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11.09.07 성경인물 17. 라헬과 레아
  2. 2011.06.08 성경인물 16. 야곱 - 이집트 속에 야곱
  3. 2011.04.13 성경인물 16. 야곱 - 요셉 속에 야곱
  4. 2011.03.16 성경인물 16. 야곱 - 세겜에서 벧엘로 집으로
  5. 2011.01.28 성경인물 16. 야곱 - 하나님과 함께 고향으로

성경인물 17. 라헬과 레아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1. 9. 7. 14:45
야곱은 라헬을 만나 사랑하고, 하나님은 레아를 보신다 

출산을 통해 보는 라헬과 레아의 갈등 1

[야곱은 라헬을 만나 사랑하고, 하나님은 레아를 보신다]

* 야곱의 상황

장자의 축복기도 이후 형의 분노를 피해 외가로 피신한다.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가나안의 브엘세바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까지 이동한다.(약 800km, 하루에 40km를 걸어도 20일정도 걸린다.)

하란에 도착하여 목자들을 만나다(29:1-8, 라반을 아냐고 묻자 라헬이 양을 몰고 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 라헬을 만나다.

(창 29:9-12)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창 29:9-12) 『[9] 야곱이 목자들과 말하고 있는 사이에 라헬이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끌고 왔다. 라헬은 양 떼를 치는 목동이었다. [10]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가 치는 양 떼를 보고는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어 외삼촌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1] 그러고 나서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기쁜 나머지 큰소리로 울면서 [12] 라헬의 아버지가 자기의 외삼촌이라는 것과, 자기가 리브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라헬에게 말하였다. 라헬이 달려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 라헬을 만난 야곱의 행동 순서

야곱이 목자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라헬이 아비의 양과 함께 오는 것을 본다.

돌을 옮기고 물을 먹인다.

③ 라헬에게 입맞추고 운다.

④ 자신을 소개한다.


cf. 창 24:15-에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물항아리를 메고 왔고 아브라함의 종의 낙타에게도 물을 준다. 리브가의 물항아리와 라헬의 양을 치는 것은 당시의 생활방식과 여성의 노동력을 보여준다.

▷ 라헬은 돌을 옮기고 물을 먹이는 야곱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 야곱의 첫인상에 당황했을 것이다. 한달 가까이 홀로 여행을 한 상태로 양들에게 물을 먹인다.

→ 야곱의 자기소개에 놀랐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과 혈육이라는 것이다.

⇒ 라헬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알린다. 라헬에게 있어 야곱의 첫만남은 인상적일 것이다.


* 야곱의 연애와 7년봉사(창 29:13-20)

(창 29: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 라반은 야곱을 만나고 한달이 지난 후에, 노동의 보수를 주겠다고 한다.

(창 29:17-18)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노동하겠다고 한다.

(창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 야곱의 사랑은 7년이 며칠같이 여기게 한다.

→ 야곱의 사랑의 깊이는? 일반적인 지참금으로 보통 2-3년인데 라헬을 위해서는 7년을 약속한다.

⇒ 라헬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7년을 즐겁게 보내는 야곱을 보면서, 라헬에게 7년의 연애기간은 어떤 마음일까?

⇒ 레아는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오히려 시력이 약하다고 멀리하는 야곱을 보면서, 7년 동안 사랑받는 라헬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 야곱은 왜 라헬을 사랑하는가?

(창 29:16-17)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 야곱의 판단 - 레아는 시력이 약함을 거절의 이유로, 라헬은 아름답다는 이유로 선택한다.

cf (창 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 레아의 시력에 대해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이삭의 시력이 없음을, 즉 자신의 상황을 직면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라헬을 아름답게 본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와 같이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과 동시에 자신이 있기를 바라는 곳이 그 사랑의 자리임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 결혼(창 29:21-30)

(창 29: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 7년이 지나고 라반에게 약속이행을 요구한다.


(창 29: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 라반은 공개결혼을 준비한다.

cf. 자신의 결혼이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했을 라헬과 그것을 바라본 레아는 각각 어떤 마음일까? 서로 상반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창 29: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 라반은 자기마음대로 레아를 들어가게 한다. 딸들의 의견은 전혀 묻지도 개의치 않는다.

⇒ 라헬은 7년을 기다린 결혼이 한순간 레아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레아는 라헬의 결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자신의 결혼이 되는 것을 보면서 이 상황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 야곱에게도 자신에게도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기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왔을까? 분명한 것은 처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라헬은 처음부터 아버지가 약속을 지킬지 걱정이었을 것이다.

⇒ 가부장적 분위기와 가정의 결정권자인 라반에게 딸들은 어떤 표현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대로 따르는 익숙함을 보인다.


(창 29:26-27)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 외삼촌의 속임에 따지는 야곱에게 지역관행과 7년을 다시 요구한다.


(창 29: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 야곱은 라반에게 따져 보기도 하지만 라반의 요구에 따른다.


cf. 야곱은 바르지 않은 요구에도 왜 그대로 할까? 순응이 익숙하다면 언제부터 그러했을까?

→ 거짓으로 축복기도를 가로챌 때(바르지 않은 어머니의 교육에도)

① 리브가가 야곱에게 에서로 변장하고 이삭에게 들어가 축복기도를 받으라 요구한다.(27:6-10)

② 야곱은 리브가의 계획이 처음에는 불가능을 말한다.(27:11-12, 불합리가 아니다.)

③ 그러나 야곱은 리브가가 준비한 음식을 들고 이삭에게도 들어간다.(27:18-19)

→ 야곱에게 떠나라 할때(27:42-46)

① 리브가는 야곱을 죽이겠다는 에서의 분노를 듣는다.(41)

② 야곱에게 떠날 것을 설득한다.(42-46)

③ 라반의 집에 가서 아내를 취하라 한다.(28:2)

④ 이삭은 야곱을 보내고(5), 야곱은 부모의 명을 좇아 떠난다.(7)

→ 라반에게서 결혼으로 속을 때

① 라헬을 위해 7년봉사를 약속한다.

② 결혼식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

③ 라반은 지역관행을 핑계로 7년봉사를 더 요구한다.

④ 야곱은 그대로 하여 7일을 채우고 라헬과 결혼을 한다.

∴ 공통점 1 : 불합리에 반응하는 것같지만 야곱 개인의 욕구때문에 끝까지 주장하지 않는다.

→ 축복기도, 자신의 안정과 결혼, 라헬을 원하기에

∴ 공통점 2 : 라반의 두 딸도 순응적이다. 다른 반응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따른다.


(창 29: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창 29:30) 『야곱이 라헬과 동침하였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다. 그는 또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의 일을 하였다.』

→ 이후 결과 : 라반이 원하는대로 결혼은 시켰지만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으로, 라헬은 계속 사랑받는 여인이 된다. 이 관계는 계속된다.

