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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9 성경인물 20. 요셉 - 아버지의 축복과 장례
  2. 2012.10.31 성경인물 20. 요셉 - 요셉 그리고 아버지
  3. 2012.09.26 성경인물 20. 요셉 - 45장의 요셉
  4. 2012.09.05 성경인물 20. 요셉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5. 2012.06.13 성경인물 20. 요셉 - 형제를 만나다. 그것은 준비된 은혜

성경인물 20. 요셉 - 아버지의 축복과 장례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3. 1. 9. 12:15

[야곱의 축복과 요셉의 반응]

 

48장의 줄거리는? (축복의 내용)


▷ 요셉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는 과정(창 48:1-7)

(창 48:1-2) 『[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창 48:3-4)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는 전능한 하나님은 공감하시는 하나님이고 개인에서 세대까지 반복하여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 48:5-6)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양자로 삼는다. 다른 형제와 동등한 자녀의 위치로 삼는다.

cf. 이들은 12지파에서 두지파를 이룬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지파로서 토지소유의 몫을 받지 못한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두배를 주는 장자의 상속이다.


(창 48: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Q. 요셉의 아들을 자신의 두 아들로 삼는 이야기에서 라헬의 장례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야곱의 확인(48:8-11)

(창 48:8-9)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 이들은 누구냐? → 야곱의 첫번째 확인은 물어 확인하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 ‘주신’은 ‘맡기다, 위임하다’의 의미

cf. 요셉은 이집트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고백한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1:51-52)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 야곱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창 48:10-11)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내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 야곱의 두번째 확인은 아버지 이삭과 달리 두 아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는 것이다. 무릎에 올려 놓는다.

cf. 이삭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내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 축복을 하기전 야곱의 벅찬 감정이다.

cf.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라는 요셉(9) vs ‘하나님이 내게 내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라는 야곱(11) → 야곱과 요셉의 고백에는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한다.


▷ 야곱의 축복(48:12-16)

(창 48:12-14) 『[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 요셉은 자기 입장에서 장남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쪽에, 차남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쪽에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놓는다.

cf. 이삭은 자신도 모른채 엇바꾸어 축복했다면 야곱은 이삭과 달리 확인한 후 의도적으로 엇바꾸어 두 아들을 축복한다.


(창 48:15-16)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축복의 내용 - 우리는 자녀에게 어떤 복이 있기를 원하는가?

1.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 직역 ‘ 그들이 스스로 좇았던 그 하나님’ ‘섬기는’의 ‘얄라크()’는 ‘가다 좇다 향하다’의 의미. 조상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따랐음을 말한다.

2.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 조상에 이어 이번에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 하나님은 자신이 풀을 뜯고 방목하듯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의미이다.

3.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 환란은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 악한 상태의 모든 부정적인 상태를 포괄하는 의미로, 야곱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수많은 환란과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사셨다는 고백이다. ‘건지신’은 ‘도로 사다, 속전하다’는 의미로 ‘구원하다’는 의미다.

4. 여호와의 사자께서 → ‘사자’는 ‘보냄을 받은 자, 전달자’의 의미이다. 이는 단순한 전달자를 넘어 얍복강에서 씨름했던, 그만큼 자신의 삶과 생명에 영향을 주는 대상이다.

5.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 복의 주체가 ‘조상이 좇고, 자신을 키우고, 자신을 구원하고, 전달자’인데, 그런 분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6.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 ‘칭하게’는 ‘불러지게, 선언되게’이다. 이들에게 조상의 이름은 단순한 의미를 넘어 그 존재만이 가지는 성격(characte)과 내면의 성향까지도 나타내다. 즉 조상때부터 이어지는 인도와 언약이 그들에게도 이어지며 선언되기를 바란다.

7.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직역 ‘그들은 풍성히 번성하게 하옵소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언약으로 받은 야곱은 그것이 자손에게 이어지길 고백하고 있다.

⇒ 야곱의 축복은 단순히 복을 많이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때부터 이어지고 자신의 삶에서 고백되는 하나님이 자손과도 함께 그대로 고백되기를 축복하고 있다.

Q. 우리는 우리 자손에게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내 삶과 연결된 하나님을 소개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 원하지 않는가?


▷ 요셉의 당황과 부탁(48:17-18)

(창 48:17-18) 『[17]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하여 [18]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 맏아들 므낫세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요셉이다. 개인의 상황과 인도하심으로 인해 아직 야곱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야곱은 조상때부터 이어오는 고백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고백하고 있고, 그래서 엇바꾸어 축복한다. ⇒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삶과 고백에 대해서 방해자가 될 수 있다.


▷ 야곱의 축복(48:19-22)

(창 48:19-20)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 허락하지 아니하며 → 맏아들 므낫세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요셉은 야곱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바르게 고치려 하지만 야곱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다.

-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 실제로 두 지파는 상당한 인구를 갖게 되고 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창 48:21-22)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1.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전까지 그에게 죽음은 외상이지만 지금은 은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야곱은 자신의 죽음과 달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계속 후손들과 함께 하심을 강조한다.


[정리]

이전에 야곱의 죽음은 외상이었지만 임종전의 야곱은 하나님을 충분히 고백하고 있다.

야곱의 축복은 단순한 복이 아닌 조상과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자손들에게 이어지기를 고백하고 있다.

요셉의 경우처럼 자신의 삶에 너무 집중하면 다른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버지의 축복]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한 야곱이 아들들을 부른다.

(창 49:1-2)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 육체적으로 죽음을 앞둔 야곱이 쇠약한 자이나 언약의 계승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직무를 열심히 수행한다.

→ ‘후에 당할 일을’ 이라 한다. 아버지의 축복이 단순한 덕담이 아닌 자녀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보이시는 길이다.

cf. 나는 어떤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주고 있을까?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 너희는 모여 들으라 ...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 너희들은 스스로 모여라(자발적 모임을 강조), 들으라(듣고 깨닫고 준행하라는 명령형)

-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 장래의 일을 누구에게서 들으라 하는가?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이름으로 언약의 계승자다.

cf. 자녀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의 어법은 이룬자의 강조가 아닌 이루지 못한 자로서 대신 이루어주길 바라는 강요의 경우가 있다.


▹축복의 순서 : 르우벤(3-4), 시므온과 레위(5-7), 유다(8-12), 스불론(13), 잇사갈(14-15), 단(16-18), 갓(19), 아셀(20), 납달리(21), 요셉(22-26), 베냐민(27)

→ 특징 : 유다와 요셉이 제일 길다. 두지파는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지파가 된다.


(창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 요셉 : ‘더하다, 첨가하다’의 ‘야샤프’로 ‘그가 더하실 것이다’는 뜻. 이름대로 다산과 풍요를 축복한다.

- 샘 곁의 : 물이 귀한 근동지방에서 ‘샘 곁’에 있다는 것은 큰 가뭄과 같은 재해에서 항상 변함없는 풍요를 누릴 것을 축복하는 것

- 무성한 가지 : 가지는 ‘뻰’이라는 ‘아들, 자손’이고, ‘무성한’은 ‘열매를 맺다, 번성하다’(파라)로서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 번창하는 자손’이란 뜻.

-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 ‘그의 가지가 담 위로 올라갔도다’ 요셉의 후손들의 번성이 다른 지파들에게까지 혜택을 주게 될 것을 예언한다.

-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 요셉후손들의 지속적인 성장의 결과 많은 적대 세력들이 생길 것이며 그들이 괴롭히게 될 것을 예언

-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 ‘굳세며’는 ‘회복하다, 여전하다, 남아있다’의 뜻으로 요셉의 활이 대적을 향하여 거듭 당겨도 약하여지지 않고 ‘여전하다’는 뜻.

-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 ‘힘이 있으니’는 ‘유연하다, 가볍다, 민첩하다’로 요셉의 손과 팔이 적들을 향해 계속 활을 날려도 무뎌지지 않고 여전히 유연하고 민첩하게 화살을 뽑아 활을 걸고 당길 힘, 즉 아무리 강하고 많은 적들이 요셉의 자손들을 대적할지다로 능히 이겨낼 것이다.

-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 최고로 강하고 힘센 하나님의 손(능력)으로부터,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있는 곳으로부터‘이다. → 역사적으로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 중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지파지만 그들이 북이스라엘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겼을 때는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하고 이방의 민족의 포로가 되게 하셨다.(왕하 17:5-18)

-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 야곱의 일생은 많은 대적들 앞에서 위기가 있었다. 자신을 쫓아오는 라반,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나온 형 에서,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으로 가나안 족속의 공격위기 등. 이런 그의 인생에서 체험적으로 경험한 함께 하신 하나님을 도우심으로 요셉의 자손에게 고백하고 있다.

-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 위로 하늘의 복(적절한 시기에 내리는 적절한 양의 비, 일조량과 온도 등 자연의 혜택), 아래로 깊은 샘의 복(물이 부족한 근동지방에서 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생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다산의 복과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는 복, 많은 자손은 노동력과 부와 사회적 권위이다)

-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 의미상 ‘네 아비가 주는 축복’으로 야곱은 어느 아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고 그에게 누구보다 더큰 축복을 주기를 원했다. 곧 야곱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으로 요셉을 축복하고 있다.

-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 ‘영원한 산’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산으로 요셉에게 주는 야곱의 축복의 범위는 오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를 강조한다.

-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 ‘뛰어난 자’은 ‘구별하다, 어떤 일에서 떠나다’로 성별된 자, 구별된 자를 의미하며, ‘나실인’과 같은 듯이다.


[정리] 요셉을 향한 야곱의 축복, 아비로서 자신의 삶을 통해 축복하고 있다.

 

[야곱의 임종과 장례의 의미]

 

* 야곱의 당부

(창 49:29-32)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 야곱의 임종과 약속의 성취

(창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 야곱이 이집트로 오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서 하신 약속의 성취 :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요셉의 손으로 눈을 감기리라. (창 46:1-4)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 야곱이 요셉에게 자신을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도록 맹세케 한다.

