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15.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가 되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6. 25. 13:07

[부르심에 응답하는 세리 레위]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3-14)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 공통내용?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나를 따르라”하니 그가 일어나 따랐다.

▹ 차이점? 이름이 다르고 마지막 내용이 다르다.

→ 이름-마태(마태라 하는 사람이) 마가(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누가(레위라 하는 세리가)

→ 마태(헬라식 이름) 레위(히브리식 이름)

→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그가 예수를 만난 후 받은 이름이다.

cf. 마가는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에는 주로 ‘마태’(막3:18)이라고 불렀다.    


▹ 세관(τελώ́νιον 텔로니온) -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집, 또는 세금을 받는 징수원이 거하는 조그만 사무실이나 징수 창구

▹ 세리에 관하여

- 리비(Livy 59BC-17AC, 로마 역사가) “세리가 있는 곳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돈을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운영과 군사적인 재정을 지원할 강력한 세금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 로마시대의 세리는 입찰을 통해 세금을 거둬드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 그 결과 지방단체의 관리와 로마의원들과 세리간에 공모가 있게 되었다.

- 예수 시대의 아우구스투스황제(27BC-14AD)와 티베리우스황제(14AD-37AD)의 재위기간에는 심각한 불만이 제기되면서 국민개개인의 재산에 근거한 1%세금을 부과하는 개인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1%이상 부과하도록 지방관리는 세리를 활용하게 되었다.

→ 이러한 세리들의 활동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치를 떨게 되었고, 세리는 죄인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었다.


* 유대인으로 당시 세리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

1. 그들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로마의 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半관리적 입장 때문에 세리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져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멸시 받다.

2. 종교적인 배척을 받았다. 이방의 돈을 취급하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갖는 일을 함으로서 유대인의 율법에 명시된 정결규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3. 비록 사람들의 질시는 받았으나 로마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인 직업과 세리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가 있었다.

→ 이런 유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지극히 불경건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cf. 말씀의 특징-말씀에는 레위의 감정과 마음과 생각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결단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만 나온다.


-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마), 또 지나가시다가(막),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눅)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고 계신다.


-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마),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막),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눅)

→ 보시고(θεά́ομαι 데아오마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응시하며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앉아 있은 것을(κά́θημαι 카데마이) 여기서는 현재분사로 계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예수께서 보신 레위의 모습은 어땠을까?

1. 그는 동서로 도로가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였던 가버나움에 설치된 세관에서 일하였고, 도로세 교통세 관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다.

2. 예수께서는 전도하러 다니시던 중 몇 번 그 길을 지나가셨을 것이고 레위를 주의깊게 보시고 계셨다.

cf. 일반적으로 세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직업적으로는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Q. 그럼 그런 감정적인 대우를 받고 있던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세관에 앉아 있으면서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1. 레위는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고 부르신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는 성실함을 보인다. 그 성실함은 세리로서의 부유함을 누렸을 것이다.

2. 그는 세리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세리로 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즐겁지 않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레위를 지켜 보시던 예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다. 예수께서는 레위의 내면과 성실함에서 무엇을 보셨을까? 따를 만한 사람으로 느끼셔서 따르라 했을까?

Q. 우리를 지켜보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마음을 보실까?


- 일어나 따르니라(마 막)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 버리다(καταλεί́πω 카탈레이포) 떠나다 남겨두다 소홀히하다

Q. ‘모든 것을 버리고’?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했을까? 무엇이 그가 메시야를 따르게 했을까?

→ 레위는 예수의 부르심에 자신의 생업과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를 따른다. 자신이 메시야의 제자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하였다. 즉 레위는 겉을 버리고 속(삶의 기준, 메시야)를 선택했다.


Q.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적이 있는가?


* 메시야를 따른 레위의 마음은 어떨까? 즐겁다. 왜?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정리]

세상을 나쁜 이미지와 시선을 살아가야 하는 세리, 그가 메시야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즐거이 따른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버리며 예수를 따르는가?

 

[마태의 기쁨과 초대]

백아절현(伯牙絶絃)


예수님은 어떻게 레위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돌로 치려할 때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요 14:8-11)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기도중에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 하나님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cf. 감정코치

⇒ 예수께서는 자신의 경험, 아버지의 경험을 가지고 대상에게, 죄인에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품어주셨다.


* 이렇게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한 레위가 가장 먼저 한 행위는?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 공통과 차이점

-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마태)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라고 한다.

→ 잔치 : 데코마이(δέ́χομαι 영접하다)에서 나온 말로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배설한 것이다.

-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마) 세리와 죄인들이(막)이라고 하나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눅)이라고 한다.

→ 다른 사람 : 예수 주위에 있던 자들로,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병을 치유받고자 몰려든 사람들이다.

