다.

⇒ 엘리사벳은 듣고, 역동적 움직임이 있고, 뱃 속부터 채워지고, 그 채워진 것이 하늘을 향한 표출했다.

Q.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낄까?      어떤 반응을 하나? 비움 or 충만?

   어디를 향해 어떻게 반응하나? 비움에 대한 or 충만으로 하늘을 향해?

⇒ 엘리사벳의 핵심은 메시야에 대한 듣고 느끼고 충만하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cf. 5개월간 엘리사벳은 무엇을 했을까? 태교인가? 남편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실제로 자신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임신이 되면서 그녀는 5개월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뱃 속의 요한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메시야를 기다릴 것을 알고 이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되자 반대로 태아가 역동하기 시작했다. 즉 엘리사벳과 태아는 메시아에 대한 민감함이 발달하고 있었고, 후에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그 민감함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엘리야의 심정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cf. 공통점?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가듯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간다. 엘리사벳이 반응하듯 요한도 동일한 반응을 한다.


▷ 엘리사벳의 노래

(눅 1:42-45)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 상황 : 누가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먼저는 마리아가 자신의 임신을 말한 것이 아니다. 먼저는 마리아가 들어옴을 듣고 태중에 역동적인 태동을 엘리사벳이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가 아닌 하늘을 향해 고백하고 있다. 그런 중에 당황했을 마리아는 그의 찬양을 듣게 된다.

→ 엘리사벳의 노래에서 보듯,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태중에 아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던 엘리사벳의 반응이 그의 고백에서 나온다.

- 기쁨 : 아갈리아스(ἀγαλλί́αις) 하늘로 솟아오를 정도로 몹시 기뻐하다는 의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 메시야와 관련된 기쁨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cf.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기쁘게 했을까?

→ 한 여인은 나이들어 임신하고, 한 여인은 결혼전에 임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의 이유는 단순한 임신이 아니라 메시야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 엘리사벳은 어떻게 뱃 속부터 메시야를 환영하는가? - 무의식적 반응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1.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직분을 일관되게 감당하면서 메시야에 대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그들의 간구와 메시야의 준비를 함께 연결하여 요한을 주셨다. 그들의 오래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가 된다.

2. 엘리사벳의 깊은 곳에는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있고, 그 갈망과 요한의 태동은 성령충만으로 이어진다.

3.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통찰과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이 같이 표현된다. 그녀가 임신초기의 마리아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6개월간의 묵상의 결과이다. 즉 유경험자의 축복이다. cf. 마리아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나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다.


cf. 이는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된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 마리아의 고백은 말씀이 그대로, 전혀 조금도 훼손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를 말하며, 그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이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고백이다.


[정리]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비움에 대한 간구는 메시야였다. 그 응답으로 요한이다.

엘리사벳은 말씀과 메시야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 묵상은 태교로 이어지고, 마리아가 들어오는 소리에 반응하게 한다.

엘리사벳은 뱃 속의 소리에 민감하고 기쁨의 감정으로 표출하며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자신의 경험은 마리아의 고백과 연결되며 그런 마리아에게 희망이 된다.

⇒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에 대한 고백과 표현을 한다.


 

[세례요한의 출산-부부고백과 이웃의 반응]

(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부부의 고백 ① 엘리사벳이 출산하다.

- 낳으니 : 겐나오(γεννάω) 부모가 되다, 자식을 얻다. → 의미 : 부모가 아이를 출산함으로써 혈연적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고 또한 부모로서의 권리가 생겨난다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cf. 천사의 예언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표현한다.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cf. 엘리사벳의 노산의 기적적인 출산은 뒤에 이어질 마리아의 처녀출산의 기적도 연결된다.


(눅 1: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 하더라.』

-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 : ‘그가 그의 긍휼을 크게 눈에 뜨게 하고 계셨다’는 의미.

→ 대가 끊어질 상황에서, 특히 늙도록 출산하지 못하는 수치적인 상황에서, 엘리사벳의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의 능력과 백성을 향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증거로 표현하고 있다.

▸이웃의 반응①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 엘리사벳의 출산의 소식은 하나님의 긍휼의 기적이라고 서로 말했고 이것을 서로 들었다.

▸이웃의 반응② 함께 즐거워 하더라 → 이웃의 축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cf. 천사의 예언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눅 1: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cf. 할례 : 아기의 출산 후 7일동안 부정하다(레12:2)고 여겨 8일째에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한다. 