(창 47:29-31)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cf. 50장의 이야기는 임종한 그가 어떻게 가나안으로 돌아오는지 과정과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 장례준비

(창 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

-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 귀중한 사람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귀족을 미이라로 만드는 애굽의 풍속 + 야곱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먼 거리까지 운구하는 동안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 40일 : 미이라를 만드는 시간과 정성

  70일 : 바로의 경우(72일)보다 조금 못한 애곡의 기간으로


* 야곱의 유해를 가나안으로 운구하다.

(창 50:4-5)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 야곱의 장사를 위해 가나안행을 바로에게 청하다.

(창 50: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 바로가 허락하다.

(창 50:7-9)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 요셉에 대한 예우에 따라 가나안으로 성대하게 올라가는 장례행렬이다.


* 요셉이 야곱을 막벨라 굴에 장사하다.

(창 50: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 아닷 타작 마당 : ‘가시나무’라는 뜻의 ‘아닷’이란 사람의 타작마당에서 7일 동안 요셉이 애곡하다.

(창 50: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 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 그 모습을 보고 가나안 사람들이 감동한다. ‘애굽사람의 큰 애통’이란 의미로 그곳 이름을 ‘아벨 미스라임’이라 한다.


* 장례의 의미

(창 50:12-14)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말한 것을 그대로 행한다. 처음부터는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요셉에게, 아들들이 아버지의 명을 따라 그대로 행한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들이 장사된 가나안 땅(49:3)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그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을 믿었기에(35:12)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자신을 장사하도록 유언하였다.(49:29) 그리고 그의 아들들 역시 가나안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언약의 땅으로 믿었기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철저하게 순종했다.

※cf. 이것은 이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과 후대에 가나안땅으로 포로귀환하는 이스라엘과 이후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고백이다.


Q.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가야할 곳이 가나안 땅임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의 익숙한 불안]

 

Q.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어떤 반응이야 할까?


* 형제들의 상황해석과 불안

(창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 50:15)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 상황 : 야곱이 130살에 이집트에 와서 147살에 임종하기까지 17년을 고센에서 살았다.

▹ 형제들의 삶 3단계

1.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편애받는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했다.(37장 요셉의 꿈에 반응)1)

2. 요셉을 판뒤 우울에 빠진 아버지와 함께 23년을 지낸다.2) 동생을 판 것을 죽었다고 거짓말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채 불안해 하다 이후 요셉앞에서 서로 탓하기도 한다.

3. 요셉을 만나 즐거워하는 아버지와 함께 이집트에서 17년을 산다. 그들은 악을 선으로 바꿨다는 요셉의 고백과 상관없이 아버지 때문에 요셉이 복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cf. 야곱의 장례이후에 대해서는 표현이 없다. 다만 21절에 위로가 있다.

⇒ 공통점 : 안정감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 한다.


-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Q. 요셉의 형제들은 왜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을까? 그 죽음으로 무엇이 느껴지고 작용되고 해석될까?

1. 상황의 사실 - 단지 아버지의 죽음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해석에 영향을 준다.

2. 상황의 느낌 -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와 죽음 이후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3. 상황의 해석 - 요셉이 자신의 악을 갚을 것같다고 예상한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못하다가 죽은 뒤에는 갚을 것으로 예상한다.

4. 해석의 오류 - 요셉이 어떤 마음인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 형제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힘있는 요셉이 자신의 악을 기억하고 갚을것같다고 불안해 한다.

cf. 아버지의 죽음이 불안을 자극하나, 아니면 불안이 아버지의 죽음이란 상황의 사실을 다르게 해석하게 하나? →

Q. 형제들의 불안은 어디서 나오나? 과거에서 자신들이 해오던 익숙한 해석과 행동이다.

-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형제들의 예상

1. 요셉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 → 처음에 요셉을 미워한 것은 형제들이다.

2. 자신의 악을 갚을 것이다. → 자신들이 행한 악을 기억하고 있다. 죄책감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고 불안으로 이어진다.

⇒ 형제들의 불안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해석하고 예상한다. 곧 요셉을 요셉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모습으로 요셉을 본다.

Q. 요셉이 믿는 것과 형제들이 믿은 것은?

→ 요셉은 악을 선으로 갚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하나님이 있어 요셉은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형제들이 믿은 것은 야곱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었다. 자신을 보호할 방어막이 사라졌다.

⇒ 요셉이 믿은 대상은 영원한 대상이지만 형제들이 불안하여 믿은 대상은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불안한 형제들이 요셉에게 기댄다. → 중독의 모습


▹ 이러한 형제들의 익숙한 해석은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창 50:16-17)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형제들의 인간적 방법 vs 요셉의 건강하고 신앙적인 방법]

(창 50:15-17)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 형제들의 익숙한 불안에 대한 잘못된 해석까지는 그럴 수 있다. 자동적 반응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다시 악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형제들의 건강하지 못한 방법

1. 형제들은 협의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협의한다.

2. 그들의 협의는 자신들이 원하는 ‘용서받기’를 위해 요셉의 약점을 찾는다. 이것은 바르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 계획하는 것이다.

3.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 직접이 아닌 사람을 보내서 말한다. 요셉을 직접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고 부담이다. 그들에게 요셉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4.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 요셉의 약점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언급한다. 심지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당신의 아버지’라 한다.

cf. 그러나 야곱의 모습은 종말에 일치된 건강한 표현을 사용하며 모든 유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으로 볼때 형제들의 이야기가 맞을지 의심된다.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5.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인 자신들의 행동이 ‘악’했으며 그것은 ‘허물과 죄’였음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을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6.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 그러면서 아버지는 너의 아버지이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한다.

7.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 처음의 말은 사람을 보내 전달하였고, 두 번째는 요셉이 울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와서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라고 한다.

⇒ 불안한 사람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관적인 이해와 해석을 하며 일치된 건강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


▷ 요셉의 건강하고 일치된 반응

(창 50:19-21)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1. [17]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 형제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요셉이 운다.

2. 두려워하지 마소서 → 요셉은 그들의 감정의 핵심을 알고 있다. 그들의 불안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용서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임을 안다.

3.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 자신의 일치된 고백.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형제들을 심판할 수 없음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4.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요셉은 형들과 달리 악을 선으로 바꾼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cf. 요셉은 그들이 바란 ‘용서한다’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용서는 인간적 연민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용서는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기에 인간이 대신할 수 없다.

5.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하나님의 목적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짐을 고백한다. cf.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요셉은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자신이 할 일이 그들의 자녀를 키우는 것, 곧 자신이 여기에 있는 목적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이 위로임을 안다.


[정리]

불안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없애려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려는 형제들

그들의 불안을 알고 그들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음을 말하는 요셉


(신 5:1-10) 『[1]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4]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요셉의 죽음과 일관된 고백]

* 요셉이 지내다.

(창 50: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 야곱의 죽음 이후 수십년이 지났으나 그 사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요셉은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이는 형제들의 불안과 달리 자신이 고백을 그대로 지키며 살았음을 보여준다.

cf. (창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업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맡기신 일, 이스라엘을 돌보는 일에도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 그의 생애가 110세이며 줄곧 일관됨을 보여준다.


* 요셉이 양육하다.

(창 50: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 : 요셉에게는 4대에 이르는 자손에게 축복이 계속 됨을 보여준다.

-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 대상 7장에 나오며 처와 첩의 자녀까지도 직접 보살펴 주었음을 보여준다.

cf. (삿 5: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마길에서는 지휘관들이 내려오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므낫세 지파 중에 ‘마길’은 능력있는 부족이 되었다.

-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 직역하면 ‘요셉의 무릎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요셉의 자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Q. 요셉의 양육이 직접적인 양육일까, 요셉의 보호 아래 있었다는 의미일까?


* 요셉이 고백하다.

(창 50: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 나는 죽을 것이나 : 요셉은 자신이 타향에서 죽음을 맞는 상황을 표현한다.

-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 ‘돌본다’는 말은 ‘마음에 두다, 살피다’는 의미로 직역하면 ‘반드시 마음에 두고 살피실 것이다’ 요셉은 일관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한다.

cf. 요셉은 자신의 일관된 고백과 양육이 하나님의 일관된 모습과 신뢰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통해 인도하여 줄 것을 믿고 단호하게 고백한다.

cf. 창세기 기자는 요셉의 고백을 빌어 자신의 민족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살피시고 있고 누군가를 리더로 세워서 인도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역사적 당위성을 갖게 된다. 또한 독자들이 자신의 상황과 함께 요셉의 고백을 볼 때 자연스럽게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된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 하나님의 약속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세 족장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이며 역사 속에서 세워지고 이뤄지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 요셉이 맹세하게 하다.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 하나님이 마음에 두시고 살피신다.

-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 대부분의 삶(17-110세)을 이집트에서 보낸 요셉이지만 뼈라도 약속의 땅에 묻히기 원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믿는 일관된 신앙의 모습이며(히 11:22), 실제로 약 360년후 출애굽할 때 같이 나가며 가나안 땅에 안치된다.(수 24:32)

→ 요셉의 일관된 고백과 행동은 오랜 시간의 그의 삶에서 계속 되었고, 죽음 이후에도 자손들에게 일관된 고백을 보이면서 맹세하게 한다.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출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수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 요셉이 죽다.

(창 50: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정리]

요셉의 고백을 바탕으로 ‘요셉이 ~하다’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창세기기자가 창세기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창세기를 읽는 독자에게 요셉의 고백과 신뢰를 통해 민족적인 하나님의 돌봄과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

성경인물 20. 요셉 - 요셉 그리고 아버지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2. 10. 31. 15:18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다]

 

 

46:1-7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린 야곱은 가족들을 태우고 이집트로 간다.

46:8-27 이집트로 함께 올라온 가족들의 명단이 나온다.

46:28-30 야곱을 만난 요셉

46:31-34 가족에게 바로를 만나게 될 것을 알려주는 요셉


* 야곱이 요셉에게 가다.

