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09. 사람을 회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회복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1. 22. 16:36

 [사마리아 여인의 페르소나]

이 여인의 행동, 반응, 심리 등을 보면서 이 여인이 왜 이런 반응을 하는지 보려고 한다.

1.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보려는 것이다.

2 우리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상대하는 것이 좋을지 보려는 것이다. 

3.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회복은 어디서 올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 배경설명-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

(요 4:5-6)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 ‘πό́λις’를 ‘동네’라고 번역을 했지만 작은 촌락이 아닌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구약에서 야곱의 우물이 있고 요셉에게 준 땅이라고 할 정도의 도시였다.

-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 당시 걸어서 여행하신 예수께서는 팔레스틴의 기후 안에서 쉽게 지치고 많이 피곤하셨을 것이다.

-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 인공적으로 만든 우물 옆에는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1. 텔 발라타(고대 스켐 유적지) 2. 족장 요셉의 무덤 3. 야곱의 우물 성당

-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 정오쯤이다. 요한저자는 공간적 배경과 함께 시간적 배경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왜 시간을 적었을까?

1. 예수께서는 한 낮의 더위를 피해 우물가에 쉬고 계셨다.

2.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을 방문하고 있어 함께 있지 않다.

3.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온 시간을 알 수 있다.

cf. 보통 저녁에 물을 기르는데 이 여인은 왜 이 시간에 물을 길러 왔을까? → 요한저자가 시간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줌으로 이것을 읽는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왜 이시간에 물을 길러올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또한 예수님과의 대화를 우리(독자)로 하여금 더욱 활동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느끼게 한다.


* 예수와 여인이 만나다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 아무도 물을 길러 오지 않을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고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

- 물을 좀 달라 → 물을 길러 온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라는 소제로 이야기를 계속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인의 깊이 감추었던 부분에 접근하신다.

cf.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여성과 공개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cf. 창세기의 야곱과 리브가가 만나는 모습이 연상된다.

(요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예수께서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옆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 그런데 오히려 제자들이 없었기에 그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

cf. 정통유대인이라면 .... ↔ 이 모습은 예수님과 너무나 다르다. 예수께서는 그런 부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고 계셨다.


* 여인의 반응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 어찌하여(πως) → 예수에게 드린 답변의 억양은 어땠을까? 소극적이고 수줍어 하는 모습일까? 혹은 공격적일까? ‘어찌하여’는 놀라움의 표현(감탄사)이다.

-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 당신은 남자이고 나는 여자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인이다.

- 물을 달라 하나이까? → 여인은 ‘물을 달라’하는 대화를 시도하는 예수께 반문한다.

cf.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대해 여인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 여인이 원했던 것은 물을 길러 오지 않는 것이다. cf.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래서 여인은 물을 달라 말을 걸어오는 예수를 거절한다.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관습과 형식의 관계’로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이 원하는 것은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오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물을 길러 온 것이다. 즉 여인은 스스로를 방어와 보호를 하고 싶어한다.

⇒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려 하고 방어적인 마음은 상대를 보았을때 더욱 공격적이게 된다. ‘절대 내게 말을 걸지마라’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만큼 상대에게 자신의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 자신의 속을 감춘 만큼 겉의 페스소나는 두껍게 형성된다. 그리고 그 페르소나에 익숙해진다. 공격적으로 방어하려는 만큼 감추고 싶은 것이 크다. 즉, 그가 자신을 방어하려는 속은 아무에게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이고, 이것이 그녀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행동했던 자신의 상황이다. cf. (요 4:16-18)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즉 여인의 공격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대함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며 그 결과 아무도 자신을 상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 그러나 문제는 자신도 그 문제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상대의 잘못에서 찾는다. 그래서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며 성격장애적인 모습을 보인다.

cf. 성격장애 혹은 인격장애는 보통 인구의 10%정도 크고 작게 앓고 있다. 종류는 10가지가 있다.(DSM-IV) 그중에 예로 ‘회피성 성격장애’는 대인접촉을 불편해하고 수줍어 하고 부정적인 평가에 대한 과도한 불안 등이 생활과 행동 전반에 나타난다. 대인접촉, 즉 사회적 상황을 피한다. 이들은 거절과 배척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은둔적인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남들과 안정된 친분관계를 갖기 열망한다. 그러나 상대로부터 오는 거절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건없이 확고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대인관계만을 갖고자 하는 특징이 있다. 자존감이 낮으며 거절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 때문에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와 은둔적 생활을 하게 된다. 공포성 회피나 사회공포증이 나타날 수 있다.