→ 라헬을 위해서는 14년을, 레아를 위해서는 0년을 사용했다.

cf. 라헬과 레아는 사랑받고 못받음에 대해 각각 어떤 마음일까? 또 서로를 향해 어떤 마음일까?


* 12아들들의 출생(29:31-30:24)

→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는 아들을 낳음으로 남편의 사랑을 원한다.

→ 남편의 사랑을 받지만 아들이 없는 라헬은 경쟁의 마음으로 힘들어 한다.


(창 29: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 29:31) 『주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셨다. 라헬은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나,』

- 사랑받지 못함 : 키 세누아() ‘세누아’는 ‘가증히 여기다, 싫어하다’는 ‘사네’()의 분사수동태. 단순히 사랑받지 못함을 넘어 적극적으로 미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 아카르(), 뿌리를 뽑다, 힘줄을 끊다. 뿌리를 뽑힌 나무처럼 결실을 맺지 못함을 의미한다.

⇒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라헬은 자녀가 없다. 레아는 남편의 감정에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이 아들들의 이름으로 표현된다.

- 보시고 : 라아()-(사물을 눈으로) 보다, 쳐다보다, (상대방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섬세하게 잘 알고 충분히) 이해하다, 알다.

- 그의 태를 여셨으나 : 직역 ‘그리고 그가 여셨다’, 파타흐() 열다, 풀다, 시작하다.

→ 보시고 여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야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레아의 처지와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시고, 레아의 막힌 삶을 풀어주신다. 창세기기자는 레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모친명

연령순

축복순

르우벤

레아

보라! 아들이다.→

괴로움을 돌아보신다

1

1

시므온

들으신다

2

2,3

레위

더불어 연합한다

3

유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4

빌하

재판장

5

7

납달리

겨룸, 씨름

6

10

실바

복됨

7

8

아셀

기쁨

8

9

잇사갈

레아

값,보상

9

6

스불론

더불어 거함

10

5

요셉

라헬

더하다

11

11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

12

12


[정리]

① 야곱이 라헬을 만나고 사랑하며 14년을 봉사한다.

② 라반의 임의적인 행동에 그대로 따르는 순응적 모습을 보인다.

③ 하나님은 레아를 보시고 태를 열어주신다. 레아가 가장 바라고 필요한 것을 주셨다.

 

[출산을 통해 보는 라헬과 레아의 갈등 1]

주부에게 명절은 어떤 날인가? 행복한 날인가 고역의 날인가? 단지 해야할 노동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지 않지만 오고가는 감정의 관계 때문에 힘들다. 수년동안 쌓인 사건들과 감정들, 말한마디들로 인한 상처들.. 자신들의 상황들, 며느리로서의 상황, 남편과 자녀들의 모습들, 자기 어깨를 펴지 못하게는 하는 이런저런 일들..

오늘 우리가 나눌 사람은 친 자매이면서도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모습이다. 굳이 표현하지만 사랑받는 아내와 그렇지 않은 아내, 자식을 낳은 아내와 그렇지 않은 아내.. 과연 이 둘은 어떻게 지낼까? 잘 지낼까요, 자매로의 관계에서 한 남자의 아내들로 상황과 관계가 어떨까?

우리는 이 둘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왜인가? 누구때문인가? 야곱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어서 인가?

12아들을 낳으면서 이 둘은 어떤 감정적 표현을 할까? 지난주 우리가 나눈 부분은, 야곱이 라헬을 만나 사랑하지만,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들은 굉장히 순응적이다. 결혼생활에서 갈등은 12아들을 낳는 과정에서 표출된다. 이것을 표로 만들면 이렇다.

 

모친명

연령순

축복순

르우벤

레아

보라! 아들이다.→

괴로움을 돌아보신다

1

1

시므온

들으신다

2

2,3

레위

더불어 연합한다

3

 

유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4

빌하

재판장

5

7

납달리

겨룸, 씨름

6

10

실바

복됨

7

8

아셀

기쁨

8

9

잇사갈

레아

값,보상

9

6

스불론

더불어 거함

10

5

요셉

라헬

더하다

11

11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

12

12


(창 29: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 29:31) 『주께서는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셨다. 라헬은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나,』

→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고 하나님은 그런 레아를 보시고 자녀를 주신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게 자녀출산은 무엇일까? 유일한 방법이다.

→ 그러나 라헬은 불임이다. 사랑받는 여인에게 당시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완벽하지 못한 불안이다.


* 레아는 4남을 낳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표현한다.

(창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 르우벤 : "주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

→ 레아는 자신이 괴롭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다며 남편의 사랑을 기대한다.


(창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 시므온 : "주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

→ 레아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처지를 들으셨다고 한다.


(창 29: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 레위 :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

→ 레아는 남편이 자신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를 매우 바란다.


(창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 유다 : "이제야말로 내가 주를 찬양하겠다."

→ 레아는 남편에 대한 표현없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 4아들을 낳으며 레아는 어떤 감정과 고백을 하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괴로움을 보시고 사랑받지 못함을 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보고 들었다는 것으로 그만큼 괴롭다는 것과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은 남편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두 아들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시간의 표현 : 이제는(르우벤), 지금부터(이제는, 레위), 이제는(이제야말로, 유다) → 이전에는 너무나 힘들었던 상황(남편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는 레아의 바램

야곱의 특수성(성장과정)을 전혀 모른채 일반적인 이해와 자신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있다.

④ 유다(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를 낳을 때 레아의 마음은 무엇일까?

  → 이제 남편은 안보고 하나님만 보겠다? 4명이나 낳았으니 남편오는 것은 시간문제? 자녀가 없는 라헬을 이겼다? 적어도 라헬보다는 유리한 위치이다?

⑤ 레아의 특징은 남편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하나님 안에서 고백하려 한다.(라헬의 고백과는 너무나 다르다)


* 이렇게 4아들을 낳는 동안 라헬은 어떤 감정과 행동을 하는가?

특징 : 레아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드러냈다면 라헬은 남편에게 말한다.

시기한다.

(창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 30:1) 『라헬은 자기와 야곱 사이에 아이가 없으므로 언니를 시새우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 좀 낳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 

- 시기하여 : 카나() 마음 속의 질투심과 함께 흥분된 감정이 성을 내는 외적 표현까지 드러내는 아주 강렬한 표현이다. 시기하는 이유는   자신은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언니 레아가 출산을 거듭함으로 불쾌한 감정을 외부로(남편에게) 발산했음을 보여준다.

- 시새우다 : 저보다 나은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다.