▸이웃의 반응③ 할례하러 와서 : 출산을 즐거워 하던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들이 요한의 할례식에 참석하러 왔다.

▸이웃의 반응④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에게도 같은 이름을 짓는 것은 당시의 사회풍속이다. 즉 그들은 즐겁게 축하면서도 관례적으로 행동한다.


(눅 1: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부부의 고백② 관례적인 이웃의 반응과 달리 엘리사벳은 미리 준비된 이름을 말한다.

→ 이웃과는 달리 당시의 시대적 풍속과는 거리가 있는 엘리사벳의 모습이다. 이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들의 일관된 모습은 전통과 신앙을 유지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관례와 무관한 이름을 짓는 것은 특별한 고백이다.

cf. 하나님도 그러한 풍속을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천사를 통해 이름을 주고 부부는 그 이름을 선택한다. 부부는 신앙의 관례 속에서 하나님을 인도를 선택 고백하고 있다.

→ 부인의 역할 : 남편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다. 요한을 말한다는 것은 그것에 동의하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 이웃도 하나님의 긍휼을 들었고 함께 즐거워 했고 관례적인 이름을 말한다.)

⇒ 부부는 그 가정과 자녀에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함께 고백하고 있다.


(눅 1: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이웃의 반응⑤ 이름한 이가 없다 →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그녀의 말에 반대하고 있다. 이는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전혀 없다’는 강한 부정이다. 결국 답답한 친척들은 아이의 이름에 관하여 최종적인 권한을 가진 아비 사가랴에게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Q. 하나님은 왜 집안에 요한이란 이름이 없음에도, 그들의 관례를 아심에도 요한이란 이름을 주셨을까? 요한의 의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 하나님의 일관된 핵심은 그들을 은혜입게 한다. 요한의 임신예언과 과정, 긍휼로 받아드려지는 출산과 이후의 요한의 삶은 메시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관되게 역사하고 있다.


(눅 1: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이웃의 반응⑥ 물으니 : 친척들은 어떤 몸짓을 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래서 전통을 잘 아는 사가랴에 물어 전통적인 이름을 지으려 한다, 


(눅 1: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부부의 고백③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 사가랴는 서판을 달라 하고 그 이 이름을 요한이라 한다. 사가랴 역시 엘리사벳과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 ⇒ 이들의 동일한 고백은 관례를 넘어 그동안 일관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과 그들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합친 고백을 표현하고 있다.

▸이웃의 반응⑦ 다 놀랍게 여기더라 →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경이로움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a.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몸짓만으로 의사소통한 사가랴에게서 동일한 대답을 들은 것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놀랍게 했다. b.또한 엘리사벳의 이야기가 독자적인 이야기가 아닌 부부의 합의된 것임을 알게 된 것도 놀라우며, c.전통적인 삶을 살아온 두부부에게서 그와 다른 모습을 본 것도 그들에게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부부의 고백④ 이에 반해 부부는 의심에서 고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내왔기에 요한이란 이름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눅 1:18,20)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눅 1: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 직역 : 이에 즉시 그의 입과 그의 혀가 열렸다.

▸하나님의 활동-사가랴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쓴 즉시 바로 그 현장에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또한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20)의 약속대로 그날 풀어주셨다.

▸부부의 고백⑤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정확히 기억했다면 그날 자신의 입이 열릴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날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임신과 과정을 보면서 점점 그러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부부의 고백⑥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 a.사가랴는 혀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말을 하게 되자 말과 찬양을 동시에 한다. 즉 실어증에서 풀리자마자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일회적인 찬양이 아니라 계속적인 찬양임을 보여준다. b.10개월간의 기다림과 기대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함에 대한 회개와 약속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됨을 찬양하는 것이다. c. 동시에 민족적으로 기다리던 메시야를 드디어 보게 됨을 바라보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눅 1: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이웃의 반응⑧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 그동안 사가랴가 말하지 못함에 대해 이미 들은 이웃은 그가 출산한 것도 놀라운데 말하게 되고 찬양하는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이 기적의 상황을 보며 그들은 경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웃의 반응⑨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 요한의 출생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소문이 되어 퍼졌다.