⇒ 이들은 고칠 수 있을까? 예수 안에서 어떻게 회복할까?

 

[예수님은 어떻게 대화하시나? ]

 

 

대화는?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는 것’


* 대화의 몇가지 요령

1. 대화하는 시간은 15분보다 1시간이 더 좋다.

2. 대화는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 대화는 다른 것(전화, 노크 등)으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4. 진지하고 인간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5. 눈은 대화에서 중요하다.

6. 대화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7. 특히 대화를 통해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면 말을 잘하기 보다는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 대화를 막는 것은?

1. 상대가 말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와 연결하게 되는 경우이다.

2. 상대를 일정한 틀에 맞추려는 것이다.

3. ‘서두르는 것’이다.


* ~다움

1. 특별한 책임감이 있다.

2. 특별한 권한이 있다.

3. 특별한 자신감이 있다.


[물을 달라는 예수께서 주시려는 것은?]

 

 

목적 → 결국 나와 예수는 무엇을 주고 받을까? 예수는 내게서 무엇을 보고 주시려 하며, 나는 예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며 무엇을 요구하는가?

* 우물가로 오고 있는 여인을 보며 예수께서는 무엇을 보실까?

* 그런 여인의 모습과 느낌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시고 무엇을 말하나?

* 예수께서는 그런 그녀에게 대화를 건다. ‘물을 달라’한다.

* 예수의 상황은 어떤까? 목마르고 배고프다. 즉 예수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 물이 필요해 물을 길러 오는 여인 vs 목말라 물이 필요한 예수..

cf.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나? 나는 무엇을 채우려 하나? 우리가 있는 곳에서의 우리의 생각은 어떤가?

* 중요한 것은 무엇을 채우려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른다면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정리 1] 예수께서는 여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셨고 물이 필요하여 길러 오는 것을 보았다.

[정리 2] 그다음 예수는 여인이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끼는 그것을 채우기도 전에 달라고 하신다.


* 여인을 예수께 물을 줄 수 있을까?

⇒ 물이 필요한 여인에게 불안 주눅으로 힘들게 물을 길러 오는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시는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달라 하실까?

→ 내가 원하는 그것 +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 ex 물 + 예수께서 주시려는 것 ⇒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요 4:10-12)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0절,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을 말한다. ‘너는 그에게 구하고 그는 네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한다. 어떤 생수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14절)

→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무지’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린다.

- 생수 :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물’이다. 유대인은 고여 있는 물을 죽은 물이라 생각했고 흐르거나 솟아오르는 물을 ‘생수’라고 했다.

* 여인의 반응-질문과 의문. 11-12절은 어떻게(how)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이 크단 말인가요?

-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여인은 예수께서 하시는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엉뚱한 질문 겸 대답을 한다. 그러므로 여인이 보기에 두레박이 없는 당신이 무슨 물을 주겠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즉 여인이 보기에 예수는 빈손이고 도구가 없기에 무능해 보인다.

cf. 이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예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의 첫 행위는 의문과 질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하실건가요? 어떤 방식으로 하실건가요? 나도 나의 기도를 보아도 그렇다.

-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질문이다. 여인은 예수께서 야곱보다 크지 않다는 전제로 확신하며 질문한다. → 비교급을 사용함으로 예수는 몰라도 야곱은 위대한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확신한다.

⇒ 자신의 굳은 판단과 고정관념은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임의로 판단내린다.여전히 여인은 주관적으로 닫혀있다.

⇒ 그럼에도 이야기는 2단계로 넘어왔다. 순전히 예수에 의해서.. 이야기의 주도는, 심지어 여인을 향한 삶의 주도는 예수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여인은 그것을 모를 뿐.. 우리처럼..

 

[삶의 질을 높이려면?]

 

<요한복음 4:13-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7,9)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12)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내가 보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 4:16-19)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1. 이날은 자신의 신앙과 소신을 위해 죽음으로 최선을 다한 분들의 사형날이고 사형선고일이다.