- 내가 죽겠노라 : 직역 ‘이미 죽었다. 바로 내가 그 죽은 여자다’

→ 자식낳기 경쟁에서 실패함으로 아내의 위치와 남편의 사랑도 빼앗길 것임을 나타내는 절박한 표현이다.


▷ 질투의 4가지 형태

질투의 형태

매커니즘

연관된 생각

분노

좌절

지위훼손

이따 두고 보자

내게 어떻게 이럴수가!

자기가 뭔데?

두려움

실연에 대한 근심

만일 내 곁을 떠난다면 어떡하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슬픔

자아평가에 대한 훼손

버림받은 느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를 어쩌나.

어떻게 그 사람 마음을 붙잡아 둘수 있을까?

수치심

질투를 한다는 수치심

패자가 된다는 수치심

비루한 감정이다.

나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병리 이론에서 공격성에 대한 부분

1) 시기심(envy)과 탐욕(greed)

시기심은 타고난 공격성의 심리적 표현이다. 탐욕의 목적은 대상이 지니고 있는 풍요로움을 차지하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탐욕으로 인한 손상은 의도적인 파괴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시기심의 직접적인 목적은 대상이 가진 풍요로움을 파괴하는 것이다.

2) 시기심(envy)과 질투(jealous)

질투는 좀 더 성숙한 감정으로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질투는 욕망하는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쟁자를 증오하는 것이다. 질투심은 대상이 가진 좋음을 인정하고 견딜 수 있다.

시기심은 질투보다 더 원초적인 감정이다. 시기심은 대상이 가진 좋은 것을 견딜 수 없으며 망쳐버리려고 한다.

3) 시기심과 죽음 본능

죽음 본능이 주체의 생명을 증오하는 충동이라면, 시기심은 주체에게 생명을 제공하거나 지원해주는 외적인 대상을 증오하는 것이다. 이것은 증오를 외부 대상에 전가하고, 그 대상이 주체가 살아있는 것을 증오한다고 여기는 전략과 대조를 이룬다.

유아는 어머니가 제공하는 음식, 사랑, 안락함이 외부에 있으며 자신은 이것에 의존하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면서 시기심으로 반응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바깥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좋은 젖가슴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갖게 된다. 시기심은 좋은 대상을 공격하고 파편화함으로써 나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혼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많은 정신병적 혼동의 근원이기도 하다.

4) 시기심의 극복

원초적인 자기 파괴성(죽음 본능)은 생명을 주는 외부 원천에 대한 증오(시기심)를 거처 질투심으로 나아간다. 질투심은 좋은 대상과 관계하면서 수정될 수 있고 건강한 경쟁으로 발전될 수 있다.

공격성을 극복하는데 좋은 대상(좋은 젖가슴)의 내사가 중요하다. 시기심은 좋은 대상 경험이 가져다 주는 사랑과 감사에 의해 극복된다.

선천적으로 과도한 시기심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 또 좌절에 의해 시기심이 강화된다. 시기심은 좋은 대상을 평가절하하고 망쳐놓기 때문에 시기심이 과도하면 좋은 대상의 내사 과정을 방해한다. 그 결과 자아가 허약해지며 허약해진 자아는 다시 시기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5) 부정적인 치료반응

왜 어떤 환자들은 분석을 통해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도 얻지 못하는가?

클라인에 따르면 부정적인 치료반응은 치료자가 지닌 '좋음' 자체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환자는 분석가가 지닌 잠재적인 선함, 능력, 사랑을 시기한다. 환자가 분석가에게 저항하는 것은 분석가가 지닌 힘과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모든 해석은 쓸모 없거나 환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환자는 시기심을 사용하여 모든 희망을 체계적으로 파괴한다. 클라인은 분석가가 시기심의 작용을 해석함으로써 분석상황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시기심의 파괴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③ 야곱이 분노하자 빌하를 부인으로 준다. 자식을 원한다.

(창 30: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 라헬은 인간의 힘을 빌어서 명예를 회복하려고 하고, 그 인간적 수단을 맹신한다.


④ 인간적인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

(창 30:5-6) 『[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 단 : "하나님이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나의 억울함을 들어 주시려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 단 : ‘정당성을 입증하다, 판단하다’의 띤()에서 나온 말 → 라헬은 단을 통해 자신의 수치에서 벗어나고 진실함을 입증하려 했다. 빌하의 임신과 출산은 라헬에게 특별한 의미이고 자기중심적이다.

→ 라헬의 자기해석은 ‘억울함’이다. vs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 하나님을 말하지만 신앙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억울함과 호소를 표현하는 도구로 삼는다. 라헬의 호소는 기도일까?


(창 30:7-8)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 납달리 : "내가 언니와 크게 겨루어서 마침내 이겼다."

→ 단을 통해 자신의 수치(억울함, 호소)를 없앴다는 라헬에게 납달리는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말한다.

→ 라헬은 자신의 경쟁자가 언니라고 할 정도로 극심하게 뒤틀린 감정과 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빌하를 통한 2번의 출산은 경쟁대상인 언니를 이겼고 이제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하면서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그동안 레아가 바라보는 대상은 남편이다. 그러나 라헬이 바라보는 대상은 언니이다. 그 언니에 대해 경쟁관계로만 보는 라헬의 표현은 자신이 이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이다. 그동안 신앙으로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던 레아를 이 싸움(경쟁)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신도 여종을 야곱에게 주게 된다.

 

[출산을 통해 보는 라헬과 레아의 갈등 2]

지난주에 나눈 것은 레아가 4남을 낳으며 마음의 변화, 그것을 보는 라헬의 시기의 마음과 빌하를 아내로 주는 마음, 시기의 마음은 상대를 힘들게 한다.

①대상이 가진 풍요로움을 파괴하는 것

②대상이 가진 좋은 것을 견딜 수 없으며 망쳐버리려고 한다.

③좋은 대상을 공격하고 파편화함으로써 나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에 오늘 나눌 부분은 경쟁 속으로 들어온 레아의 마음은 어떨까?


* 경쟁으로 들어온 레아

(창 30: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창 30:9) 『레아는 자기가 다시는 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기의 몸종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 라헬의 경쟁을 본 레아는 ‘이제는 남편이 오겠지’했던 레아는 불안해지고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한다. 이는 계획적인 행동이 아닌 불안에서 나온 것으로 신앙 속에 덮혀 있던 감정이 나타난다.

cf. 두 부인의 경쟁 속에서 야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야곱은 두 자매간의 불화와 긴장을 잠재우기 보다는 오히려 방관하고 있다. 이는 사라와 하갈의 관계에서 보였던 아브라함의 모습과 같다. → 그러나 이 과정으로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된다.


(창 30:10-11)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 갓(가드) : "내가 복을 받았구나" 행운, 복됨 → 실바를 통해 새롭게 아이를 얻은 레아는 기쁘고 만족스러움을 표현한다.