(눅 1: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웃의 반응⑩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주었기에 그 놀라움과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었다. 즉 사가랴의 부부가 경험한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사람들에게까지 경험되게 되었다.

▸이웃의 반응⑪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 감탄사적인 의미. 요한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뿐 아니라 강한 설레임과 기대감을 표현한다.

-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정리]

10개월의 임신과정과 출산은 사가랴부부로 하여금 의심에 대한 회개와 약속에 대해 신실하고 일관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이는 그들의 신앙이 일관됨에 대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더욱 신앙적이 되고 그에 대한 찬양으로 고백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웃의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게 일반적이고 관례적이다. 그러나 사가랴부부의 고백과 찬양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한다.



[사가랴의 찬가속에 나오는 고백]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람의 생각이 아닌 성령의 충만으로 감동받은 예언을 한다.

- 예언하여 → 프로페튜오(προφητεύω)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 단순한 앞일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함으로 선지자적 관점에서 찬양하고 있으며 이 예언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고 있다.


(눅 1:68-79)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 원문구조분석

68 A 하나님의 돌아보심

69   B 구원의 뿔을 일으키심

70     C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심

71       D 원수로부터 구원하심

72,73    M 언약을 기억하심

74,75       D'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

76     C'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음

77   B' 구원을 알게 함

78,79 A' 평강의 길로 인도하심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 사가랴는 자신이 바라보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는 그의 삶을 통해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시고 속량하시기에 찬양받을 만한 분이심을 말한다.

a. 돌아보사(에피스켑토마이 ἐπισκέ́πτομαι) 도움을 주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다’ → 그의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백성을 보살피는 분으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요한의 탄생은 역시 자기 백성을 돌보시려고 오셨을 찬양하는 것이다.

b. 속량하다(뤼트로오 λυτρόω) 구속 해방 자유 → 장자의 속전, 노예상태의 해방 등 누군가가 한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 사가랴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구원의 은혜를 미리 내다보고 전심으로 찬양하고 있다.

Q.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바라보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찬양하고 고백하는가?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구원의 뿔 → ‘힘 능력’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런 힘과 능력을 지닌 구세주를 상징한다.

-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혈연적 관계로서 ‘가문’을 말하며,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나와 그들을 억압과 압제에서 구원할 것을 믿고 있었다.

↠ 사가랴는 이스라엘백성이 그토록 기다리는 구약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말하는 메시야가 바로 구약에서 이미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임을 고백하고 있다.

Q.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메시야로 이어지는 사가랴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어떻게 확장되는지 보게 하는가?


(눅 1: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메시야의 사역은 구약시대부터 계속적으로 예언되어 왔으며 이제야 비로소 성취된다고 고백한다.

- 선지자(프로페테스 προφητης) ‘앞에서 미리 말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메시야의 출현과 구원사역을 예언했다.

-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와 같이, ~대로’로 선지사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똑같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 사가랴에게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며, 그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음을 찬양한다.

Q. 말씀의 신실함을 고백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현실과 말씀이 분리된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는가?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cf. = (시 106:10)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 원수, 미워하는 모든 자? 1. 지배국으로 유대인을 압제하고 속박하는 로마제국이나 그러한 세력들, 2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섭리에 방해가 되는 사단과 그의 세력

↠ 사가랴는 하나님의 장대한 구속역사 속에서 메시야를 노래하고 있음으로 이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훼방하는 자들임을 고백한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이 이러한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야를 찬양하고 있다.

Q. 장대한 구속역사 속에서 메시야를 찬양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근시안적인 우리의 조급함을 보이는 우리의 고백을 보게 하는가?


(눅 1:72-73)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 ‘긍휼을 베푸시며, 긍휼을 행하시며’로서 이는 정적인 긍휼이 아닌 역동적이고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 사가랴는 조상과 모든 백성들을 향해 직접적이고 역동적으로 베풀어지는 긍휼임을 찬양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수많은 실패와 죄악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으로 구현된다. cf. 이러한 적극적인 하나님의 긍휼행하기는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어 택한 백성들을 위해 대신 죽게 하셨다.

-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Q. 사가랴는 왜 하나님의 언약을 ‘거룩한 언약’이라 했을까?

a. 하나님이 주도하여 맺으셨기 때문에 절대적인 위엄이 있는 언약, 즉 반드시 이루어질 믿을 만한 언약으로 언약의 성취를 강조한다.

b.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여 성결성을 강조한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사역이 담겨져 있다.