2. 이들은 천주교인으로 한분은 주교였고, 한분은 세례명이 도마였다.

3. 그런데 발렌타인데이는 일본상술로 덮어지고 우리나라도 굉장한 기념일인양 그 정신은 없어지고 쵸코렛만 난무한다.


(요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1-12)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어느 심리학자 :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내 아버지의 이미지를 넘어설 수 없다’

→ 굉장히 오랜 동안 우리는 이 영향 안에 있다.

→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자신이 겪은 아버지의 경험이 굉장한 상관관계가 있다.

⇒ 내가 보고 느끼는 그려보는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과 다르다.

→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Q. 우리의 기도는 문제를 보며 기도하는가, 예수님을 보며 기도하는가?

(요 4: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 4:17-18)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자세히 보니, 주의 깊게 관찰해서 보니, 새롭게 경험해 보니

 

[여인의 회복을 위한 근원적인 것은?]

(요 4:16-19)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3가지 명령, 가라. 불러라, 데려오라.

→ 부르러 갈 남편, 부를 남편, 데려올 남편이 있다.

cf. 회복의 과정은 행동이다. uncovery → discovery → recovery


-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 부르러갈 남편이, 부를 남편이, 데려올 남편이 없다고 한다.

cf.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첩도 정식아내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내연의 여자는 구별된다. 유대사회에서 이런 경우 부정한 관계가 되고 처벌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결혼을 하여 남편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이 예상된다.

-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네가 이것을 정직하게 말하였다’로 번역.


cf. 이야기는 과정은? “너와 같이 사는 그 사람은 남편이니? → 아니요, 남편이 아니예요 → 네가 바르게 보고 있구나.”


그렇다면, 여인에게 없는 것은? 여인에게 남편은 무엇인가?

1. 여인은 물이 없듯 남편도 없다.

2. 겉으로 들어난 물과 남편의 부재는 삶을 비어있게 한다. 낮에 사람을 피해 물을 길러 가게 한다.


ex) 만약 일반 상담이라면..

⇒ 기독교적 회복은 이렇게 심리분석을 하고 끝내나?


(요 4:19-20)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28-30)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Q. 여인의 진정한 회복은 어디서 오는가?

Q. 그렇다면 우리가 가려서 깊은 것을 못보고 하는 것이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것, 가린 것,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일까?

 

[메시아를 만난 여인의 질문]

 

* 회복으로의 반전

(요 4:19-20)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그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지자’로..

Q.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여인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까? 자신에게 관심있던 것을 묻는다.

→ 질문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동안 궁금했던, 해결하고 싶었던, 그러나 다른 것으로 인해 억제되고 있었던 그것을, 물어볼 대상을 발견하자 겉으로 드러낸다.

Q. 우리는 질문할 대상을 찾았는가? 그 대상에게 어떤 질문을 하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속마음은 무엇인가?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여인의 어법에는 비교가 있다.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 이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cf.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당신은 유대인남자, 나는 사마리아 여자

Q. 여인은 왜 예배에 관심을 표현하는가?


cf. 요한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놓았을까? 전체적인 맥락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그의 표적은 이제 영생과 예배로 연결되고 넘어가고 있다.

①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말씀이셨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② 안드레,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③ 나다나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④ 가나안혼인잔치, 물떠온 하인만 표적을 알고, 제자들이 믿다. (요 2:9,11)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첫표적 : 물→포도주로

⑤ 세상사람들의 반응과 관심, 표적을 보고 믿다. (요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모두 아신다. (요 2:24-25)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⑥ 니고데모, 표적에 관심을 표현하고 예수의 표적에 대해 단정한다.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표적은 이 세대의 관심이고 기준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책망을 듣는다. (요 3: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 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사랑하고 영생을 주려는 것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⑦ 그러나 세례요한은 안다. 그는 예수는 흥해야 한다고 한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이런 요한복음의 흐름에서 요한저자는 사마리아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배에 대해 묻는다. 요한의 질문은 당시 기독공동체의 관심과 질문이면서, 지금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대상을 만나자 여인은 예배에 관심을 표현한다. 이것은 그의 관심이 예배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질문한다. 없음에 민감했던 여인이 다른 질문을 한다.