(창 30:12-13)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 아셀(아쉐르) : "행복하구나, 여인들이 나를 행복하다고 말하리라" 기쁨, 행복, 흡족함

→ 갓과 같이 레아의 감정이 계속 아들을 얻음으로 지극히 흥분되고 만족스러웠음을 보여준다.

-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 ‘왜냐하면 여인들이 나를 행복하다고 부를 것이기 때문에’

⇒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고, 그것을 신앙으로 표현하지만, 라헬의 시기와 경쟁은 레아도 반응하게 한다. 다만 경쟁속에서도 레아의 반응은 평안과 기쁨, 긍정적이다.

cf. 왜 레아는 라헬과 달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까? 아버지 반응과 그 경험이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 레아와 라헬의 직접적인 대면

(창 30: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창 30:14) 『보리를 거두어들일 때에, 르우벤이 들에 나갔다가, 자귀나무를 발견하여,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다 주니, 라헬이 레아에게 말하였다. "언니,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를 조금만 나눠줘요."』

- 합환채 : 옛날 히브리인들은 이 식물을 최음제, 강장제, 임신촉진제로 믿고 있었다.

→ 임신을 원하는 라헬은 자신의 바램(욕구)을 채우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창 30: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창 30:15) 『레아가 라헬에게 말하였다. "내 남편을 차지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냐? 그래서 내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까지 가져 가려는 것이냐?" 라헬이 말하였다. "좋아요. 그럼, 언니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를 나에게 주어요. 그 대신에 오늘 밤에는 그이가 언니하고 함께 자도록 하지요."』

-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 합환채를 달라는 동생의 모습에서 드러난 레아의 마음은?

①불안한 라헬은 자신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하려고 한다.

②라헬은 레아의 것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 레아에게 영향을 주려 한다.

③‘내 남편’이란 표현으로 원래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④자신은 라헬에게 빼앗기는 위치에 있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감정의 폭발

⑤만약 직접적인 남편을 표현했다면 감정을 감추었을 것이나 매개물이 나오자 자신의 그동안의 감정을 순간적으로 표출한다.

⑥라헬의 시기와 흔들어 놓음에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말한다.

- 합환채 대신에 오늘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 라헬 역시 불안하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얻으려 한다. 이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도덕적인 수치나 거부감도 없이 부도덕하고 성결치 못한 매매를 하고 있다. 불안한 레아도 이에 동의하게 된다.

⇒ 라헬도 레아도 심리적으로 불안하다. 불안은 안정을 바라고 이것은 객관적인 ‘옳고 좋음’보다 주관적인 이익, 즉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라헬의 반응과 레아의 반응은 차이를 보인다.


(창 30: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창 30:16) 『그 날 저녁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레아가 그를 맞으러 나가서 말하였다. "당신은 오늘 밤에는 나의 방으로 드셔야 합니다. 나의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를 라헬에게 주고, 그 대신에 당신이 나의 방으로 드시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야곱은 레아와 함께 잤다.』

- 내게로 들어오라 : ‘당신은 내게로 들어와야만 한다’는 뜻으로 요청이 아닌 강한 명령조.

→ 야곱이 라헬보다 레아에게 남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레아도 이것을 알기에 거래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 ‘내가 확실하게 당신을 샀기 때문이다’

→ 레아는 자신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만큼 오늘밤 남편과 동침할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 야곱의 편애, 라헬의 경쟁시기심, 레아의 불안 등은 가정의 분위기를 부도덕적이고 성결치 못한 매매(거래)까지 행하게 한다.

cf. 야곱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의 마음은 나오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외상으로) 레아에 대해 관계와 책임이 소홀했다는 것과 (그간 라반의 약속불이행때문인지) 거래를 깨지 않는다는 것이다.


* 레아의 2남 1녀

(창 30:17-18)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창 30:17-18) 『[17] 하나님이 레아의 호소를 들어 주셔서, 레아가 임신을 하였고, 야곱과의 사이에서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18] 레아는 "내가 나의 몸종을 나의 남편에게 준 e값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구나.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하였다. (e. 히, 사갈)』

-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 ‘하나님이 레아를 염려하여 듣다’

→ 레아에게 남편은 자신에게 소홀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cf. 하나님은 라헬보다 레아에게 더 마음을 주시는가? 뒤에 하나님은 라헬을 생각하시고 태를 열어주신다. → 하나님의 뜻(시기와 방법과 과정 등)을 우리는 모른다.

- 잇사갈(잇사스카르) : ‘있음,존재,있다’의 ‘예쉬’ + ‘빌리다, 매수하다’의 사카르 → ‘보상이 있다, 값이 있다’

→ 레아는 자신이 실바를 야곱에게 주고, 합환채로 거래함으로 아들을 얻었다고 생각함을 암시한다.


(창 30:19-20)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창 30:19-20) 『[19] 레아가 다시 임신을 하여서 야곱과의 사이에 여섯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20] 레아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셨구나. 내가 아들을 여섯이나 낳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남편이 나에게 잘해 주겠지.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하였다.』

-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 후한 선물 -하나님편에서 선하고 충실하고 온전한 선물이고 레아에게는 기쁘고 형통하고 넉넉한 선물로 받아들여진다.

- 스불론(제불룬) : ‘누구와 같이 거한다’의 ‘자발’, 이는 ‘경계를 만들다, 경계를 정하다’는 의미로 발전하여 ‘경계안에 함께 동거한다’ 즉 자신이 얻은 자녀로 기쁨과 함께 남편도 돈독해질 것을 기대하는 레아의 마음이 표현된다.


(창 30: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창 30:21) 『얼마 뒤에 레아가 딸을 낳고 그 아이 이름을 디나라고 하였다.』

- 디나(띠나) : ‘심판, 판단, 변호’라는 뜻의 ‘단’()

cf. 다른 딸들도 있었다? 디나를 기록한 것은 34장의 상황을 위해..

(창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 46: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 처음 4남때와 달리 실바의 2남과 자신의 2남은 라헬의 경쟁모드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 경쟁모드의 원인은 야곱의 사랑을 원하는 레아의 마음과 자신의 것을 빼앗는다고 보이는 라헬에 대한 반응에서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 라헬의 요셉출산

(창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창 30:22) 『하나님은 라헬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라헬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 단순히 기억을 되살린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이 깊이 통촉하시고 친히 돌보신다는 의미이다. 아들이 없어 심히 번민하며 애통해 하는 라헬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신다는 것이다.

→ 라헬은 분노표출과 경쟁시기심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깊은 마음 속의 애통하는 마음을 보신 것이다.

-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 17절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 17절과 같은 표현으로 레아에 대해 염려하듯 라헬도 염려하신다. 레아와 라헬의 과정은 다르지만 그들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동일함을 보여준다.