(창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 1. 야곱은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낸다. 2. 요셉에게 자신들을 고센으로 인도하도록

cf.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미 계획(있을 곳)을 말했다. (창 45: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 고센 1.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목초지가 풍부한 곳으로 유목민의 생업에 좋은 곳. 2. 국경지대로 후에 출애굽시 편리한 곳. 3. 이집트 본토에서 어느정도 격리되어 종교적 종족적으로 단일성을 유지하는데 수월한 곳.


* 요셉이 야곱에게 가다

(창 46: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 수레를 통해 왕의 특권을 보여줌으로 권위와 위엄을 갖추고,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이방인인 자신의 가족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얻는다.

-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 직역 ‘아버지 야곱을 만나기 위해’

→ 카라(קרא)는 귀한 손님을 맞으러 뛰어나가는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

-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


* 야곱의 기쁨

(창 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 죽음이 주는 슬픔보다 큰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Q. 요셉은 자신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고 있음에도 형들을 만났을 때 아버지를 오라하지 않고 동생을 오라했을까?

1. 과거에서

→ 어릴적 요셉은 아버지와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동생이 미운 형들은 임의대로 악한 행동을 한다. ⇒ 불안 두려움 분노등 다양한 감정

→ 요셉은 어떤 마음일까?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도 그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그 과정을 억울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고백하게 된다. ⇒ 요셉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도 자연스럽게 과정을 본다.

Q. 무엇이 이런 선택을 하게 했을까?

1. 요셉의 고백-요셉은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된 것으로 이해하고 고백하고 있다.

(창 45:5,7)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2. 요셉의 계획-계속되는 흉년과 함께 고센땅에 있도록

(창 45: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 아버지와 좋은 관계였던 요셉은 아버지의 요청을 잘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그는 칭찬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백하고 그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기다리며 고백할 줄 안다.

cf. 성경에서 좋은 부자관계의 예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의 관계이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10: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행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정리]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것은 임의로 행동한 것이다.

요셉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기다린 것은 인도함에 맡긴 것이다.

cf. 우리의 상황도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감정으로 임의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은 있는 그대로 봄으로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고백 안에 준비하는 요셉]

 

46:31-34 예상질문과 대답을 준비한다.

47:1-12 바로를 만나다.


* 요셉의 사전준비

(창 46:31-34) 『[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의 직접화법으로 된 문장이다.

31절 가족을 만나고 왔다고 바로에게 보고 할 것이다.

32절 그들은 목자로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왔다고 말해 둘 것이다.

33절 바로가 형들에게 직업을 질문하면

34절 조상때부터 어릴때부터 목축을 해 왔다고 하라. 그래야 고센에서 살 수 있다.

cf. 당시 이집트는 신분에 따라서 직업이 결정되고 직업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였다.


* 바로에게 보고하다.

(창 47:1-2) 『[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 요셉은 계획대로 바로에게 보고한다.

※ 요셉의 신중한 준비와 일하는 스타일

-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요셉은 바로에게 보고하면서 ‘고센땅에 있다’고 함으로 자연스럽게 바로가 고센땅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요셉은 이집트에서 5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형들중에 5명을 선택하여 바로앞에 세움으로 바로가 은연중에 존중받음을 느끼게 한다.

- 바로에게 보이니-굳이 보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 활용한다. 이는 요셉이 바로에게 가족이 도착한 사실을 보고하면서 함께 바로 앞에 형제를 세운 것은 미리 준비해 놓은 것


* 바로의 예상질문과 형들의 준비된 대답

(창 47:3)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 예상대로 바로의 질문과 형들의 대답이다.

※ 요셉의 예상질문과 준비된 대답-정확한 분석과 예상적중

-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 예상질문인 ‘직업이 무엇이냐’은 직업으로 신분을 결정짓는 애굽의 관습대로 바로가 형제들을 보자마자 직업부터 물을 것을 알고 있었다. 요셉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집트인들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다.

-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 준비된 대답으로 자신들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조상의 직업까지 말함으로 가업임을 알림으로 낯선 이주민에 대한 바로의 경계를 낮춤


(창 47: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 형들은 바로에게 고센땅에서 목축업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 이주 목적 - 가나안 땅의 심한 기근과 목축을 할 곳이 없어서

-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바로의 허락이 필요하다. 나그네로서 낯선 지역에 있는 것은 안전을 보호받지 못한다.

⇒ 바로에게 고센땅이 적당한 곳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하고 예상질문과 준비된 대답으로 바로의 경계를 낮춤으로 고센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을 가능성을 높인다.


* 바로의 허락

(창 47:5-6) 『[5]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 바로는 요셉에게 위임한다. 이는 요셉에 대한 호의와 신임

- 땅의 좋은 곳에 ...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 요셉은 가족을 고센에 있게 하고 이에 대하여 바로의 공식적인 승인으로 확정하게 한다.

cf. (창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 가업을 살려서 왕의 가축도 돌볼 수 있도록 공식적인 직책을 맡게 되어 이집트에서 입지를 확고하게 한다.


* 야곱과 바로와의 대화

(창 47:7-10) 『[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 요셉은 바로 아버지를 바로와 만남을 주선함으로 속도감을 보여준다.


* 결론

(창 47:11-12) 『[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 바로의 명대로인가, 자신의 의도대로인가? 결국 왕의 명령에 의한 것임으로 분명한 효력이 있게 되었다.

⇒ 완전한 소유는 아니지만 그곳에 머물게 됨으로 가뭄을 피해 온 야곱의 가족들이 좋은 땅에서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Q. 이러한 철저하고 신중한 준비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고백에 근거한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 가족을 도우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를 살리는 것


[정리] 요셉의 철저하고 신중한 준비-예상질문과 준비된 대답

       20여년간의 이집트 생활에서 나온 경험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고백


[요셉의 건강한 정책]

 

간디가 말하는 ‘7가지 악덕’ - 철학없는 정치, 도덕없는 경제, 노동없는 부(富), 인격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없는 쾌락, 헌신없는 종교


(창 47:13-14) 『[13]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 기근으로 너무나 힘들어진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 요셉은 정당한 곡식 거래를 통해 근동의 모든 돈을 바로의 창고에 쌓이게 한다. 여기서 요셉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비정직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창 47:15-17) 『[15]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17]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 백성들은 먹을 것을 요청하고 요셉은 가축으로 내게 한다.

→ 너무나 배고프면 가축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이 그 가축을 식량으로 바꾸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는 식량정책을 애굽의 경제를 왕실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와 국가가 가축을 재산으로 관리함으로 가축의 노동력을 보호하려 한다.

→ 만약 이를 방치하여 가축을 먹게 되면 기근후에 농업에 필요한 가축의 노동력을 잃게 된다.


(창 47:18-20) 『[18]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19]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20]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 가축을 드린 백성들은 다시 자신의 몸과 토지를 팔겠다고 한다. 이정도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들의 몸은 지금 살아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으로 식량문제로 인한 극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 요셉의 정책과 결과로 모든 토지는 국유화가 되었다. 이는 국가경제의 기반이 되는 토지가 일부 귀족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구조적으로 개선함으로 후에 토지의 재분배를 통해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려 한다.


(창 47:21-22) 『[21]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 백성들을 이주시킴으로 식량을 구하려는 백성들의 이동거리를 줄이고 낭비를 줄이는 개혁정책의 일환이다.

→ 제사장의 토지를 그대로 두는 것은 기득권을 인정함으로 왕중심의 종교적 정치적 집중을 하게 한다.


(창 47:23-26)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 땅도 가축도 백성도 국가의 것이 되었다. 거래를 통해 이루어졌다.

→ 더 이상 농사지을 수 없는 그들에게 종자를 주고 농사를 짓게 한다.

→ 상납의 의미는 강제가 아닌 단순히 ‘주다’의 의미로 자발적 납세를 권고하고 있으며 정액세가 아닌 1/5이라는 정률세를 내게 함으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는 백성에게 나머지를 갖게 했다.

→ 이집트 사람들은 요셉의 선정(善政)에 대해 감사했으며, 요셉은 자신이 종이었던 경험을 잘 적용하는 정책이었다.

→ 이집트에서 발견한 문서에도 왕과 제사장과 전사(戰士)들만 토지를 소유했다는 기록으로 볼때 요셉의 토지정책은 장기간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정리]

요셉의 토지법개혁과 정책은 왕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었다.

요셉은 그 개혁과 정책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정직하게 사용하였다.

요셉의 종되었던 경험이 백성들에 대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 정책이었다.

(창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정직과 성실로 최선을 다하는 요셉의 모습은 이스라엘에게 모델이 될 것이다.

 

[부자의 고백]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 앞의 47:13-26은 가뭄으로 여전히 힘든 이집트의 상황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것(가축, 토지, 사람 등)을 모두 왕에게 주고 생명을 유지한다.

→ 그런 상황과 달리 이스라엘은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다. 인구가 증가하는 과정과 결과를 병행시켜 역동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히브리어적인 표현이다. 이는 곧 죽을 것같은 상황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보게 한다.


(창 47: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 야곱이 이집트에 거주한지 17년 = 요셉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

cf. 어릴적 요셉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시간도 17년?


(창 47:29-30)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 야곱은 어떤 심정일까? 삶의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다.

-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 예전에는 그럴 수 없었던 요셉을 부르는 심정은 어떨까? 어떤 특별한 이유로 요셉을 부른 것일까?

-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 고대의 약속의 방법, 당대를 넘어 후대에까지 이루어지길 바란다.

-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 야곱에게 아들 요셉은 어떻게 보일까?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하나님의 성품인 인애와 성실함으로 자신을 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야곱에게 요셉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자비롭고 약속을 잘 지키는 성실함을 가지고 있기에 요구한다.

-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 야곱의 부탁이고 요셉을 부른 이유이다. 이집트가 아닌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는 것이다.

→ 씨족의 결합이 개개인의 죽음을 넘어 중요함을 말한다.