-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cf. (창 17:4-9)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원수를 물리치고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맹세하셨다. 이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것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실성이 보장된다.

Q. 거룩하고 성결한 하나님의 약속을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막연함으로 조급한 우리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게 하는가?


(눅 1:74-75)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cf.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a.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는다. → 71절의 약속이, 원수에게서 구원하시는 일이 일어난다.

b. 종신토록 + 주의 앞에서 +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 섬기게 하리라

→ 종신토록 : 우리의 생명이 살아 있는 모든 날들 동안에,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끊임없이 성실하게 계속 되어져야 한다는 것

→ 주의 앞에서 :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듯 만인제사장적인 모습

→ 성결 : 호시오테스(ὁσιό́της) 경건과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즉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항상 그 앞에서 깨끗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의 :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 ‘옳음 정의’ 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

→ 성결과 의 : 두 단어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압축하여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는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오직 메시야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 메시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 두려움 없이 : 부정의 ‘아’(α) + 놀람 두려움(포보스 φόβος) → 두려워하지 않는, 놀라지 않는 → 일차적으로는 원수들로 인한 두려움과 놀람,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놀람 → 하나님은 이 모든 두려움을 없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섬기게 하리라 : 라트류오(λατρεύω)는 종이 주인을 섬길때 철저한 복종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 사가랴는 원수로부터의 구원을 고백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고백한다.

Q. 사가랴는 시간과 마음과 감정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데 우리의 섬김은 너무나 조건부적이지 않을까?


(눅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cf. (눅 1: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 사가랴의 찬가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자신의 아들, 곧 세례 요한의 장래의 사명에 대한 예언을 노래한다. 이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 즉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불려질 것을 예언한다

-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 구체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어떤 길을 준비하는지 말해준다. 요한은 ‘주 앞에 앞서 간다. 그리고 그의 길을 준비한다.’

cf. 천사의 예언과 일치한다.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 사가랴는 구약의 선지자와 자기 아들의 선지자의 삶을 연결하여 함께 고백하고 있다.

Q. 구약의 말씀과 천사의 예언으로 아들에 대한 꿈을 꾸는 사가랴의 모습은 우리가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과 어떻게 다른가?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cf.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죄짓고 죄사함을 받는 대상은 주의 백성이다. 이들이 얻는 죄사함은 포로가 자유의 몸이 되듯 죄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이들을  위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죄의 속박과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 역사 안에서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고백하는 사가랴에게 이것은 다윗의 집을 통해 오는 구원의 그리스도의 길을 알게 할 세례요한이 사명으로 외칠 내용이다.

Q. 구원과 그리스도의 길을 외칠 아들의 사명을 아는 사가랴의 고백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어떤 길을 가고자 원하는지 분명한 차이를 보게 하는가?


(눅 1:78-79)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cf.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 돋는 해 → 단순한 일출이 아니라 메시야를 의미하며 그 메시야가 돋는 해가 세상을 비추듯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을 비추고 있다.

- 비치고 : 에피파이노(ἐπιφαί́νω) = 위에서(에피 ἐπι) + 밝히다 드러내다(파이노 φαίνω) → 메시야의 빛이 위에서 비쳐지고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을 비침으로 긍휼과 생명의 길로 비춘다.

- 임하여(에피스켑토마이 ἐπισκέ́πτομαι) → 68절의 ‘돌아보사’와 같은 단어로 미래형이다.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보심과 하나님의 긍휼의 해가 위에서부터 임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 평강(에이레네 εἰρήνης)는 전쟁이나 투쟁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평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의 의미이다.

cf.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인도하시리로다 : 카튜뒤노(κατεθύνω) = ~ 따라서(카타 κατά) + 곧게 하다 바르게 하다(유뒤노 εὐθύνω) → 똑바로 하다, 곧게 하다, 바로 안내하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 한다는 의미

↠ 사가랴는 돌아보고 속량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메시야의 해의 비침과 평강으로 인도하심으로 연결한다.

Q.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메시야로 확장하는 사가랴의 고백은 우리의 변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있는가?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정리]

사가랴의 찬양은 그의 하나님과 메시야를 향한 고백이고 아들의 사명에 대한 예언이고 기도이다.

그의 고백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비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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