-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 31절 ‘그의 태를 여셨으나’ 와 같은 표현, 파타흐() 열다, 풀다, 시작하다.

→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레아처럼 라헬도 태를 열어주신다.

cf. 31절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 아카르(), 뿌리를 뽑다, 힘줄을 끊다

→ 뿌리를 뽑힌 나무처럼 결실을 맺지 못함을 의미한다.


(창 30:23-24)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30:23-24) 『[23] 그가 임신을 하여서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벗겨 주셨구나"하고 생각하였다. [24] 라헬은 그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에 주께서 나에게 또 다른 아들 하나를 더 주시면 좋겠다 하는 뜻으로 그 아이 이름을 g)요셉이라고 하였다. (g. 더하다)』

-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느끼는 마음은 ‘부끄러움’이다. 그녀는 이것을 위해 빌하나 합환채거래라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씻어주었다고 고백한다.

cf. 만약 빌하대신 자신이 출산을 했다면 그 아이의 이름이 요셉보다는 단이나 납달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라헬이 출산한 아들의 이름이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과정이 지나며 자신의 경쟁보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라헬을 생각하신 결과가 아닐까?

- 요셉(요쎄프) : 이름에는 ‘씻다, 치워버리다’의 ‘아싸프’와 ‘더하다’의 ‘야싸프’의 뜻이 있다. 즉 라헬에게 요셉은 부끄러움을 씻어주는 존재이면서 더 받기를 원하는 라헬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이름이다.


(창 35:16-18)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베노니(뻰오니) : ‘아들, 자식’의 뻰 + ‘나의 불행, 슬픔’의 ‘오니’ - 나의 불행의 자식, 나의 슬픔의 자식 → 난산으로 인해 죽음에 임박한 라헬이 슬픔가운데 지어준 이름

- 베냐민(비느야민) : ‘아들,자식’의 ‘뻰’ + ‘오른손’이란 ‘야민’ - ‘오른손의 아들’ → 고대근동사람들은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에 야곱은 12번째 태어난 아들의 삶이 행복하고 능력있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쳐 지었다.


[정리]

①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바라보지만 그렇지 않아 괴로워한다. 이를 출산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이후 라헬의 인간적인 방법은 레아를 다시 그 경쟁속으로 들어가게 했고 자신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복됨과 기쁨’을 표현한다. 그러나 레아에게 라헬은 자신의 것(내 남편)을 빼앗는 대상으로 보며 감춰두었던 감정을 표출시킨다. 이후 얻은 아들은 자신을 보상하고 선물이라고 마음을 표현한다.

② 사랑을 받으나 자녀가 없는 라헬은 레아의 출산을 보며 자신은 자녀가 없음에 자신의 감정을 ‘시기’를 통해 드러낸다. 이후 라헬은 빌하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억울’함으로 해석하고 경쟁하여 이기려 하고 있음을 보인다. 이후 계속되는 언니의 출산에 힘들었으나 요셉을 통해 ‘부끄러움’의 마음이 씻어지면서도 동시에 더 얻기를 원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마지막 베냐민을 출산하면서 슬픔 속에서 사망한다.

③ 야곱은 라헬의 반응에 분노하지만 이후 순응적이 된다. 야곱은 엄마 닮아 좋은 라헬을 사랑하지만, 엄마처럼 쟁취하고자 하는 라헬로 힘들어한다.

④ 하나님은 두 여인의 소원을 들으신다.(17,20) 야곱은 부인들의 갈등에서 조정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상처는 하나님이 풀어주신다. 그 하나님이 레아와 라헬을 생각하시고 태를 열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신다.

 

[귀향을 결정하다]


출산기록이후

30:25-36 고향으로 가려는 야곱과 새계약을 맺는 라반

30:37-43 야곱의 재산이 많아지다 → 이전은 라반의 양을 치는 것이고, 이제는 자신의 재산이 되는 것. 이 기간을 6년으로 표현한다.


* 귀향결정을 나누다.

(창 31:1-2) 『[1]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창 31:1-2) 『[1]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

→ 야곱의 귀향결정 배경은 야곱이 부자가 되자 라반의 아들들의 모함과 라반의 표정이 달라졌다.


(창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창 31:3)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조상의 땅, 너의 친족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 귀향결정의 결정적 동기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30:25에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야곱의 의견은 임의적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①돌아가라는 명령과 ②함께 한다는 약속을 주신다.


* 여기에 필요한 것은 동행인의 결정이다. 야곱은 아내들을 불러 이유와 과정을 이야기한다.

(창 31:4)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창 31:4) 『야곱이 라헬과 레아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그들을 그의 가축 떼가 있는 들로 불러내서』

→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야곱은 자신이 집에 갈 때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부른다.

cf. 라헬의 이름이 앞에 있다는 것과 라헬만 부르지 않았다.


(창 31:5-13) 『[5]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 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8]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 라반의 악한 행위 vs 하나님의 사랑

5절    야곱에 대해 안색이 변한 라반 vs 야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

6-7절 야곱을 속여 품삯을 변역한 라반 vs 야곱을 해치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8-9절 야곱의 삯을 임의로 바꾸는 라반 vs 라반에게서 빼앗아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

10-13절 꿈이야기-마음의 간절한 소망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

→ 야곱의 대조적 표현

5절 ‘그대들의 아버지’ vs ‘내 아버지의 하나님’

6절 당신들은 내가 최선을 다해 일했음을 알거야.

7절 10번의 의미는 ‘거의 매번, 기회가 있을 적마다’로 라반은 나를 속이지만 하나님이 막으셨다.

8절 라반은 계속해서 계약을 바꾸지만 그때마다 계약대로 되었다.

9절 이는 하나님이 응당 내가 받아야 댓가를 받도록 하신 것이다.

⇒ 야곱의 말에 딸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 부인들의 대답(14-16)

(창 31:14-16) 『[14]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창 31:14-16) 『[14]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얻을 분깃이나 유산이 더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5]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아주 딴 나라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파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몫으로 돌아올 것까지 다 가지셨습니다. [16]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빼앗으신 것은 다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다 하십시오."』

▷ 딸들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 평가는?

라헬과 레아가 → 계속 라헬이 앞에 있다. 적극성에서 보면 레아보다는 라헬의 표현과 입장이 더 적용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 근동지역의 관습에서 부모의 재산의 권리는 출가한 딸에게는 없다.

→ 지금까지 아버지 집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후에도 친정에 있었지만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분리적인 마음을 표출한다.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파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몫으로 돌아올 것까지 다 가지셨습니다.)

