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19. 나인성의 과부와 아들의 죽음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11. 19. 12:53

 

(눅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과부의 감정과 탓] 

우리가 오늘 나누려는 말씀은 이 죽음의 모습이 있다. 특히 12절은 구체적으로 상황을 서술한다.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식이 치러지고 무덤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 아들은 왜 죽었을까? 돌연사, 자연사, 자살, 지병. 성경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과부이고 죽은 청년은 독자라고 한다. 그 아들은 과부 어머니의 삶에 굉장히 중요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삶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라도 아들이 죽었다.

자녀를 먼저 보내는 일은 세상에 많다. 성경에도 3종류가 있다. 아들이 죽을뻔 했던 아브라함, 아기가 죽은 다윗, 죽은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요셉의 아빠 야곱..


Q.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과 감정상태는 어떨까? 낙심 좌절 포기.. 멍해진다. 예수께서 ‘울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울고 있는 것같다.

애도의 과정-부분협우수,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Q. 분노의 질문-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면 어떻게 이런 고통을 줄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이 과연 맞을까?

첫째로 하나님은 어디부터 개입하시나?

둘째로,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용서하시는 분이다.

→ 그런데 인간은 왜 하나님에게 탓을 돌리나? 이것이 탓을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보니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나? 아예 처음부터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하시지’라는 생각은 하나님과 무관한 나의 생각임에도 오히려 하나님께 탓과 화를 내는 것이다.

→ 고난을 주고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훈련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역할과 우리의 역할을 구분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지 말라..

 

[과부의 감정과 사별]

 

Q. 과부는 어떤 감정일까? 후회? 후회는 죽는 사람을 두고 꼭 하게 된다. 그때 이랬어야 했는데.. 이렇게 갈 줄 알았다면 ..

→ 여러분은 뭐가 후회가 되던가요?


Q. 또하나의 감정은? 죄책감.

후회 속에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 자신 탓으로 돌린다.

사별을 겪는 사람은 동시에 두가지 상실-죽은자에 대한 상실과 그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상실

자신의 믿음체계를 원할하게 되는지와 비탄을 지체시키는지를 알아야 하며, 공감적인 성직자가 전통 안에서 지속적인 희망의 기회를 갖게 한다.


사별의 과정, 4가지 기본적인 임무의 완성

1.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인 것

2. 비탄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

3. 죽은 자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

4. 감정적으로 죽은 자의 위치를 다시 정리하고 생활을 지속하는 것


Q. 또하나의 감정? 엄마의 착각-엄마는 살리고 싶은데 정작 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에 대해 묵상하라.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것을 느껴라.

→ 우리 자녀들은 살아 있는가?


Q. 소중한 것이 죽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죽었을까?

Q. 또 우리 가족에게 죽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 무엇이 내 삶에, 우리 가족에게 죽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 그리고 그 대상의 죽음으로 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상담자 예수님과 생명의 주님의 모습]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 나인성으로 → 헬몬의 북쪽 기슭의 갈릴리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다.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성문에 도착했을 때 예수께서 보신 것은 장례식 행렬, 죽은 자를 메고 나온다. 성사람들이 많이 함께 하고 있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 ① 과부를 보신다 ② 불쌍히 여기신다. ③ 울지 말라 하신다.

cf. 주께서 → 퀴리오스, 누가복음에서는 처음 나오는 표현. 복음서기자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 불쌍히 여기다.(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고달픈 삶을 살아왔을 한 여인의 마지막 희망까지도 잃었다. 예수께서는 뼈속같이 통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 이것이 상담의 한계, 상담은 죽은 자를 살리지 않는다.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신다. →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는 과정

cf.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신다. → 죽음은 죄의 결과이므로

- 관=들 것 or 뚜껑없는 관

- 내가 네게 → ‘네게’라는 것은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이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죽었던 자 → 이미 죽은자로서 살수 없는 존재이다.

- 어머니에게 주시니 → 어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돌아왔다.


⇒ 예수께는 두가지의 모습이 있다. 상담자 예수와 생명의 주인인 예수의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다. 상담자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상담자로는 할 수 없는 생명의 주님으로 우리에게서 죽은 것을 다시 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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