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20. 요셉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2. 9. 5. 11:15

[요셉은 왜 돈을 자루에 채우는가?]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 형들의 1차 이집트여행(42장)

1-5 형들은 야곱에 의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온다.

6-13 형들을 만난 요셉은 그들을 정탐꾼이라 하고 형들은 자신이 진실하다고 한다.

14-18 요셉은 막내를 데려 옴으로 진실함을 보이라 한다.

17-20 그들을 3일간 가둔 요셉은 다시 막내를 데려와 진실함을 보이라 한다.

21-22 형들은 요셉의 일을 기억하며 서로 괴로움이 임했다고 말한다.

23-24 그런 그들을 보고 요셉은 운다. 시므온을 결박한다.

25-28 요셉이 곡식, 돈자루, 길양식을 주고 형제들은 돈자루를 발견하고 두려워 한다.

29-34 형제들은 야곱에게 그간의 과정을 보고 하며 돈자루를 보인다.

35-38 야곱은 베냐민도 잃을 것을 걱정하며 괴로워한다.


▷Q. 베냐민을 데려와 진실함을 보이라던 요셉은 왜 형제들에게 자루에 돈을 채워 주었을까?

(창 42:24-25)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 요셉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자리를 피해 운다.

cf. (창 42:21-22)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 요셉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므온을 결박하게 한다.

⇒ 이것을 읽고 있는 우리도 우리 앞에서 결박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우리도 긴장이 된다.

cf. 형들은 요셉을 팔았을 때와 다른 마음일까? (창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cf. 이것을 기억하는 요셉은 ‘그들 앞에서’ 시므온을 결박하므로 과거의 자신의 상황을 연출하는가? 단순한 복수라면 왜 자루에 돈을 채워주었을까?

-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3가지- 1 곡물을 채우고, 2 돈을 자루에 채우고, 3 길양식을 준다.

⇒ 왜 요셉은 그들의 돈을 자루에 도로 넣었는가?

↠ 그것은 그들이 자기 손님임을 나타내려는 형제의 친절함에서 비롯된 것인가? (von Rad)

↠ 도둑처럼 보이게 하려는가?

↠ 그들이 기꺼이 요셉을 버리고 돈을 취했던 예전의 상황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는가?

↠ 그들은 이제 자신의 돈을 움켜쥐고 시므온을 감옥에 내버려두기로 결정할 것인가?(Sternberg)

↠ 복합적인 동기로?(Westermann)


▷ 형제들의 반응

(창 42:26-28) 『[26]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27]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 직역 ‘그러자 그들의 마음은 나갔고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cf. 이후 과정을 들은 야곱은 베냐민을 잃을 걱정에 힘들어 한다.


▷ 형제들의 2차 이집트 여행

1-15 기근이 심해지고 양식이 필요한 야곱은 결국 베냐민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는 유다의 설득이 있다. 특징이라면, 야곱을 설득한 유다의 리더십과 여전히 옛방식으로 요셉을 설득하려는 야곱의 방식이 나온다.


▷ 요셉의 초청

(창 43:15-16)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

-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

-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


▷ 두려워 하는 형제들의 반응

(창 43:17-18) 『[17]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그들은 두려워 하게 된다.

cf. 두려움을 느낄 때 반복되는 그들의 반응과 해석

1.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와 진실함을 보이라 할 때,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 르우벤의 원망 (창 42: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3. 돈자루를 발견하고서 곤란을 느낄 때 하나님을 원망한다. (창 42:28)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4. 상황을 들은 야곱의 반응 (창 42: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5. 자신들의 진실함을 보였음에도 요셉의 집으로 갈 때 그들은 두려움을 느낀다.(창 43:17-18)

⇒ 형들의 반응은 그들의 성장과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고 현대인의 일반적인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 아닐까?


▷ 형들은 진실함을 보인다.

(창 43:19-22) 『[19]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

cf. 요셉을 팔 때 받은 은 20냥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 요셉의 대답

(창 43:23-24)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 요셉의 청지기이다.

-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 청지기는 요셉의 행동을 야곱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으로 이야기함으로 요셉의 마음을 전달한다.

-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

-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 근동 지방의 일상적인 손님 접대법이다.


▷ 평온한 대화

* 요셉을 기다리는 형제들

(창 43:25-26)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 형제들은 요셉의 집에서 식사한다는 것을 듣고 평온하게 요셉을 기다린다. 요셉이 오자 가져온 선물을 내놓고 절을 한다.


* 야곱의 안부를 묻는 요셉

(창 43:27-28)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 요셉의 마음은 야곱이 참으로 안녕(샬롬)하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셉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이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 베냐민을 본 요셉의 눈물

(창 43:29-31)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

-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

-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


* 만찬과 베냐민을 더 사랑하는 요셉의 모습

(창 43:32-34) 『[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

-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

-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

▷ 두 번의 울음에도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돈자루와 베냐민에 대한 표현은 무엇때문인가?