→ 14년간의 노동은 야곱의 결혼 지참금이다. 일반적인 기간인 2-3년(1명, 게다가 원하지 않은 7년을 추가강요하여 두배가 되었다)에 비해 훨씬 길다. 당시 근동풍습에 지참금의 일부는 다시 딸에게 주어 결혼밑천을 준다. 그러나 라반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마카르() 팔다, 적에게 넘기다

아칼() 먹다 삼키다. → 여기서 문법적 의미는 계속적으로

직역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팔았고 그리고 그가 또한 우리의 돈을 삼키고 삼켰기 때문이다’

→ 아버지에 대한 딸들의 평가다. 돈(소유 재물)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은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아주 딴 나라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 아버지가 자기들을 대했던 행동에 대한 감정이다. 매정하고 단절된 느낌으로 거절감이 가득하다.

cf. 과연 이정도로 라반은 매정한가? 이런 부분을 볼때 특히 레아의 의견보다는 라헬의 입장과 감정이 더 적용된 것같다. 라반도 동생 리브가가 출가할 때 며칠이라도 있기를 바랬다.

(창 24:55,58) 『[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cf. 야곱이 라헬에게서 어머니로서 리브가의 모습을 보았다면, 라반도 라헬에게서 매정한 동생으로서 리브가의 모습을 보았을 수 있다. 또한 어릴적부터 출가이후에도 레아와 라헬의 갈등을 보았다면 라헬의 아버지의 이미지와 라반의 딸(라헬)이미지는 상호적이었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1절-라반의 아들들의 시각, 라카흐()-빼앗다, 취하다, 탈취하다, 탐하다

9,16절-야곱과 부인들의 시각, 나찰()- 건져내다. 끌어내다, 빼내다, 되찾게 하다, 건져내다, 구원하다.

→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빼앗았다고 표현하지만 야곱과 딸들은 하나님이 취했다고 표현한다. 야곱과 같은 시각으로 철저히 야곱쪽에 이같은 시각을 보이고 있다.

→ 계약조건상 정당한 노동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그들은 남편을 편든다.

cf. 라헬의 도적질 - 까나브() 훔치다, 도적질하다.

(창 31: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창 31: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그러니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다 하십시오)

→ 준행하라 - 아사() 단순한 호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동조를 표현한다.


* 야곱이 떠나다

(창 31:17-20)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 야곱은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떠나고, 라헬은 라반이 없는 사이에 드라빔을 훔친다. 드라빔은 상속과 지배권을 가진다.

cf. 야곱이 이삭을 속이고 축복기도를 받듯이 라헬은 집안의 드라빔을 훔친다. 이는 야곱이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듯 드라빔으로 위기를 맞는다.


(창 31:21-24) 『[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 3일뒤 그 사실을 알게된 라반은 추격하고 하나님이 말리심을 듣는다.


(창 31:25-29) 『[25]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 야곱에게 도착한 라반은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말한다. 그러나 드라빔에 대해 말한다.


(창 31: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 라헬도 드라빔을 도적질했고, 라반도 도둑질이라 표현한다. 까나브()


창 31:31-55 이후 이야기는 라헬은 드라빔을 숨기고 라반은 찾지 못하게 되고 야곱은 그동안 힘들었던 부분을 말하면서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라반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난다.

(창 31: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정리]

라반과 아들들의 반응,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향을 결정하여 아내들과 상의한다.

라헬과 레아의 의견에는 아버지 라반에 대한 매정함과 구두쇠의 모습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은 라헬의 의견으로 보이며 경쟁에 익숙한 라헬은 단절과 분리를 보인다.

라헬은 그렇게 비난하는 아버지이지만 라반과 많이 닮았다.


[라헬과 레아의 결혼 생활과 죽음]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가정을 이끌어 갈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 결혼에서 남자의 변화보다 아내와 엄마가 되는 여자의 변화는 더 클 것같다.

지금까지 라헬과 레아는 친정에 있었다. 때가 되어 야곱이 고향으로 가려할 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그들이 동행하도록 결정하게 했다. 실제 이후의 삶은 야곱과 요셉을 중심으로 쓰여지고 있기에 라헬과 레아가 어떠했는지는 알수 없다. 그저 그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 마음, 생각이었겠다고 추측만 가능할 것같다. 과연 그들의 결혼생활에는 어떤 일이 있고 그 삶은, 이들에게 펼쳐진 미래는 행복할까? 좋은 일보다 힘들게 하는 일, 위기의 연속이 아닐까? 출발부터 위기이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 라반의 추격

31장 라헬은 야곱도 모르게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한다. 라반은 레아의 장막도 라헬의 장막도 들어가 찾는다. 라헬은 라반을 속여 위기를 모면한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고향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는 것은 훗날을 위함인가? 아무것도 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인가? 아님 나름 잘 살아보려고 한 것인가?

(창 31:14-16) 『[14]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cf. 야곱도 장자 축복권을 추구했고 이로 인해 형으로부터 죽음의 위협과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창 31: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창 31:32-35)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 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 이렇게 해서 라반과 야곱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도둑질한 드라빔은 효력을 상실했다.


32장 마하나임(1-2). 야곱이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다.(3-12) 예물을 나누어 보내다.(13-23) 얍복나루에서의 씨름(23-32)

(창 32: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 야곱은 모든 예물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가족들도 나루를 건너게 하고 홀로 남는다.

① 지금까지 사랑받기 위해 자매간에 갈등의 원인이었던 남편이, 결국 자신만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에 대한 감정은 어땠을까? 특히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반감으로 함께 남편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만 남고 자기들에게 건너가라 했을 때 감정은 어땠을까? 실망일까 안타까움일까?

② 예물에 이어서 마지막 건널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야곱에 전달된 감정은 에서가 죽일 수 있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일까?


33장 야곱이 에서를 만나다.

(창 33:1)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 강건너 홀로 있던 야곱이 어느새 건너와 가족들과 함께 하고 있다. 다시 새로운 각오를 한 것처럼 보였을 남편을 보며 아내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안정감을 가졌을까?

(창 33: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 야곱은 각각 순서를 정하고 자식들과 같이 세운다. 야곱의 행동을 보며 레아와 라헬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여전히 변함없는 야곱의 마음을 보면서 레아와 라헬은 각각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창 33:3-4)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 어제만해도 아내와 자식들 뒤에 있던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면서 그들 앞에 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아내들은 어떤 마음일까?

→ 야곱이 절하며 에서를 맞아 서로 안고 울고 있다. 형제간의 우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려워하는 야곱을 보며 안도감을 가졌을까?


(창 33:5-7)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 그동안 긴장하게 했던 에서가 자신을 보며 묻고 있다. 절을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이후 에서는 세일로, 야곱은 숙곳으로 향한다.


