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복음서 16.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다

성경인물탐구/복음서인물 2014. 8. 20. 17:10

[38년된 고질병]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장소의 이동으로 초점은 예수에게 있다. 그가 무엇을 하시는가 보고 있다.

cf. 유대인의 명절→유대인이면 반드시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절기로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는 예루살렘 반경 22km 이내에 있는 모든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순례하도록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요 5:2-4)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상황과 장소를 설명하고 있다.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고, 거기에는 행각이 다섯 개 있으며, 많은 병자, 맹인, 다리저는 사람들, 혈기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다고 한다.

- 누워 → 이들의 상태는 누워있다. 이들의 목적은 모두 치유받기 위해,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단한가지의 희망이기에 거기에 있다.

-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 미신이나 민간신앙같은데 근동지역에 퍼져 있는 일종의 신앙이다.

-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 그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증 환자들이며, 맨먼저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절박한 바램을 가진 이들이었다.

⇒ 이러한 배경과 그곳 분위기와 신앙에 대해 기록한 것은?


(요 5: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 이야기의 핵심주인공이다. 그는 병에 걸린지 38년이나 되는 환자였고, 그 병으로 거동조차 어려운 중증이었다.

 

 

[38년된 병자의 마음 vs 예수의 마음]

 

명량에서 "만약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수만 있다면 말이다."

"두려움에 맞서는 자, 역사을 바꿀것이다."


1유형 :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틀릴까봐

2유형 : 도와주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까봐

3유형 :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인정받지 못할까봐

4유형 : 지지공감 못 받아서 왕따를 당하고 내 존재를 사람들이 모를까봐

5유형 : 아는것이 없어 무능할까봐

6유형 : 최악의 상황이 닥쳐 안전하지 못할까봐

7유형 : 고통이 많아 행복하지 못할까봐

8유형 : 지배통재당할까봐

9유형 : 갈등이 생겨 관계가 끊어질까봐


(요 5: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 이야기의 핵심주인공이다. 이 한마디가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하게 한다.

Q. 처음에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 왔을까? 바로 고쳐질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시간만 지날 때 그는 어떤 마음은 어떨까? 수십년 걸렸을 시간과 반복된 실패감은 그를 어떻게 했을까? 자신보다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 그럼, 이것으로 끝인가? 다른 방법없이 민간신앙만 믿고 그곳에 있는 그에게, 더 이상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이것으로 끝인가?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있다.


▸ 이때 이야기는 고질병환자에게서 예수에게로 옮겨진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여기서 예수께서는 3가지를 하신다. 보시고 아시고 말하신다.

Q. 그곳에 많은 병자가 있는데 왜 이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게 되었을까? 많은 병자 중에 왜 그만 보시고 치유하셨을까?

- 그 누운 것을 보시고 →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신다.

-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 관찰을 통해 파악하신다. 병이 깊었고 그동안의 치료가 실패했으며 회복의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아셨다. 병자에게 모든 상황은 암담할 뿐이다.

-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그런 그에게 묻는다. ‘네가 ~ 되기를 원하고 있느냐?’며 상황과 달리 그의 마음의 의지에 대해서 묻는다. 즉 상황을 보며 낙심하는지, 아니면 낫기를 바라는 갈망하는지를 물으신다. cf. 38년된 병자가 마음은 원하지만 행동도 정말 갈망할까?

⇒ 예수께서는 그 환자가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더불어 무엇보다 예수를 의지하는 강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즉 그것을 물어보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시선은 베데스다연못에만 있었지만 이순간 자신 앞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Q. 매일 고질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 앞에 예수께서 오시면 무엇을 하실까? 보시고 아시고 물으실 것이다.


그럼, 병자는 반응은? 그런 예수의 의도를 아나?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그의 대답으로 확인된 것? 1. 가끔 물이 움직인다는 것, 2. 이때 매우 치열한 경쟁의 분위기가 벌어지고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 3.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도움이 없다는 것.

→ 병자의 의도는? 자기가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즉, 자기 앞에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 병자의 감정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못고치고 있다고 투사와 탓을 하고 있다. 그 감정으로 실패감으로 있었을 것이다.

cf. 예수는 병자를 아시는데 병자는 예수를 모른다. 이모습은 우리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요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 병자는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예수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를 향해 예수께서는 치유의 말씀을 하신다.