→ 표현은 비교하면서 다소 부정적이지만(걱정, 우리가 틀린다면..) 관심의 내용은 분명하다.

cf.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스룹바벨 성전 건축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일이었다.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참여를 요청한 사마리아인의 요구가 거절됨으로써(스4:1-6, 느4:1-2) 갈등이 시작되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 해결책으로 BC 322년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운다. 이후 약 이백여년간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산 성전이 같이 존속하다가 BC129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Hyrcanus BC 135-105)에 의해 파괴됨으로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축복의 산이 그리심산이라고 믿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그곳을 여전히 기도처소로 사용하였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Q. 여인에게 대상은 무엇인가? 왜 대상을 확인하자 부정적인 반응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환자가 의사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따르지 못할 때는 이러한 숨어 있는 강렬한 감정, 특히 분노때문이 아닌지를 일단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는 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숨겨진 분노는 오히려 격한 분노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청년들의 내분에서 용솟음치는 이 격한 분노는, 그들의 과격한 행동이나 심각한 인간적 문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억압되고 은폐된 경우도 많다.

대개 이러한 격한 분노는 두가지 형태로 폭발한다.

첫째, 자제력을 잃고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런 공격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고, 충동적으로 갑자기 폭발할 수도 있고, 때로는 계획된 경로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발생하였건 공격의 목표는 부모, 부모역할을 하는 어른이나, 또 부모상을 가진 사회 구성요소이다.

둘째, 다행히도 젊은이들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잘 다스려서 이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산하는 경우이다. 격한 분노가 이런 식으로 표출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힘이 될 수 있다. 젊은이만 가질 수 있는 깊은 우정, 신의, 자선, 그리고 정의사회를 외치는 데모까지도 포함하며, 인류를 위한 순수한 봉사정신의 바탕을 이루는 강력한 힘이 된다.

이상의 두가지 표현양식은 폭력과 평화라는 아주 상반된 양식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폭력적인 방법과 평화적인 방법은 서로 통합되고 교체된다. - ‘환자와의 대화’ 브라이언 버드


[정리]

여인에게 대상은 분노의 대상에서 평화의 대상으로 통합교체되었다.

새로운 대상으로의 인식은 현실로 인해 억제되었던 것을 꺼내게 해주었다.

새로운 대상은 회복의 질문을 하게 하고 회복으로 전환하게 해주었다.

 

[나를 믿으라]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 성경의 상황과 질문

2. 기록의 상황과 질문

3. 나의 상황과 질문

*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게 묻는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1. 성경의 상황과 질문? 여인은 자신이 그동안 물어보고 싶은 질문, 자신의 상황에서 잊고 있었지만 정말 그 말을 해줄 대상자를 찾으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2. 기록의 상황과 질문? 요한복음은 100년경 쓰여졌다.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요한 공동체는 질문할 것이다.

→ 역으로 이런 상황에 요한기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3. 나의 상황과 질문?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질문하게 된다.


* 여인의 질문에 예수는 답한다.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cf. 객관적 질문에는 객관적 대답이 필요, 역사적 질문은 역사적 근거로 한 대답이 필요, 사실을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대답하면 된다. 예배에 대한 여인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예배에 대해 대답하신다.

1. 이산도 예루살렘 도 아닌 예배할 때가 온다.

2.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3.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4.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 나를 믿으라

→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예배와 예배, 사실과 사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연결고리를 ‘나를 믿으라’고 한다. ‘내 말’이 아닌 ‘나를’이다. 대답이 바른 대답이 되려면 예수를 믿는 믿음 위에 주어져야 한다.

→ 예수께서 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확하게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설사 그분을 선지자로 여긴다면 그 말을 믿게 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이며 또한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 여인의 믿음없음을 책망하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시각,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 예배할 때가 오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단순한 대답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cf.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대해 예수께서는 믿으라 할 것이다.


* 요한복음에 나오는 ‘믿으라’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정리]

성경을 읽는 방법은 내용과 기록상황과 나의 상황에 대해 질문이고 대답이다.

질문과 대답을 연결하는 것은 ‘나를 믿으라’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이다.

내 삶에 대해 예수께서 하실 말씀은?


[사람을 회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회복]  

 

여러분은 언제 이런 경험을 하셨나?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나?


* 여인의 관심-예배할 곳은 어디인가요?