⇒ 그러므로 야곱의 부탁은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 아니라 가족적 공동체적 신앙적 고백이다.

cf.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야곱을 보는 요셉의 마음은 어떨까? 역시 아버지의 신앙을 본다.


(창 47: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창 47:31) 『야곱이 다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맹세하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 야곱은 요셉에게 맹세를 요청하고 요셉도 맹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버지의 경배의 모습을 요셉은 보고 있다. 이것은 요셉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고 신앙적인 삶을 선택하는데 구체적인 기억이 될 것이다.


cf. 요셉의 약속 이행

(창 50: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cf. 요셉의 부탁

(창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출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정리]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신앙을 보고, 아들도 아버지에게서 신앙적 고백을 본다.

여전히 언제나 힘들어 죽을 것같은 나 vs 그런 가운데도 여전히 살아 있는 나

그들은 삶을 통해 신앙과 고백의 자리에 왔다.


[요셉에게 보이는 야곱의 하나님은?]


(창 48: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 요셉은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연로하기에 쇠약하고 죽음에 임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 임종의 소식을 들은 요셉은 두 아들과 함께 간다.


(창 48: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 아들이 왔다는 소식에 일어나 앉는 야곱의 모습.

cf. 1절 ‘병들었다’ vs 2절 ‘힘을 내어’ - 육신의 연약한 상황과 마음과 영적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야곱의 의지가 분명하다.


(창 48:3-4)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요셉에게 이르되 : 야곱이 요셉에게 이야기하고 요셉은 듣는다. 단순히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이야기를 요셉이 듣고 있다. → 육신은 약하나 힘을 내어 일어나는 의지를 보이는 야곱이 요셉에게 지난 과거의 삶을 이야기한다.

cf. 죽음에 임박한 야곱이 과연 요셉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야곱에게 있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 지금의 자신을 있게한 사건을 말한다.

Q. 같은 상황도 같은 상대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억한다. 그럼, 야곱은 상황과 하나님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있게한 때는? 루스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때가 야곱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음에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 그럼 그때를 야곱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 야곱의 상황, 야곱이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 직역 ‘그는 스스로를 나타내셨다’

a. 야곱에게 자신을 보이신 하나님은 그가 절대로 부인하지 못하게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그에게 보이셨다.

b. 야곱이 하나님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셨다. 그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야곱은 경험한다.

c. ‘전능하신 하나님’ - 야곱은 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신 하나님이다.

- 내게 이르시되 : 확실히 스스로를 보이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신다.

→ 약속의 내용 :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 이 약속의 특징? 야곱이 원하는 것

Q. 하나님은 왜 야곱이 원하는 그것을 주셨을까?

여기서 엄마에게 느끼는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1.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엄마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몰입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3. 만족과 성취감을 취한 경험을 잃어버린다.

결국 ‘부모는 자녀에게 지시 훈계 지적을 삼가해야 한다.’

* 병리란? 자신에 대하여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른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

* ‘아이가 자라면서 필요한 것?’ 누군가 자기의 세계를 알아주는 것, 몰입을 인정하는 것, 그 마음의 세계에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을 ‘공감’이라 한다.


*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

1. 당시에는? (창 28:16-17)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2. 지금은? 48:3-4을 통해 야곱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아들 요셉에게 말해주고 있다. 힘을 내어 앉아서 말해주고 있다.

3. 요셉은 그 하나님을 듣고 있다. 아버지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에 만난 하나님을 듣고 있다.


cf. 야곱의 약속에 대한 고백과 기억은 조상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1. 루스에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 (창 28:13-15)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 야곱이 회상하면서 고백하는 약속 (창 48: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3. 아브라함이 99세에 새로운 이름과 언약의 표징인 할례에 대해 받으면서 (창 17:6-8)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야곱이 회상하는 약속은 루스땅에서 하나님의 약속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

-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정리]

야곱의 고백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공감의 하나님’이시다.

야곱은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인생의 최고의 순간으로 고백하고 있다.

야곱의 약속에 대한 기억과 고백은 조상과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이 순간 아버지의 모습은 요셉에게 역시 공감의 하나님과 같을 것이다.

 

[아버지의 반복된 삶에서 공감하시는 하나님을 보다]  

1. 공감하시는 하나님은 야곱에게 죽음의 두려움이 반복될때 오셨다.

2. 공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개인적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세대로 이어지는 약속이었다.


(창 48:3-4)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이 고백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대에게 주신 약속이다. 이 약속이 공통되게 나타나는 경우를 보자. 이 상황은 임종 전의 상황이다.


1. 야곱의 처음의 경험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보인다.

(창 28:13-15)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그러나 이 약속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세대를 위한 약속이다. 15절의 개인적인 약속으로 끝나는 이 약속은 그 근거가 13절에서 보듯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으며 14절에서 보듯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도 함께 이어지고 있다.


2. 그런 야곱에게 다시 약속이 주어진 것은 수십년이 지나서 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다. 당시 야곱의 상황은 딸의 성폭행을 당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들들이 그 성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게 되었을 때 가나안 사람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창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cf. 처음 루스에 갈때는 형에 의해 죽음의 두려움이 있었고, 다시 벧엘로 갈 때는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죽음의 두려움이 있었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다. 결국 공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에 있었던 죽음의 두려움이 계기가 되어 다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한다.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 그렇게 올라간 벧엘에서 하나님은 창 48:3-4의 약속과 동일한 약속을 하신다.

(창 35:9-12)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cf. 그렇다면 야곱이 48장에서 요셉에게 들려준 고백 속에 있는 약속은 28장인가, 35장인가?


3. 그런데 이것은 세대로 이어지는 아브라함때부터 이어지는 약속과 동일하다.

(창 17:4-8)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이러한 야곱의 고백은 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즉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는 것이다. 이때 요셉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창 48:5-6)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정리] 야곱은 28장의 죽음의 두려움을 주는 상황에서 자신을 만나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야곱은 35장의 다시 죽음의 두려움을 주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야곱은 48장에서 실제로 임종을 준비하면서 두려움이 아닌 평안함으로 그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야곱의 고백은 개인적이면서 세대적이다. 그 고백을 요셉에게 들려주고 있다.

Q. 나의 삶은 어떤 반복이 있는가? 클릭하고 싶은 괴로운 반복은 무엇인가? 그런 나에게 오셔서 반복되게 말씀하시고 공감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약속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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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20. 요셉 - 45장의 요셉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2. 9. 26. 11:56

 [요셉의 억제하지 못하는 눈물]


(창 45:1-2)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 45:1-2) 『[1]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 하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2]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 아파크() 억누르다 억제하다.

→ 요셉은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이전에 요셉은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 큰 소리로 우니 → 어떤 눈물일까?

-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 제2인자로서 평소에 근엄했을 요셉..

→ 눈물에 대한 바로의 반응 (창 45: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cf. 요셉은 언제 울었나?

1. 시므온은 결박하며 -(창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 베냐민을 보고 - (창 43: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 자신을 드러내며 - (창 45:1-2)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4. 아버지를 보고 - (창 46: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5. 야곱의 장례에 - (창 50: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창 50: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6. 형들이 긴장할 때 - (창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 1-2번의 눈물에서 보듯 눈물을 억제했다.

→ 그가 이제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 1. 감정을 억제하면 병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무의식으로 억압하면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이해가 안되는 것에 폭발할 수 있다.

2. 이런 점에서 요셉의 20여년 간의 억제는 억압에서 자제로 바뀌었고, 이제는 자제를 넘어 승화의 의미로 눈물을 흘린다. 즉 처음부터 요셉이 이런 눈물을 흘렸으리라 볼 수는 없지만 그의 고백에서 보듯 승화되었다.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3. 요셉의 고백과 승화의 눈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연속이고 유지이다.


※ 우리는 지금 어떤 과정 속에서 눈물을 흘리나?

 

 

[요셉의 초청과 그의 아버지와 하나님]

殺敵者는 怒也이고 取敵之利者는 貨也라(살적자 노야 취적지리자 화야 - 孫子兵法, 作戰편)

- 적을 죽이게 하는 것은 분노때문이고, 적의 자원을 취하는 것은 재물을 상으로 받기 때문이다.


(창 45:1-2)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 요셉의 관심은? 처음에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다.

(창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 굉장히 감정적으로 조절하기 힘든 상황에서 요셉은 아버지가 살아계신지 묻고 있다.

Q.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묻게 하였을까? 자식으로서 도리때문인가, 아니면 심리적 역동때문인가?

(창 45:4-5)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이고, 요셉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들이 애굽에 판 그 아우다’

-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3절과의 같은 방식? 자신이 요셉임을 말하고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던 요셉이 다시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고 하나님을 말한다.


* 왜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보냈는지 자세히 말한다.

(창 45:6-8)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 6절은 앞으로의 벌어질 상황을 말한다. 이어지는 7-8절은 이에 대한 요셉의 해석과 고백이다.

→ 5절의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보낸 것’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한다. 큰 구원, 생명보존, 후손을 세상에, 당신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다.

Q. 여기서 볼 수 없는 요셉의 감정은?


*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초청하는 요셉

(창 45:9-11)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하더라고 전하소서.』

→ 여기서도 요셉에게 볼 수 없는 것은?  보이는 것은?


(창 45:12-13)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창 45:14-15)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 위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1. 자신이 누구인지 말한다.

2. 아버지를 묻고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다시 아버지를 부른다.

Q. 그럼, 무엇이 이렇게 요셉이 아버지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을까? 그것은 관계에서 나온다.


1. 요셉과 아버지 야곱은 관계가 좋았다.

2. 그 좋은 관계가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하고 고백하게 한다.


[형제와 공동체를 향한 요셉의 부탁]

 

45:1-15에서 11번, 특히 9-11에 9번, 물론 원문에는 소유격 ‘그의 아들, 그의 손자’로

(창 45:9-11)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오늘 나눌 이야기는?

45:16-20 바로의 허락 - 바로가 요셉을 통해 형제들에게 애굽에 들어오라고 한다.