→ 죄인 : 사법적인 범법자가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취급했던 소외되고 경원시되던 세리와 같은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외적 경건을 중요시했던 바리새인은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어울려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cf. 왕실 혼인잔치 비유(마 22:1-10, 눅 4:16-24)

(마 22:8-10)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눅 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눅 14:21-24)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레위, 잔치를 열다.

-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열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보시고 함께 하자고 말씀하신 분이다.

- 많은 세리와 죄인을 위하여 그들도 초대하였다. 세리는 자신의 처지와 같은 입장이다. 마태는 자신과 함께 했던 세리들도 불렀고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도 함께 초대하였다.

cf. 세리의 마음은 누가 잘 알고 위로해줄까? 세리인 레위는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세리들을 불렀고


[정리]

레위가 잔치를 열다.

예수를 위하여-그 예수께서 자신의 마음을 보시고 불러주셨다.

세리도  불렀다. - 세리였던 레아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왔을 동료들도 초대했다.

죄인들은 불렀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이다.

이처럼 레위는 자신의 아픔과 같은 세리들도 초대하고, 다른 사람 아픔의 사람들을 초대함으로 그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바리새인의 분리와 비방]

 

Q. 예수는 우리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실까?

Q.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분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

Q. 우리는 누구를 부르는가? 같은 입장의 사람, 같은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 그들을 부르는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는가?


(마 9:10-13)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새로운 인물 등장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1. 이들은 죄인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않았다.

2. 이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유대인과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본다.

3.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 선생은 또는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Q. 바리새인이 볼 때 왜 세리와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이 죄가 될까? 오히려 그들의 분리적 행동은 성경적인가?

바리새인의 특징은?

1. ‘분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שׁרפ)에서 파생된 단어로 ‘분리주의자’라는 의미.

2. BC 167년 헬레니즘의 유입과 이교주의 준동(蠢動)을 막고 율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작된 종교분파의 하나.

3.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투쟁했던 핫시딤(Hasidim)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4.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평민 계층으로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경건한 무리들이 대부분.

5. 그러나 경건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에게 공감과 존경을 얻어냈지만 ‘비천한 민중’(암 하아레츠)를 경멸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6. 예수 당시에 이르러서는 형식이나 구전, 율법의 문자적인 적용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식적 신앙에 몰두하여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복음 전파 사역을 끈질기게 방해하였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주동집단이 되었다.

7. 신앙적으로는 사두개파와 반대로 영적인 세계, 부활과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고 모세오경을 넘어 구약을 받아들였다.

⇒ 이들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 또는 민족의 반역자라 할 수 있는 세리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예수의 행동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핵심은 분리의식이고 상대는 낮고 자신은 높다는 의식이다.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 특히 누가복음은 ‘비방하여’에서 보듯이 그들의 마음은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상대를 낮추는 비방의 마음이다. 그들은 레위가 베푼 큰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비방하다-공귀조(γογγύ́ζω), 원망하다 수군거리다. → ‘미완료 능동태3인칭 복수형’을 사용해서 계속해서 수군거리거나 노골적으로 불만과 비난을 했다.


비방하는 이유

1.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죄인취급받는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당연히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방함으로 대중의 인기가 잘못되었음을 말하고자 했다.

2.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미움과 반감을 표현한다. 단지 예수 한사람이 아니라 그런 상황과 지지자 모두가 틀렸음을 강조한다.

3. 예수께서 자신들이 아닌 죄인들을 선택함으로 실상은 그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다. 왜? 자신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삶을 사는 사람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

레위의 즐거운 잔치에 바리새인은 왜 초대받지 못했을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Q. 이런 바리새인의 비방을 들은 레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Q. 만약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의 말에 동의했다면, 옳다고 했다면 레위는 어떨까?

⇒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의 반응에 대해 레위가 무엇을 느꼈을까!.


(마 9:12-13)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1-32)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공통점-마가복음의 내용이 모두 들어 있다.

차이점-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마태)과 회개시키러

- ‘건강한 자’는 누구일까?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의 영적 교만의 모습

- ‘병든 사람’은 누구인가? 바리새인이 비방하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사람들, 즉 죄인이다.

⇒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의 실상은?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호세아 6:6의 인용문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긍휼?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   히브리어 ‘라함’과 ‘헤쎄드’

라함 - 슬픔, 애통, 어머니의 자궁

헤쎄드- ‘자비’ 실제적인 행동과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는 포괄적인 말

ex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제사의 본래 의미를 잊었다는 것.

→ 너희는 가서 하신 ...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좀더 배우고 오라는 식으로 랍비의 말투이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의’를 행한다고 믿고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 그럼 죄인은? 유대교와 유대정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세리의 모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의 비방과 예수의 반응을 보고 있는 레위는 어떤 마음이 들까?

이것을 들은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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