34장 레아의 딸 디나의 성폭행과 아들들의 복수

(창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 히위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이 레아의 딸을 성폭행한 후 통혼을 하려 한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것을 반대하고 할례를 계략으로 그들을 진멸한다.

(창 34: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이일의 주도는 레아의 아들이고 디나의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주도한다.

(창 34:30-31)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 야곱은 불안해 하고 두 아들은 분노를 표현한다.

→ 이것을 지켜보는 레아는 어떤 마음일까? 불안해 하는 야곱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아들들은 흥분해 있다. 만약 라헬이 자기 딸이었으면 어찌했을까?


* 35장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1-15), 라헬의 죽음(16-20) 야곱의 아들들(21-26) 이삭의 죽음(27-29)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 처가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이 다시 야곱을 불러 벧엘로 가라 하신다.

(창 35:2-3)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 처가에서 아내들을 불렀던 것처럼 불러서 이야기한다.

(창 35:4-5)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 라헬이 처가의 드라빔을 훔칠 때와는 반대로 우상을 정리한다. 오히려 지역민들은 야곱의 가족을 두려워한다.

→ 처가에서 나올 때처럼 새로운 결단하는 하는 라헬과 레아는 어떤 각오를 하였을까? 그동안 버리지 않은 이방신상에 대한 결단은 친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는 것일까? 가족을 위한 그들의 결정에서 가족을 향한 마음은 무엇인가? 어떤 마음으로 벧엘로 올라갔을까?

(창 35:16-20)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 라헬은 출산을 하던중 산고로 사망한다.

① 산파의 ‘두려워말라’는 당시 라헬의 마음이었을까?

② ‘또 득남하느니라’는 산고중에서도 라헬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③ 그러나 죽게 되어 마지막 순간 아들의 이름을 슬픔이란 의미로 ‘베노니’로 이름짓는 마음은 어떨까?

(창 35:19-20)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 장사지내는 것을 보며 레아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껏 경쟁과 갈등과 표현의 차이를 보였던 동생의 죽음, 여전한 삶의 상황 속에서 느끼는 레아의 마음은 어떨까?


36장은 에서의 자손, 세일의 자손, 에돔의 왕들

37장 요셉이야기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 요셉이 17세때 야곱은 다른 아들보다 더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힌다.

(창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 이어지는 요셉의 꿈이야기에 대해 야곱은 간직한다. 이때 라헬과 레아는 각각 어떤 마음일까? 여전히 사랑받고 꿈까지 꾸는 요셉을 바라보는 라헬의 마음과 여전히 자신의 아들들은 자신처럼 사랑을 받지 못함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창 37: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 요셉이 팔려가는 이야기는 33장(세겜정착)과 34장(세겜진멸) 사이이다.

(창 37:34-35)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 야곱이 죽었다는 소식에 야곱은 굉장히 슬퍼한다. 자신이 사랑한 만큼 슬퍼하는 것같다.

→ 그나마 아들 하나있는 라헬은 어떤 마음일까? 후에 아들의 죽음처럼 자신도 죽음으로 가고, 산고중에 낳은 아들도 소원대로 하나더 낳지만 자신은 죽고 태어나는 아들이라 그런지 베노니라고 한다.

→ 야곱이 죽겠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라헬이 죽었다.

→ 레아는 오랜시간 힘들어하는 라헬과 죽어가는 라헬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질까?


* 레아의 죽음

(창 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 죽음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지 않았다. 레아는 가족이 이집트로 가기전 가족묘에 묻힌 듯하다. 힘든 가족들의 상황들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을까?


38장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

39장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40장 요셉이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다

41장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

42장 야곱의 강요로 아들들이 애굽으로 가다.

43장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곱으로 가다.

44장 요셉이 형들의 형제애를 보다.

45장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히다.

46장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다.

47장 야곱 가족이 애굽에서 지내다.

48장 야곱의 요셉아들 축복기도

49장 야곱의유언과 죽음

50장 야곱의 장례와 요셉의 죽음


[정리]

① 주로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 중심의 내용이라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없다.

② 적극적이던 라헬도 직접적인 내용은 없었고, 다만 베냐민의 출생과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만 있다.

③ 레아의 조용한 성향은 모든 삶을 지켜보아야 했을 것이다.

④ 이런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그들에게 인도하셨을까?

(창 29: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 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

성경인물 16. 야곱 - 이집트 속에 야곱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1. 6. 8. 15:11

야곱과 요셉의 재회와 요셉의 가이드


야곱의 마음은 어디로?

힘내는 야곱의 고백


야곱의 축복기도


아비의 기도


야곱의 죽음과 장례식




 

[야곱과 요셉의 재회와 요셉의 가이드]

요셉의 소식을 들은 야곱은 기운이 나서 이집트로 출발한다.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은 야곱은 자신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 받는다. 이제 야곱은 이집트에 도착한다.


창 46:8-27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소개

 


* 야곱 일행이 이집트에 도착하다

(창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창 46:28) 『 이스라엘이 유다를 자기보다 앞세워서 요셉에게로 보내어, 야곱 일행이 고센으로 간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일행이 고센 땅에 이르렀을 때에,』

- 미리 보내어 : 솰라흐() 특별한 사명을 주어 보내는 뉘앙스.

→ 야곱은 유다를 요셉에게 보낸다. 르우벤이 첫째이지만 유다를 중심에 놓는다. 2차때 자신을 설득하고 모든 과정을 인솔하였기 때문일까? 다른 아들보다 인정받는 느낌이다.

→ 야곱의 주도면밀한 모습-20여년만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요셉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일단은 만나는 것에 더 우선할 것같으나 야곱은 유다를 먼저 보낸다.

→ 유다는 지금 몇 번을 다니는 길이다. 먼저 유다를 보냄을 몇 번 다닌 경험이 있고, 가족전체보다 대표가 가서 미리 알리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한다.

⇒ 야곱의 신중함이 다시 나타난다. cf. 상황과 성격은 다르나 얍복에서처럼 먼저 사람을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셉에게도 이런 신중함이 있으나 자신이 직접 나서는 가이드의 역할을 볼 수 있다.


* 고센(꼬쉔 ) - 야곱의 가족에게 새로운 정착지로 안성마춤인 땅이다.

①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목초지가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유목민인 야곱가족이 생업을 유지하기에 좋다.

②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후일 출애굽시 편리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③ 이집트 본토에서 어느정도 떨어져 있음으로 종교적 종족적으로 단일성을 유지하기 쉬운 지역이다.


-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 유다를 통해 요셉이 미리 할 일을 준비케 한다. 야곱은 요셉의 인도를 받아야하는 수동적인 입장이 되었다.

cf. 얍복에서 가족을 앞에 보내는 것과는 다르다.

cf. 예전에는 자신의 꾀에 스스로 하려 했으나 지금은 어려운 상황을 맡길 줄 아는 사람이다.