→ 예수의 단계적 세가지 명령

1. 일어나라 - 누워 있던 그를 향해 말한다. ⇔ 그 누운 것을 보시고

2. 들어라 - 그가 지금까지 있었던 자리는 그에게 원하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자리다. ⇔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3. 걸어가라 - 익숙한 자리에서 이동을 말씀하신다. ⇔ 이르시되

→ 예수께서는 그의 표현에 대해 지적하지 않으시고 그의 말대로 도움을 주신다. 아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던 그에게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cf. 예수는 정말 그의 말대로

⇒ 3가지는 모두 원하면서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병자의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다.

cf. 익숙한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이다.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그 일이 일어났다. 계속된 치료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전하게 회복된 것을 보여준다.


[정리]

38년된 병자의 하루하루의 삶은 어땠을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고 싶었던 병자는 도움이 없다고만 투사와 탓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감정과 의지를 묻는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그에게 도움이 되어 주신다.

 

[고침받은 자의 변화 vs 유대인의 고착된 모습]

 

지난주 내용의 3가지

1.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보시고, 아시고, 말씀하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신다.

2.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말씀의 내용이다. 삶 속에서 이런 메시지를 듣고 있나?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실까 아닐까? 분명 이 3단계도 우리에게 하신다. 다만 우리를 향한 이 말씀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는가? 아무리 말해도 내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사실 이런 메시지는 우리도 많이 한다. 자녀들에게..

3. 예수께서는 걸어다니라 했다. ‘돌아다니라’는 뜻이다. 치유되었음을 보이라는 것이다. 걸어다닌 것은 치유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결국 나를 향한 치유의 은혜, 내가 치유된 것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였나?


이제 이 병자는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대요’인가?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 그가 치료를 받은 날,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38년만에 즐겁게 자리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을까?

- 안식일 → 그런데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간다.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cf. 안식일에는 어떤 새롭게 하는 일, 창조의 일을 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에 쉬셨기 때문이다.

(요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유대인들이 → 열심인 유대인들이 병자에게 왔다. cf. 그들은 왜 그 병나은 사람에게 왔을까?

-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그들의 관심은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율법적으로 옳지 않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이야기해준다.

cf. 유대인에게 안식일에는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된 날이다. 그들이 보기에 병 나은 자가 자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렇게 보였거나 의도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병 나은 사람의 행동을 정죄하기 위해 율법을 오용하고 있다.

Q. 유대인들은 병나은 자가 지금까지 아팠고 방금 예수에 의해 치료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안다면 의도적이고, 몰랐다면 단지 율법에 어긋나지 말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요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 병나은 자는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나를 낫게 한 그가’라고 말한다. 안식일문제로 이야기를 하는 줄 알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변화의 근원을 분명히 말한다.

(요 5:12) 『그들이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 유대인의 관심은 안식일 율법을 어기게 한 이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들에게 있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상황을 무시한채 규칙을 어긴 것으로만 국한함으로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요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이때까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모르고 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 이후에 예수께서 그를 다시 만난다. 그의 건강한 삶을 위해 더 이상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 하신다. 즉 38년전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닌 병든 중에도 계속 죄를 범해왔음을 말씀하시면서, 회복된 삶을 계속 살도록 하신다.


(요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요 5:15) 『그 사람은 가서, 자기를 낫게 하여 주신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 이전에 누구였는지 몰랐던 고침 받은 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그분이 예수이심을 말한다.

cf. 고침받은 사람은 왜 유대인들에게 가서 말했을까? 그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님 자신의 회복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일까?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안식일규정을 어긴 것에만 집중하고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 유대인의 반응

- 38년동안 병으로 인해 고생한 병자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들이 중요시 여기는 것만 본다. cf. 우리도 전체적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려는 것만 보는 경향이 없는가?

- 고침받은 자가 자리를 들고 다닌 것을 보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그 원인을 예수에게서 찾고 박해하기 시작한다.


* 고침받은 자의 변화

- 38년동안 자리에 있던 그는 치료를 받은 후 자리를 들고 다닌다. 걸어다니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다. 자신의 변화의 모습을 누리고 있다. cf. 우리는 자신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이고 누리는가? cf. 38년된 병자에게 고침을 받고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회복

예수께서는 그에게 앞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고침 받은 자는 달라진 삶을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회복의 안식일이 아닌 율법의 안식에 갇혀 예수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 고질적으로 병든 자리에서 38년을 지낸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죄와 멀어지고 회복이 되었지만, 스스로 율법적인 유대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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