▷ 사랑이란? 스캇 벡의 정의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1. 목적론적 정의-사랑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표나 목적의 관점에서

2. 순환적 관정 - 자신의 한계를 확대시킴으로 이전보다 더 큰 존재로 성장하며, 사랑의 행위를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할 때

3.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4.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5. ‘의지’라는 단어를 욕망과 행동을 구분해야 한다. 욕망이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는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이다.

⇒곧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다시 말해서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이다.

↠ 반대로 순간적인 감정과 환상으로 사랑에 빠지거나,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신화, 혹은 의존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거나, 상대방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는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 대상의 상황과 애착의 과정을 통해 성장을 촉진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다.


[정리]

(창 42: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창 43: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 요셉의 명령을 받은 청지기는 돈을 자루에 넣었고, 불안해 하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하셨음을 말한다. 이 대답은?

1. 그 돈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형제들에게 덮어씌운 정탐꾼 혐의를 벗겨 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당황케 한다.

2. 이 내러티브의 중요한 신학적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관념은 요셉이 조만간 자기 형제들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판 것이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기 때문이다”(45:5)-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라는 대리인들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집트사람까지도 모든 인간사를 통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창세기자는 독자로 하여금 요셉의 행동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그들을 성장시키려는 사랑의 표현이며, 이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이루어지는 모습임을 보여줌으로 독자도 하여금 그러한 고백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성장시키려는 의지를 보이시는 것을 고백하게 한다.


[요셉은 왜 은잔을 자루에 넣는가?]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 사랑이란? 스캇 펙의 정의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 곧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다시 말해서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이다.

↠ 대상의 상황과 애착의 과정을 통해 성장을 촉진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다.


▷ 요셉의 명령(시험)

* 동일한 행위

(창 44:1)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cf. 동일한 말씀 (창 42: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 돈으로 인해 심문을 받게 될것을 두려워했던 형제들은 오히려 요셉의 환대를 받았다.

→ 요셉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양식값을 자루에 넣어준다.

-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


* 특별한 행위

(창 44:2)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 은잔 : 고대 이집트인들이 물을 부어 점을 칠 때 사용한 특별한 용도의 잔

→ 요셉은 베냐민에게만 특별히 은잔을 넣는다.


(창 44:3)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 요셉은 날이 밝자 그들을 보낸다.


* 요셉의 추궁

(창 44:4-6) 『[4]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6]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 선(토바) 긍정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

↠ 악(라아) 부정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

↠ 갚다(솰람) 주로 은혜를 보답하다. 여기서는 선에 대해 은혜를 보답해야 하는데 도리어 악으로 갚고 있음을 보여준다.

cf. 후에 두려워 하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한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요셉은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형제의 악이 선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 형제들의 강조

(창 44:7-9)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 절대 그렇지 않다. 자루에 있던 돈도 다시 가져왔다. 그런 우리가 왜 도둑질을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죽고 우리는 종이 되겠다.

→ 형제들은 자신들이 진실함을 강조한다.


* 청지기의 약속

(창 44:10-12) 『[10]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11]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12]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지라.』

-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 베냐민을 위해 옷을 찢는 형제들

(창 44:13)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 옷을 찢는 것은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슬픔과 분노 등과 같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할 때 취하는 행동이다.

cf. 요셉이 팔릴 때 옷을 찢는 르우벤과 야곱

(창 37:29-30)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창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cf. 이것은 무슨 차이인가? 어떻게 형제들은 베냐민을 위해 옷을 찢는가?


* 요셉의 책망과 확인

(창 44:14-15)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

-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 일정한 거리를 두며 그들을 확인하는 요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cf. 임계거리 (臨界) 1.  경계(境界). 2. 어떤 물리 현상이 나뉘어 다르게 나타나는 경계.

ex) 동물행동학에서 임계거리(Critical Disyance)는?

ex) 임계거리란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기 위해, 얼룩말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 동시에 움직일 때 얼룩말이 달아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

ex) 조직에서도 뛰어난 리더는 부하직원들과의 임계 거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정 거리를 유지한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원칙’을 지킨다. 탁월한 리더는 친밀감과 안전감을 함께 제공한다.

cf.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

1. 켈의 법칙(Kel’s Law)에 의하면, 권위주의적 피라미드 조직에서 상하 간에 심리적 거리는 직급간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한다.

2. 영국 심리학자 벌로프는 심미 활동을 할 때 주체와 대상 사이에 적당한 '심리적 거리'가 유지되고 있을 때만 대상이 주체에 대해 비로소 미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cf. 촌수(寸數) 족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안된 숫자체계. 촌(寸)은 척도법의 한자이고, 우리말로는 ‘마디’를 뜻하는 말이며, 촌수로써 친족호칭을 대신하기도 한다.


[정리]

하나님은 그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회복하고 성장시키셨다.

요셉의 사랑은 그들의 진실함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경계선 있는 사랑이다.