(창 45:16-20) 『[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17]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20]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45:21-24 요셉이 선물과 함께 형들을 보낸다.

(창 45:21-24) 『[21]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 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23]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24]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45:25-28 형들이 요셉이 살아 있음과 수레를 기운을 차린다.

(창 45:25-28) 『[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그중에 오늘 보려는 것은? 요셉은 왜 형제들에게 길에서 다투지 말라 했을까? 24절이다.

(창 45:24)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창 45:24)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돌려보냈다. 그들과 헤어지면서 요셉은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 하고 형들에게 당부하였다.』

(라가즈), 떨다, (어떤 격한 감정 특히 분노나 두려움으로)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불안하게 하다, 초조하게 하다, 움직이다, 자극하다, 진동하다, 성나게 하다, 떨게 하다, 떨리다, 괴롭히다, 격노하다

→ 번역은 ‘다투지, 탓하지 말라’고 하지만 직역으로 본다면 서로를 두렵게, 불안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의 익숙한 반응은 서로를 불안하게 힘들게 한다. 충분히 반성을 해도 불안에 영향받지 않기란 어렵다.

ex) 야곱이 죽자 형들은 다시 불안해졌다. (창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창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1. 부정어로 ‘금지 명령’이다. 요셉은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가는 길에서 요셉을 팔았던 과거의 잘못을 서로 전가하거나 화를 내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 있다.

2. 만일 그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후에 요셉이 한 사람을 선동자로 지명한다면 그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희생양)에 책임 회피를 위해서 서로 화를 내며 다툴 가능성이 있었다.

3. 하지만 정작 요셉은 그들이 자신을 팔았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다툼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의미로 말한다.

4. 요셉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성경기자도 당시 요셉을 죽이자고 말한 형제가 누구였는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요셉을 살리려 했던 르우벤과 유다만 부각시키고 있다.

5. 이와같이 기록한 것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에 대한 생각과 오해를 가질 수 있음을 막아준다. 만약 한 형제가 지목되면 후에 한 지파가 될 그로 인해 공동체가 깨질 수 있다.

6. 우리는 요셉의 발언으로 철저히 용서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정리]

불안은 탓하고 다투게 되며 공동체를 흔들게 된다.

요셉의 목적은? 곧 그러지 말라는 것은 공동체의 평안을 위한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불안과 그로 인한 탓에서 보호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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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20. 요셉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2. 9. 5. 11:15

[요셉은 왜 돈을 자루에 채우는가?]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 형들의 1차 이집트여행(42장)

1-5 형들은 야곱에 의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온다.

6-13 형들을 만난 요셉은 그들을 정탐꾼이라 하고 형들은 자신이 진실하다고 한다.

14-18 요셉은 막내를 데려 옴으로 진실함을 보이라 한다.

17-20 그들을 3일간 가둔 요셉은 다시 막내를 데려와 진실함을 보이라 한다.

21-22 형들은 요셉의 일을 기억하며 서로 괴로움이 임했다고 말한다.

23-24 그런 그들을 보고 요셉은 운다. 시므온을 결박한다.

25-28 요셉이 곡식, 돈자루, 길양식을 주고 형제들은 돈자루를 발견하고 두려워 한다.

29-34 형제들은 야곱에게 그간의 과정을 보고 하며 돈자루를 보인다.

35-38 야곱은 베냐민도 잃을 것을 걱정하며 괴로워한다.


▷Q. 베냐민을 데려와 진실함을 보이라던 요셉은 왜 형제들에게 자루에 돈을 채워 주었을까?

(창 42:24-25)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 요셉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자리를 피해 운다.

cf. (창 42:21-22)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 요셉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므온을 결박하게 한다.

⇒ 이것을 읽고 있는 우리도 우리 앞에서 결박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우리도 긴장이 된다.

cf. 형들은 요셉을 팔았을 때와 다른 마음일까? (창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cf. 이것을 기억하는 요셉은 ‘그들 앞에서’ 시므온을 결박하므로 과거의 자신의 상황을 연출하는가? 단순한 복수라면 왜 자루에 돈을 채워주었을까?

-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3가지- 1 곡물을 채우고, 2 돈을 자루에 채우고, 3 길양식을 준다.

⇒ 왜 요셉은 그들의 돈을 자루에 도로 넣었는가?

↠ 그것은 그들이 자기 손님임을 나타내려는 형제의 친절함에서 비롯된 것인가? (von Rad)

↠ 도둑처럼 보이게 하려는가?

↠ 그들이 기꺼이 요셉을 버리고 돈을 취했던 예전의 상황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는가?

↠ 그들은 이제 자신의 돈을 움켜쥐고 시므온을 감옥에 내버려두기로 결정할 것인가?(Sternberg)

↠ 복합적인 동기로?(Westermann)


▷ 형제들의 반응

(창 42:26-28) 『[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 직역 ‘그러자 그들의 마음은 나갔고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cf. 이후 과정을 들은 야곱은 베냐민을 잃을 걱정에 힘들어 한다.


▷ 형제들의 2차 이집트 여행

1-15 기근이 심해지고 양식이 필요한 야곱은 결국 베냐민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는 유다의 설득이 있다. 특징이라면, 야곱을 설득한 유다의 리더십과 여전히 옛방식으로 요셉을 설득하려는 야곱의 방식이 나온다.


▷ 요셉의 초청

(창 43:15-16)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

-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

-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


▷ 두려워 하는 형제들의 반응

(창 43:17-18)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그들은 두려워 하게 된다.

cf. 두려움을 느낄 때 반복되는 그들의 반응과 해석

1.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와 진실함을 보이라 할 때,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 르우벤의 원망 (창 42: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3. 돈자루를 발견하고서 곤란을 느낄 때 하나님을 원망한다. (창 42: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4. 상황을 들은 야곱의 반응 (창 42: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5. 자신들의 진실함을 보였음에도 요셉의 집으로 갈 때 그들은 두려움을 느낀다.(창 43:17-18)

⇒ 형들의 반응은 그들의 성장과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고 현대인의 일반적인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 아닐까?


▷ 형들은 진실함을 보인다.

(창 43:19-22)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

cf. 요셉을 팔 때 받은 은 20냥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 요셉의 대답

(창 43:23-24)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 요셉의 청지기이다.

-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 청지기는 요셉의 행동을 야곱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으로 이야기함으로 요셉의 마음을 전달한다.

-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

-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 근동 지방의 일상적인 손님 접대법이다.


▷ 평온한 대화

* 요셉을 기다리는 형제들

(창 43:25-26)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 형제들은 요셉의 집에서 식사한다는 것을 듣고 평온하게 요셉을 기다린다. 요셉이 오자 가져온 선물을 내놓고 절을 한다.


* 야곱의 안부를 묻는 요셉

(창 43:27-28)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 요셉의 마음은 야곱이 참으로 안녕(샬롬)하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셉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이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 베냐민을 본 요셉의 눈물

(창 43:29-31)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

-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

-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


* 만찬과 베냐민을 더 사랑하는 요셉의 모습

(창 43:32-34) 『[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

-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

-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

▷ 두 번의 울음에도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돈자루와 베냐민에 대한 표현은 무엇때문인가?

▷ 사랑이란? 스캇 벡의 정의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1. 목적론적 정의-사랑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표나 목적의 관점에서

2. 순환적 관정 - 자신의 한계를 확대시킴으로 이전보다 더 큰 존재로 성장하며, 사랑의 행위를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할 때

3.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4.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5. ‘의지’라는 단어를 욕망과 행동을 구분해야 한다. 욕망이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는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이다.

⇒곧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다시 말해서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이다.

↠ 반대로 순간적인 감정과 환상으로 사랑에 빠지거나,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신화, 혹은 의존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거나, 상대방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는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 대상의 상황과 애착의 과정을 통해 성장을 촉진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다.


[정리]

(창 42: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창 43: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 요셉의 명령을 받은 청지기는 돈을 자루에 넣었고, 불안해 하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하셨음을 말한다. 이 대답은?

1. 그 돈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형제들에게 덮어씌운 정탐꾼 혐의를 벗겨 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당황케 한다.

2. 이 내러티브의 중요한 신학적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관념은 요셉이 조만간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판 것이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기 때문이다”(45:5)-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라는 대리인들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집트사람까지도 모든 인간사를 통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창세기자는 독자로 하여금 요셉의 행동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그들을 성장시키려는 사랑의 표현이며, 이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이루어지는 모습임을 보여줌으로 독자도 하여금 그러한 고백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성장시키려는 의지를 보이시는 것을 고백하게 한다.


[요셉은 왜 은잔을 자루에 넣는가?]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 사랑이란? 스캇 펙의 정의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 곧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다시 말해서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이다.

↠ 대상의 상황과 애착의 과정을 통해 성장을 촉진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다.


▷ 요셉의 명령(시험)

* 동일한 행위

(창 44:1)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cf. 동일한 말씀 (창 42: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돈으로 인해 심문을 받게 될것을 두려워했던 형제들은 오히려 요셉의 환대를 받았다.

→ 요셉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양식값을 자루에 넣어준다.

-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


* 특별한 행위

(창 44:2)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 은잔 : 고대 이집트인들이 물을 부어 점을 칠 때 사용한 특별한 용도의 잔

→ 요셉은 베냐민에게만 특별히 은잔을 넣는다.


(창 44:3)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 요셉은 날이 밝자 그들을 보낸다.


* 요셉의 추궁

(창 44:4-6) 『[4]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6]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 선(토바) 긍정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

↠ 악(라아)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

↠ 갚다(솰람) 주로 은혜를 보답하다. 여기서는 선에 대해 은혜를 보답해야 하는데 도리어 악으로 갚고 있음을 보여준다.

cf. 후에 두려워 하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한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요셉은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형제의 악이 선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 형제들의 강조

(창 44:7-9)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 절대 그렇지 않다. 자루에 있던 돈도 다시 가져왔다. 그런 우리가 왜 도둑질을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죽고 우리는 종이 되겠다.