(요 4:19-20)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여인의 관심은 물과 비어있음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핵심관심은?


* 예수의 대답-나를 믿으라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예배에 대한 여인의 궁극적인 질문의 핵심을 ‘나를 믿으라’는 연결고리로 풀어준다.

→ 지난 시간 정리-질문과 대답을 연결하는 것은 ‘나를 믿으라’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이다. 내 삶에 대해 예수께서 하실 말씀은?


* 여인의 고백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가운데에서도 예배할 곳이 어디인지 궁금한 여인은 그 대답을 듣게 된다.

→ 그러나 이것은 그의 삶을 지탱해준 고백이었다. 그 여인이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메시야였다. 예배와 함께 여인의 관심은 메시야로 이어진다. 여인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믿고 있었다. 현실로 잊고 있었던 그의 마음의 그것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사실을 품고 있었다.

→ 여인의 메시야 이미지는?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즉, 알려주시는 분이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라고 말한다.

cf. 모든 사람이 메시야에 대해 관심이 있을까? 전도하면 관심이 없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cf. 영생에 관심있어 질문하러온 부자 청년,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이 많아 예수를 따르라는 말에 슬픈 기색과 근심하며 갔다.

(막 10:21-22)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 분명한 예수의 대답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 ‘내가 ~다’는 ‘에고 에이미’의 표현을 사용하신다. 이 표현은 예수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쓰시는 표현이다. cf. 여인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고 했었다.

Q. 이 대답을 여인이 들었을 때 어땠을까? 오실 메시야에 대해 알고 믿고 있던 여인은 자신이 꼭 듣고 싶었던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제자들이 옴

(요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 무지한 제자들이 본 것은 겉의 모습뿐이다. 서로 상종하면 안되는 유대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같이 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대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상하게 보이는 모습일뿐이다. 제자들은 이것만 보였다.

Q. 우리는 상대의 본질을 보는가? 겉에 포장을 보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볼뿐이다.


* 여인의 반응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1. 물동이를 버려둔다. → 물동이는 그의 삶의 전부였다. 여인은 물을 길러왔고 메시야를 만나 지금까지 중요시 여기고 자신의 비움을 채울 물동이를 버린다. 아피에미(ἀφί́ημι) 버리다, 포기하다, 돌보지 않다.

2. 동네에 들어간다. → 동네를 피해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이 마을로 들어간다. 아페르코마이(ἀπέ́ρχομαι) 가버리다, 떠나가다.

3. 사람들에게 말한다. → 사람을 피해 다녔던 여인이 사람들을 만나 말한다.

→ 메시야를 확인한 여인은 즉시로 행동한다. 지금까지의 자신에 대한 평판에 대해 움츠리고 피하고 말하지 않았던 여인이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있다. 오히려 즉시로 행동하는 이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까지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 : 내가 행했던 모든 일을 내게 말해주는 사람.

→ 모든 것은? 물이 없음, 비어있음, 남편이 없음, 생수가 필요함, 예배와 메시야에 관심이 많음 등..

→ 이것은 여인의 경험, 간증, 초점이다. 그가 만난, 그에게 부각된 메시야의 모습이다.

Q. 우리는 어떤 예수를 만나나? 어떤 메시야의 모습이 기억되나? 이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나?

- ~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람을 피했던 여인이 그 대상을 만나면서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다.


* 동네사람들의 반응

(요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의외의 반응이다. 여인을 피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에게 왔다.


4:31-38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


(요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그 사이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증언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동네사람들은 듣고 믿게 된다.

cf. 전하느라 정신없었을 여인은 이 모습을 후에 생각할 때 얼마나 놀라워할까?


* 이후 동네사람들의 반응

(요 4:40-42)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처음 메시야를 알고 믿게 된 이유는 여인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 자신이 경험한 근거로 신앙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처음부터 믿음을 갖고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증언을 듣고 확인을 하면서 그들도 메시야를 분명하게 만나게 되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정리]

현실에 찌든 삶임에도 여인의 깊은 관심은 예배와 메시야에 있었다.

예수는 그의 깊은 관심을 열어 본인이 확인하도록 도우셨다.

여인의 회복은 메시야를 만났을 때 가능했고 그것을 증언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메시야를 확인하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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