그것을 이어지는 유다의 호소에서 보게 된다.(44:17-34)

 

 [요셉은 왜 형제들을 시험하는가?]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성공적인 상담 사례를 돌이켜 보면, 각각 어떤 점에서 나 자신도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 떠오른다. 그럴 때 치료사가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여 함께 겪어나가자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로 치료의 핵심이다. 그리고 환자가 그것을 느낄 때 항상 치유력을 발휘한다. 치료사가 자신을 기꺼이 확장시키고 환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면 자신도 성장하고 변화한다. 다시 한번 성공적인 사례를 돌아보면, 나의 태도와 관점에서 아주 의미있고 가끔은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경우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바로 ‘괄호로 묶기’라는 훈육이며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확대와 결국에는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원리는 좋은 심리치료를 위해서만 이 아니라 좋은 부모가 되는 데에도 필수다.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데에도 똑같은 괄호로 묶기와 자신의 확장이 필요하다. 그들의 건전한 요구에 응답해주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에 따른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이고자 용기를 발휘해야만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도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아이들과 함께 변하고 자라야 할 의무가 있다.」 - M.스캇 펙, 『아직도 가야할 길』p.214.

* 위 인용문에서 중요한 표현들을 찾아보자.

→ 요셉의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행 11:29-30)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cf.→ 다르게 표현한다면, 생물학적인 부모에서 심리학적인 부모로 전환되어야 한다

→ 전인건강은 상처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상처를 다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자신이 선택하는 그 무엇이다.(클라인벨)

→ 건강이란 불완전한 사람들이 매우 불완전한 세계에 직면하여 살아가면서도 보람있고,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실존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한 방식이다.(르네 뒤보)

→ 사랑이란 삶을 움직여 나가는 힘(틸리히) ⇒ 사랑이 바로 전인건강의 핵심

→ 오직 사랑만이 생명체들을 완성하고 충족시킴으로써 그것들을 결합할 수 있다.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 하워드 클라인벨 『전인건강』

 

 

[요셉의 일관된 사랑법은 하나님의 일관됨] - 요셉의 건강한(경계선있는) 사랑법

 

오늘 나누려는 것은 요셉의 계속되는 일관된 사랑법과 이미 변화의 과정을 밟은 유다와 형제들이 자신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 요셉의 일관된 관심-정직, 진실함

(창 42: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창 42: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창 42: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 진실됨을 증명하면 죽지 않는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진실함은 요셉의 최고 관심이다.

⇒ 요셉은 3실이다. cf. 그의 장점은 단점이 된다. 권위자의 관계 안에서 제한적이다.

(창 45:5,7,8)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 이런 장단점 속에서 형제들을 시험하는 도구이며 기준은? 진실함.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 진실하지 않음=죽음?

→ 이렇게 '진실'에 대한 일관된 그의 관심은 형제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Q. 그들은 정직했는가? 지금 그들은 정직한가? 어떻게 무엇이 그들을 정직하게 했는가?


* 요셉의 책망

(창 44:14-15)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 유다의 대답

(창 44: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 정직을 나타내다. : 차다크(צדק) 의롭다, 진실이 입증되다. → 요셉의 주문은 정직이었다.

-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


* 요셉의 계속되는 시험

(창 44:17)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 44:17) 『요셉이 말하였다.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이 잔을 가지고 있다가 들킨 그 사람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돌아가거라."』

⇒ 요셉이 보려는 일관된 시험인 ‘정직’은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여전히 정직을 선택하는지 보려는 것이다.


* 유다의 간청

(창 44:18-34)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가려 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 유다는 말한다. 막내 아우를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 때문에 아버지에게 말하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왜인가? 그것은 야곱이 27-29에서 말하듯 그들이 보기에도 ‘아버지와 아이는 서로 묶여 있음’(30)을 말한다. 그럼 아버지는 죽게 되고 자신들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아우를 데려가지 못하여 아버지에게 그런 재난이 미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한다.

→ 유다는 왜 대신하면서까지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는가?

⇒ 유다의 일관된 모습은 무엇인가?

⇒ 곧 요셉의 고백처럼 그를 이집트로 보낸 것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처럼,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 자신도 변하고 그 형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그릇을 준비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형들을 변화시키셨고 아버지에 대한 본심을 보게 했다.


[정리]

지금의 요셉을 있게 하고 그의 삶의 기준이며 근거인 ‘정직 진실’은 그렇지 않은 형들을 시험하는 기준이 된다.

cf. 요셉이 확인한 것 -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요셉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고 그 편애의 대상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 편애는 더욱 심해져서 야곱의 생명과 죽음이 베냐민과 묶여 있다고 한다.

요셉의 시험과 상관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표현대로 정직해져 있었고 베냐민을 대신할 정도로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 요셉의 일관된 정직의 관심과 삶, 형들의 변화된 정직의 삶은 그들을 향한 일관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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