→ 형제들은 자신들이 진실함을 강조한다.


* 청지기의 약속

(창 44:10-12) 『[10]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11]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12]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지라.』

-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 베냐민을 위해 옷을 찢는 형제들

(창 44:13)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 옷을 찢는 것은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슬픔과 분노 등과 같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할 때 취하는 행동이다.

cf. 요셉이 팔릴 때 옷을 찢는 르우벤과 야곱

(창 37:29-30)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창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cf. 이것은 무슨 차이인가? 어떻게 형제들은 베냐민을 위해 옷을 찢는가?


* 요셉의 책망과 확인

(창 44:14-15)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

-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 일정한 거리를 두며 그들을 확인하는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cf. 임계거리 (臨界) 1.  경계(境界). 2. 어떤 물리 현상이 나뉘어 다르게 나타나는 경계.

ex) 동물행동학에서 임계거리(Critical Disyance)는?

ex) 임계거리란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기 위해, 얼룩말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 동시에 움직일 때 얼룩말이 달아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

ex) 조직에서도 뛰어난 리더는 부하직원들과의 임계 거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정 거리를 유지한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원칙’을 지킨다. 탁월한 리더는 친밀감과 안전감을 함께 제공한다.

cf.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

1. 켈의 법칙(Kel’s Law)에 의하면, 권위주의적 피라미드 조직에서 상하 간에 심리적 거리는 직급간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한다.

2. 영국 심리학자 벌로프는 심미 활동을 할 때 주체와 대상 사이에 적당한 '심리적 거리'가 유지되고 있을 때만 대상이 주체에 대해 비로소 미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cf. 촌수(寸數) 족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안된 숫자체계. 촌(寸)은 척도법의 한자이고, 우리말로는 ‘마디’를 뜻하는 말이며, 촌수로써 친족호칭을 대신하기도 한다.


[정리]

하나님은 그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회복하고 성장시키셨다.

요셉의 사랑은 그들의 진실함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경계선 있는 사랑이다.

그것을 이어지는 유다의 호소에서 보게 된다.(44:17-34)

 

 [요셉은 왜 형제들을 시험하는가?]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성공적인 상담 사례를 돌이켜 보면, 각각 어떤 점에서 나 자신도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 떠오른다. 그럴 때 치료사가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여 함께 겪어나가자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로 치료의 핵심이다. 그리고 환자가 그것을 느낄 때 항상 치유력을 발휘한다. 치료사가 자신을 기꺼이 확장시키고 환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면 자신도 성장하고 변화한다. 다시 한번 성공적인 사례를 돌아보면, 나의 태도와 관점에서 아주 의미있고 가끔은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경우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괄호로 묶기’라는 훈육이며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확대와 결국에는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원리는 좋은 심리치료를 위해서만 이 아니라 좋은 부모가 되는 데에도 필수다.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데에도 똑같은 괄호로 묶기와 자신의 확장이 필요하다. 그들의 건전한 요구에 응답해주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에 따른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이고자 용기를 발휘해야만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도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아이들과 함께 변하고 자라야 할 의무가 있다.」 - M.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p.214.

* 위 인용문에서 중요한 표현들을 찾아보자.

→ 요셉의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행 11:29-30)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cf.→ 다르게 표현한다면, 생물학적인 부모에서 심리학적인 부모로 전환되어야 한다

→ 전인건강은 상처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상처를 다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자신이 선택하는 그 무엇이다.(클라인벨)

→ 건강이란 불완전한 사람들이 매우 불완전한 세계에 직면하여 살아가면서도 보람있고,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실존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한 방식이다.(르네 뒤보)

→ 사랑이란 삶을 움직여 나가는 힘(틸리히) ⇒ 사랑이 바로 전인건강의 핵심

→ 오직 사랑만이 생명체들을 완성하고 충족시킴으로써 그것들을 결합할 수 있다.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 하워드 클라인벨 『전인건강』

 

 

[요셉의 일관된 사랑법은 하나님의 일관됨]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오늘 나누려는 것은 요셉의 계속되는 일관된 사랑법과 이미 변화의 과정을 밟은 유다와 형제들이 자신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 요셉의 일관된 관심-정직, 진실함

(창 42: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창 42: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창 42: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 진실됨을 증명하면 죽지 않는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진실함은 요셉의 최고 관심이다.

⇒ 요셉은 3실이다. cf. 그의 장점은 단점이 된다. 권위자의 관계 안에서 제한적이다.

(창 45:5,7,8)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 이런 장단점 속에서 형제들을 시험하는 도구이며 기준은? 진실함.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 진실하지 않음=죽음?

→ 이렇게 '진실'에 대한 일관된 그의 관심은 형제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Q. 그들은 정직했는가? 지금 그들은 정직한가? 어떻게 무엇이 그들을 정직하게 했는가?


* 요셉의 책망

(창 44:14-15)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 유다의 대답

(창 44: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 정직을 나타내다. : 차다크(צדק) 의롭다, 진실이 입증되다. → 요셉의 주문은 정직이었다.

-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


* 요셉의 계속되는 시험

(창 44:17)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 44:17) 『요셉이 말하였다.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이 잔을 가지고 있다가 들킨 그 사람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돌아가거라."』

⇒ 요셉이 보려는 일관된 시험인 ‘정직’은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여전히 정직을 선택하는지 보려는 것이다.


* 유다의 간청

(창 44:18-34)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가려 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 유다는 말한다. 막내 아우를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 때문에 아버지에게 말하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왜인가? 그것은 야곱이 27-29에서 말하듯 그들이 보기에도 ‘아버지와 아이는 서로 묶여 있음’(30)을 말한다. 그럼 아버지는 죽게 되고 자신들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아우를 데려가지 못하여 아버지에게 그런 재난이 미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한다.

→ 유다는 왜 대신하면서까지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는가?

⇒ 유다의 일관된 모습은 무엇인가?

⇒ 곧 요셉의 고백처럼 그를 이집트로 보낸 것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처럼,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자신도 변하고 그 형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그릇을 준비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형들을 변화시키셨고 아버지에 대한 본심을 보게 했다.


[정리]

지금의 요셉을 있게 하고 그의 삶의 기준이며 근거인 ‘정직 진실’은 그렇지 않은 형들을 시험하는 기준이 된다.

cf. 요셉이 확인한 것 -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요셉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고 그 편애의 대상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 편애는 더욱 심해져서 야곱의 생명과 죽음이 베냐민과 묶여 있다고 한다.

요셉의 시험과 상관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표현대로 정직해져 있었고 베냐민을 대신할 정도로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 요셉의 일관된 정직의 관심과 삶, 형들의 변화된 정직의 삶은 그들을 향한 일관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

성경인물 20. 요셉 - 형제를 만나다. 그것은 준비된 은혜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2. 6. 13. 16:28

[요셉, 형제를 만나다. 그것은 준비된 은혜]

→ 37장-41장 요셉의 어린시절 꿈, 이집트에서의 노예와 죄수생활, 그리고 총리

→ 42장-45장 기근으로 음식을 찾아온 형제와의 만남과 과정

→ 42장(1차 여행), 43장(2차 여행), 44장(시험하기), 45장(자신을 밝히기)


* 41장의 내용요약

1-5 배경은 야곱의 집이고 식량을 사러간다.

6-8 요셉이 형제들을 알아본다.

9-16 어릴적 꾼 꿈이 생각난 요셉은 형제들을 정탐꾼이라며 진실함을 증명하라 몰아붙인다.

17   형제들을 3일간 감옥에 있게 한다.

18-20 막내를 데려오라고 제안한다.

21-23 요셉은 형제들의 후회를 듣는다.

24-28 시므온이 남고 형제들은 돈자루가 있는 것에 놀란다.

29-38 집에 돌아와 모든 과정을 야곱에게 말한다.


* 많은 질문이 가능하다.

Q. 요셉은 왜 총리가 되지마자 가족들을 부르지 않았을까?

Q. 요셉은 왜 형제들을 발견하였을 때 꿈을 생각했을까?

Q. 요셉은 왜 형제들을 정탐꾼이라 하며 동생을 데려오라 하였을까?

Q. 요셉은 왜 형제들을 3일간 감옥에 있게 했을까?

Q. 요셉은 왜 시므온을 결박했을까?

Q. 요셉은 왜 돈자루를 주었을까?

Q. 요셉은 왜 형제들을 그대로 돌려보냈을까?

Q. 요셉은 왜 그들의 이야기를 눈물로 들었을까?

Q. 요셉은 왜 동생을 데려오는 것으로 그들의 진실함을 확인하려 했을까?

→ 이 많은 질문은 ‘요셉은 왜’에서 ‘하나님은 왜’로 바꿀 수 있다.


* 야곱의 집에서 → 1-5절은 41장의 배경이고 발단이다.

배경1. 그들이 왜 이집트로 와야 하는가? 경제적인 이유

(창 42:1-2) 『[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창 42: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헤브론에서 이집트까지 400km는 약탈이나 침입의 위험한 상황임에도 가야하는 길이었다.

- 요셉의 형 열 사람 : 야곱의 아들 10인이라 하지 않고 요셉과 관련하여 표현한다.


배경2. 베냐민을 언급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이 베냐민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창 42: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 야곱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은 것은 재난이 그에게 미칠것을 두려웠기 때문이다. 야곱이 생각한 재난은 가는 도중 요셉처럼 들짐승에게 잡혀 먹힐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그러나 실제로 닥친 재난은 이집트총리가 베냐민을 오도록 요구하고 2차여행에서는 형제들의 진실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베냐민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재난을 보게 된다.


(창 42: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창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곡식을 사러 가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 기근을 통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야곱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향한다.


* 지금 우리의 상황도 그러하다. 현대는 무엇으로 물가가 오르는가?

국민고통지수=물가상승률+실업률  

물가상승이유 : 고환율, 통화량증가, 저금리

 

* 형제들, 요셉을 만나다.

(창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창 42:6) 『그 때에 요셉은 나라의 총리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요셉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하였다.』

Q. 어떻게 형제들은 요셉 앞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1.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직접 곡식을 팔거나 곡식을 사는 사람을 일일이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곡식판매는 여러지역의 실무자들이 담당했을 것이다.

2. 그러나 곡물매매의 최종 결재는 요셉의 관리하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집트사람이 아닌 외국인의 경우는 더욱 관리를 요구했을 것이다.

3. 그러한 관리의 책임이 있는 요셉은 근동지역이 풍년에 이어 흉년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족들도 곡식매매를 위해 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경수비대에 가나안의 사람이 오면 자신에게 데려오도록 실무자들에게 적절한 지시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4. 이로 인해 형제들은 요셉 앞에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곡식을 얻기 위해 절하는 자와 판매할지를 결정하는 자의 관계로 만나게 되었다.


(창 42:7-8)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창 42:7-8) 『[7] 요셉은 그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들이 형들임을 알았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그들에게 엄하게 물었다. "너희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먹을거리를 사려고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 [8]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엄한 소리로 : 카쉐() 호되고 거칠고 가혹한 언어를 사용했다.

Q. 20년만에 만난 형제들을 보고 요셉은 호된 표현을 사용하고 이어서는 정탐꾼이라고 한다. 이는 개인의 복수인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은혜인가?


[정리]

준비된 은혜가 때가 되었다. 야곱이 아들들을 보내고 요셉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만난다.


[기근, 만남의 조건이다.]

 

▷ 기근, 만남의 조건이다.

1. 온 지면, 온세상에서 가나안 땅으로 초점이 이동

(창 41:56-57)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창 42: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 ‘넓은 지역’에서 ‘좁은 지역’으로 축소시킨다.

2. 기근은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

(창 42: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 기근이 없었다면 그들은 움직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근이 있었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움직임이 그저 양식을 사러가는 자로서만 보일 뿐이다.

3. 기근은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게 한다.

→ 여기서 이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느낄 때 다음이 열린다.

4. 기근 속에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가 있다.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 기근은 준비된 하나님의 하실 일이다. 그것으로 형제들은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한다. 기근으로 부족한 사람이 손을 내민다. 누군가가 먼저 부족을 느끼고 손을 내밀어야 화해가 이루어진다. 한 자리에 서야 진정한 화해가 시작된다.

5. 누가 먼저 움직여야 하는가? 용서받을 사람 vs 용서할 사람(용서한 사람)

- 야곱 vs 에서의 경우,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3: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 요셉 vs 형제들의 경우, 용서받아야할 사람은 형제들이다.

cf. 용서받을 사람이 용서할 사람을 만나야 한다. 곧 용서받을 사람은 용서받을 행동을 늦게라도 기회가 되면 해야 한다.

cf. 사람 vs 하나님의 경우는 어떨까? 용서받을 사람을 용서하신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 기근은 용서받을 사람이 용서한 사람을 찾아가도록 자신의 부족을 보게 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직면은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역효과를 얻을 수 있다.


▷ 알아보는 요셉 vs 알아보지 못하는 형제들

(창 42:7-8)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 알아보다(나카르) 주목하다, 알아보다. 세밀히 조사하다, 골똘히 쳐다보다, 인식하다, 알아채다,

→ 모른체하다(네케르) ‘이상한’ 어떤 것, 즉 예기치 않은 ‘재난’, 낯설은


-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 직역 ‘그리고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들에게서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게 했다’

→ 요셉은 형들을 보고 알아보다. 왜? 기다렸으니까..

   형들은 요셉을 보고 알아보지 못한다. 왜?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으니까..

⇒ 요셉의 질문으로 그들이 이집트에 온 이유를 알게 된다. 기근으로 음식이 필요한, 즉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용서는 곧 여유를 가진 자와 부족을 느끼는 자의 관계이다.

cf. 요셉의 다르게 행동함을 모른체함으로 보는 것은 형제들의 시각이다. 우리 역시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모른체 한다고 말한다.

cf. 예수는 죽기까지 해서 우리를 용서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느끼는 부족을 채우고 소유하는 것이다.


Q. 요셉은 왜 형들을 모른체 할까? 이는 개인의 복수인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은혜인가?

cf.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다. 그들이 변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면, 자신이 어떤 누구인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면, 이 방법 외에 다른 것은 없었을까?

→ 요셉이 먼저 용서했다고 하면 그들은 참회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처음에는 고맙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못보게 된다. 용서받을 준비를 주지 않는 용서는 자신을 볼 수 있는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 요셉이 먼저 형들을 용서한다고 하면 처음에만 놀라고 이후에는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자신이 감추려고 했던 것을 직면했다는 것을 상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깊은 무엇인가 그 안에 계속 있다. 형들이 자기가 입으로 토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1. 보고 들을 자유

2. 느끼고 표현할 자유

3. 생각하고 말할 자유

4. 원하고 바라고 선택할 자유

5. 모험하고 부르심대로 나아갈 자유

 

⇒ 결국 45장으로 가기전 42-44장의 과정은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이다.

⇒ 요셉도 그런 과정을 통해 형제들에게 42-44장의 과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셉의 인생에는 형제에게 팔리고 주인에게 모함받는 억울함을 샬롬과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는 과정이 있었다.

⇒ 건강한 자는, 바르게 용서할 수 있는 자는 상대에게 자신을 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서는 안된다.

 

[너희 진실함을 증명하라]

▷ 오늘 보려는 주제는?

1. 요셉을 통해 제공되는 자유,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는 무엇일까?

2. 형들은 자신이 어떻게 정직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3. 요셉은 왜 그리고 무엇으로 그들에게 정직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4.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증명할 수 있을까?


* 형제를 만난 요셉은 모른체 하며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시작한다. 그것의 시작은 ‘꿈’이다.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생각하고 → 자카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다, 상기하다’의 의미

a. 요셉은 잊고 있던 꿈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에 새겨두었던 꿈이 생각났다.

b. 형들이 와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마치 그가 꾼 꿈과 동일한 상황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창 37:7,9)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c. 요셉은 이 꿈이 확실히 성취되리라고 믿고 형들에게 이야기했으나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형제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이집트의 노예로 팔리기까지 되었다.

d. 그런데 요셉의 꿈을 불신하고 방해하려 했던 형들이 지금은 오히려 요셉의 꿈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e. 곧 요셉은 과거의 꿈과 더불어 이러한 모든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a. 이집트는 지형학적으로 공격받을 수 있으며 실제로 늘 타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해 왔다. 그런 까닭에 당시 이집트인들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나그네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다.

b. 더욱이 흉년으로 인해 곡식을 사러 온 외국인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모아둔 식량을 빼앗긴다.

c.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정탐꾼이라고 말한 것은 적국의 스파이로 그들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 생명의 위협을 느낀 형들의 반응

(창 42:10-11)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 내 주여, 아니니이다.

a. 급박해진 상황에서 형들은 요셉에게 자세를 낮추고 ‘주님’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미워하고 잡어서 죽이려고까지 했던 요셉에게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b. 요셉은 형들의 호칭으로 더욱 꿈과 일치됨과 상황이 역전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c. ‘아니니이다’는 강한 부정으로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a. 자신들이 이집트에 온 목적은 오직 곡물구입을 위함이며, 일행이 많더라도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탐지하려고 온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b.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말함으로 정탐이 아닌 생명유지를 위해 왔기에 무죄이고 정탐과는 상관이 없음을 강조한다.

cf. 동생을 상인에게 팔고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할 때 자신들은 전혀 죄가 없음을 얼마나 강조했을까?

(창 37:31-33)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 옷에 피를 적시고-아버지에게 보이고-거짓을 확인하게 하고-아버지에게 거짓된 확신을 갖게 한다.

-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a. 확실한 자들 : 켄(), 본래의 의미는 ‘똑바로 세우다’ ‘정당한, 옳게, 확실히, 참된’

b. 형들은 자신들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속이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스스로 정직하고 바르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은 심지가 굳고 청렴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c.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의 행위를 볼 때 진실한 사람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곧 자신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강조함으로 실제로는 그 자체가 거짓이다.

d. 지금까지 형제들이 정직해졌다고 할만한 것이 성경에는 나오지도, 자신을 직면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확실한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cf. 자신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참)을 말함으로 다른 모든 것들도 사실(참)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반쪽정직과 반쪽 거짓이 있다.


* 요셉의 강조와 반복

(창 42: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 아니라. → 형들이 썼던 부정을 요셉이 다시 부정한다. 그리고 요셉은 9절의 표현을 다시 반복한다. ⇒ 이 강조는 형들을 더욱 자체 모순의 이야기를 하게 한다.


(창 42: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a. 사실 - 12형제로서 한 사람의 아들들이다. 막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

   거짓 -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죽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b. 그들은 요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상인들에게 팔았으며 아버지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c. 이것으로 요셉의 형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아직도 정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과거의 자진한 행위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d. 그들은 총리에게 자신들의 가족사항을 자세히 말함으로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말하고 단지 곡식을 사러온 자로서 정탐꾼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하나, 오히려 자신들이 부정직함만 드러내고 있다.


* 요셉의 강조와 자신에게 중요한 삶의 자세

(창 42: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a. 이것 -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12절) → ‘너희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다’라는 의미이다.

b. 요셉은 곡식을 사러온 형들을 보자 가장 먼저 자신이 꾸었던 과거의 꿈과 그 꿈과 관련된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c. 요셉은 정직한 사람이다. 스스로 확실하다고 말하는 형들의 고백은 진짜 확실한 요셉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증명하라 한다.

cf. 사람은 항상 하던 것을 한다. 익숙한 것을 한다. 자신의 잘못을 알기란 어렵다.

a. 요셉의 관점에서 정직은 요셉의 삶에 중요한 것이다. 요셉은 그런 눈으로 형들을 볼때 여전히 거짓을 말하고 있고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b. 성경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거룩하다. 곧 요셉을 통해 형제들이 정직해지기를 원한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c. 독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정직과 부정직을 보게 한다.

∴ 성경의 방향은 요셉을 통해 정직과 바름과 거룩을 이야기하며 형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도 보게 한다.


* 진실할 수 있는 구체적인 요셉의 제안

(창 42: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 직역 ‘이로써 너희는 증명받게 될 것이다’(you shall be proved, you will be tested)

→ 너희 진실함을 : 원문에는 나오지 않으나 16절과 연결하면 동일한 내용이 된다.

→ 빠한() 검사하다, 조사하다, 증명하다, 유혹하다, 시험하다(시험), ⇒ 여기서는 어떤 것의 특성이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해 시험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단순재귀형을 사용함으로 너희들이 정탐꾼이 아닌지는 시험을 통해 스스로 증명하라는 뜻.

→ 막내를 데리고 오면 = 너희들은 증명될 것이다.

-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 당시의 흔한 맹세형태로서 이집트인들에게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인 파라오를 통해 맹세함으로 확실함을 강조한다.

-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a.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막내 베냐민에게 자신처럼 사랑을 쏟고 있음을 알게 된다.

b. 그런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려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허락하지 않아 긴 시간이 지연되었다.

c. 동생 요셉을 돌보지 않은 형들에게 막내 베냐민을 돌보게 한다.

d. 돌보아야 할 동생을 데려오면 어찌 될지 모를 이집트로 데려와서 자신들이 정직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Q. 자신을 증명하는 것?

형들 :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 요셉이 없어졌다하여 거짓을 보인다

요셉 : ‘이것이다’ 말함으로 그들의 거짓을 드러낸다 → 스스로 증명되게 하라 한다.

적용 : 지금 내가 바른 신앙임을, 바른 마음임을, 바른 상태임을 증명되게 하라?


(창 42:16-17)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 형제중 한 사람을 보내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단호하게 명령한다. 그렇게 해야만 오해를 풀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 에메트() 확실하고 신실하고 옳고 분명하고 참됨의 의미

→ 형들이 자신들에게 진실이 있는지 증명해야할 것들

a.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동생을 미워하였다.

b. 그 동생을 죽이려다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c. 아버지에게는 거짓증거물을 가져와 요셉이 죽었음을 믿게 함으로 아버지의 기쁨을 빼앗았다.

d. 총리에게 자신들은 확실한 자들이라 하면서도 요셉이 없어졌다고 말함으로 자신들과는 무관함을 말한다.

⇒ 이렇게 그들은 반쪽거짓말로 상황과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더큰 위기를 맞게 된다.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약함(반쪽 거짓)을 꺼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꺼내야 한다.

-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 3일동안 갇혀 있음으로 형제들은 자신들을 직면하는 과정에 진입하게 된다.


▷ 오늘 보려는 주제는?

1. 요셉을 통해 제공되는 자유,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는 무엇일까? → 그

2. 형들은 자신이 어떻게 정직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

3. 요셉은 왜 그리고 무엇으로 그들에게 정직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

4.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증명할 수 있을까? →

 

[요셉은 왜 형제들을 정탐꾼(spy)이라 하는가?]

지난주 내용은 요셉의 형제들의 반쪽 거짓의 상황과 진실증명에 대해 나눴다.

1. 요셉을 통해 제공될 자유에 대해 그들은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2. 형제들은 자신이 신분이 확실하며 정직하다고 하지만 말할수록 그들은 정직하지 않음이 들어날 뿐이다.

3. 특히 16절에서 요셉은 그들에게 진실함을 증명하라 하고 성경의 내용은 그렇게 되어간다.

4.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무엇이 진실함인지 증명할 수 있는지를 보게 한다.

⇒ 곧 형제들은 계속해서 반쪽 거짓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 진실을 증명해야하는 하나님의 준비된 은혜를 받아들여야 했다.


Q 1. 요셉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이 있는 보이라.

(창 42: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Q 2. 그런 요셉이 왜 형제들을 정탐꾼(spy)이라 하는가?

Q 3. 형제들은 이 상황에서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가?

목적 : 반쪽 거짓이 아닌 반쪽 진실을 온전한 진실로 발견하고 증명하려 한다.


▷ 요셉이 형제들을 정탐꾼이라 하는 이유?

1. 정탐꾼은 정직하지 않은 자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2. 요셉이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부른 것은 그들에게 거짓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이집트의 지정학적 특징이 위협을 받고 있기에 외국인은 특별관리대상으로 정탐꾼인지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무관할 것이다.

4. 요셉은 그들을 3번 정탐꾼이라고 한다.(9,12,14)

(창 42:9,12,14)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 ‘너희는 ~이다’라는 정체성에 대한 강조


▷ 형제들의 정체성 고백하기

- 요셉의 주장 1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형제들의 고백

(창 42:10-11)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 아닙니다. → 총리의 주장을 부인한다.

2. 곡물을 사러 온 자들이다. → 이곳에 온 분명한 목적을 말한다.

3. 한 사람의 아들들이다. → 자신들의 출생의 근거에 대해 말한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정탐꾼이 아닙니다.


- 요셉의 주장 2

(창 42: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 형제들의 고백

(창 42: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 우리는 12형제이다.         2. 가나안 땅              3. 한 사람의 아들들이다.

4. 막내는 아버지와 다른 하나는 없다.

특징 - 첫 대답에 비해 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1. 형제들은 처지가 같은 10명을 형제라 하지 않고 12명을 형제라 한다. → 이것은 이후에 생길 ‘이스라엘 12지파 공동체’이다.

2. 가나안 땅 출신임을 말한다.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말한다.

3. 한 사람의 아들 - 11절에서도 나오지만 다시 그들이 한 혈육임을 강조한다.


- 요셉의 주장 3

(창 42:14-16)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 요셉의 주장의 목적은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12명이라고 말한 것에 더욱 그것을 증명하라고 한다. 곧 그들의 입으로 말한 12지파 공동체에 대해 증명하라 한다.


⇒ 곧 요셉이 그들을 정탐꾼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정체성을 증명하라는 것..

cf. 지금 우리에게 ‘너희는 정탐꾼이냐’ 즉 다른 정체성을 강요한다면 상황에 맞는 정체성일 수 있으나 분명한 정체성은 아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정리] 요셉의 강조는 반쪽 거짓만이 아니라 반쪽 진실을 말함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민족의 정체성으로 승화시킨다.

 

[요셉이 울다]

▷ 3일간의 감옥생활

(창 42:16-17)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 갇히어 있으라 :  아싸르() 감옥에 매다. 

- 가두다 : 아싸프() 모으다. 보호하다.

Q. 과연 형제들은 감옥에서 3일을 있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 분명한 것은 그들은 3일동안 같이 있으면서 그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을 것이고, 불안, 긴장, 두려움의 3일이었을 것이다. cf. 요셉이 구덩이에서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 요셉의 제안수정과 배려

(창 42:18-20)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 사흘만에 : 3일뒤 요셉이 그들에게 와서 제안을 수정한다. 한 명만 남으라 한다.

* 제안을 수정하는 이유?

1. 집안에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곡식을 가져가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일 것이다.

2. 9명이 1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혼자서 구덩이에 있는 요셉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구조이다.단, 구하고 싶은 마음 vs 죽이고 팔려는 마음

-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 야레()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예배하고 경외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

* 증명하기 위한 과정

1.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2.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4.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 증명과 결과

-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


▷ 형제들의 후회와 동일시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

-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

-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

-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cf. 그들에게 괴로움은?


▷ 르우벤의 반응

(창 42: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인과응보

cf. (창 9: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 성경을 인용하지만 장남 르우벤의 모습은 리더십 부재의 모습이다.


▷ 요셉이 울다.

(창 42:23-25)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 그들의 진실을 증명하게 하기 위해 요셉은 끝까지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 요셉의 눈물은 그의 행동에 진정성을 보여준다. 형제들이 진실함을 증명하기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고충을 보여준다.

* 요셉은 언제 울었나?

1. 베냐민을 보고 - (창 43: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2. 아버지를 보고 - (창 46: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 야곱의 장례에 - (창 50: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창 50: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4. 형들이 긴장할 때 - (창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cf.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 울까? → 고기를 원하여 울며 불평하는 이스라엘

1. 이스라엘의 울며 불평 (민 11:4-6) 『[4] 그늘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6]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 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2. 모세의 기도 (민 11:13-14)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3. 하나님의 응답 - 70인 장로를 세우다(16-17), (민 11:18-20)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19]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20]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4. 백성들의 의심 (민 11:21-22) 『[21]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 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5. 하나님의 응답 (민 11: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6. 메추라기 (민 11:32)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7. 울음의 원인 - 욕심 (민 11:34)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cf. 이외에도 성경에는 많은 눈물과 울음이 나온다.

- 삼손의 아내의 울음 (삿 14: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 하도다” 하는지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삿 14:17) 『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 베냐민지파와의 전쟁에서 (삿 20: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 룻기에서 (룻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 한나의 눈물기도 (삼상 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 암소가 울다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 에스라와 백성들의 울음 (라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 느헤미야의 울음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 이스라엘백성의 울음 (더 4: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 시편과 예언서에서의 울음

- 베드로의 울음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향유를 붓는 여인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 스데반의 장사 (행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 바울과 함께 울다 (행 20:36-38)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 예수의 울음, 예루살렘을 보시고 (눅 19: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cf.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가 돌아오기까지, 그들이 회개하고 진실함을 증명하기까지 그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요셉과 같을 것이다.

-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 요셉은 시므온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단단하게 묶는다. 이는 그들에게 요셉의 단호함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cf. 왜 시므온인가? 르우벤의 바로 밑 동생이기 때문이고, 세겜과의 살육에서 앞장서서 차갑고 냉혹한 성품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곡물과 함께 그들의 돈까지 도로 넣게 한다. 이것은 이후 이집트로 돌아오는데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많은 갈등의 요소가 되게 한다.


[정리] 요셉은 왜 우는가?

1. 그들의 진실함을 보이게 하기 위해

2.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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