⇒ 이제 야곱은 고센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 요셉과 만나다.

(창 46: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창 46:29) 『요셉이 자기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려고 병거를 갖추어서 고센으로 갔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

-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 수레(메르카바,  병거)는 왕이 이용하는 운송수단으로 왕의 특권을 상징한다. 요셉이 병거를 탄 이유는 예의를 갖추면서 자신이 위엄과 권위를 갖추므로 이집트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무시하지 않게 하려는 효과를 원한다. cf. (창 46:34) 『...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 요셉이 야곱에게 오는 목적은 그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토록 얼마나 고대하였는지를 표현한다.

- 얼마 동안 울매

→ 울다(빠카 ) 참을 수 없이 큰 소리로 우는 울음이다.

→ 얼마동안(오드 ) 반복하여, 계속하여 → 야곱은 큰 소리로 계속하여 오랫동안 울었다.

cf. 야곱의 눈물 : 고생 뒤에 이어지는 기쁨의 눈물이다.

- 밧단아람에서 라헬을 만날 때 - (창 29: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 얍복에서 에서를 만날 때 - (창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 깊은 그리움과 고통의 시간 후 터트린 기쁨의 울음이다.


(창 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창 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

-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 죽음도 이길 수 있는 기쁨을 표현하는 수사적 표현.

cf. 요셉의 실종이후 야곱은 죽음에 대한 표현이 잦았는데 지금도 표현된다.


* 요셉의 제안과 사전준비

(창 46:31-34) 『[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창 46:31-34) 『[31] 요셉이 자기의 형들과 아버지의 집안 식구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이제 돌아가서 바로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저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이 저를 만나보려고 왔습니다. [32] 그들은 본래부터 목자이고, 집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챙겨서 이리로 왔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 둘 터이니, [33] 바로 임금께서 형님들을 부르셔서 너희의 생업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거든 [34]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 요셉은 자신이 먼저 바로를 만나 가족들을 소개하려 함을 말한다. 바로가 가족들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도록 하며 목축이라는 가업을 미리 언급함으로 목초가 풍부한 고센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 당시 이집트는 신분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고 직업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이므로 바로의 질문은 당연히 예상되는 것으로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주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 자신들은 숭배하는 소를 잡아먹기에, 농경에 종사하는 이집트인들에게 유목민은 난폭하고 침입을 했기에, 혼인도 신전참배도 금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동화되지 않게 하였다.


cf. 요셉의 모습과 야곱의 느낌

1. 다른 아들과 달리 요셉은 알아서 준비한다.

(창 42: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자신과 다른 것을 본다.

- 형을 만나기전 (창 32:17-18)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 2차여행때 (창 43: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 선물공세 위주의 야곱과 달리 요셉은 가족들의 정착을 위해 가이드를 해준다.

3. 요셉은 바로에게 직접 나아가서 아뢴다.

(창 46: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창 47: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아뢰다(나가드 )-작위적으로 의도하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로에게 간다.

cf. 야곱은 선물공세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면, 요셉은 직접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 알아서 잘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야곱이 드는 마음은?


Q. 무엇이 요셉이 어려운 상황에서 극복하고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Q.→ 이삭의 사랑을 받은 에서, 야곱의 사랑을 받은 요셉?


* 요셉의 야무진 일처리(신중하고 주도적인 실행)

(창 47: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창 47: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아뢰었다. "저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소 떼와 양 떼를 몰고 모든 재산을 챙겨가지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지금은 고센 땅에 와 있습니다."』

→ 가족들이 모든 재산을 가져왔고 고센땅에 있음을 바로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말한마디를 함에 있어 신중하고 주도적이고 침착함을 보인다.


(창 47:2)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창 47:2) 『요셉은 형들 가운데서 다섯 사람을 뽑아서 바로에게 소개하였다.』

→ 선택의 기준은 알 수 없으나, ‘5’는 이집트에서 존중을 나타내는 숫자. 요셉의 준비성.

→ 절대군주인 바로와 알현하는 것은 요셉이 이집트의 실권자임을 보여주는 것


(창 47:3)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창 47:3) 『바로가 그 형제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생업이 무엇이오?"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의 종들은 목자들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예상된 질문과 준비된 대답


(창 47: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창 47:4) 『그들은 또 그에게 말하였다. "소인들은 여기에 잠시 머무르려고 왔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심하여 소 떼가 풀을 뜯을 풀밭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소인들이 고센 땅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 형들은 직접적이고 당당하게 요청한다. cf. 원래 야곱과 아들들은 우회하는데 요셉의 정직성을 따라 배운다.


(창 47:5-6) 『[5]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창 47:5-6) 『[5] 바로가 요셉에게 대답하였다. "그대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그대에게로 왔소. [6] 이집트 땅이 그대 앞에 있으니 그대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곳에서 살도록 거주지를 마련하시오. 그들이 고센 땅에서 살도록 주선하시오. 형제 가운데서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그대가 알면 그들이 나의 짐승을 맡아 돌보도록 하시오."』

→ 바로의 허락으로 공식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cf. 원래 야곱과 아들의 습성대로라면 어려웠을 것이나 요셉의 가이드로 가능했다.


(창 47: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창 47:7)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와서 바로를 만나게 하였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나니,』

→ 5인 대표에 이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소개한다.

→ 야곱의 첫 행위는 축복하기였다. 축복하다(바라크 ברך)는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찬양하다’로 단순한 인사나 존경을 표하는 것 이상이다.


(창 47:8-9)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 47:8-9) 『[8] 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9]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 내 나그네 길의 세월 : 머무름의 년들의 날들

→ 과거의 삶을 통해 그가 느끼는 ‘순례자로서의 삶’에 대한 인식

- 험악한 세월 : 험악한(라아 רע)-일반적으로는 ‘나쁘다’는 의미이나 단순히 좋지 않음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감정적인 고통을 가리킬 때나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가리킬 때도 쓰인다.

→ 장자권을 획득하려는 성공의 욕심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상의 삶에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같이 고백하고 있다.


(창 47: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 47:10) 『야곱이 다시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물러났다.』

→ 야곱의 마지막 행위도 축복하기였다.

cf. 자신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를 고백하는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창 47:11-12) 『[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12]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창 47:11-12) 『[11] 요셉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을 이집트 땅에서 살게 하고, 바로가 지시한 대로 그 땅에서 가장 좋은 곳, 라암세스 지역을 그들의 소유지로 주었다. [12] 요셉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과 아버지의 온 집안에 식구 수에 따라서 먹을거리를 대어 주었다.』

→ 야곱 가족의 정착과 요셉의 부양


[정리]

① 야곱의 변하지 않는 습성 vs 요셉의 준비된 가이드

② 인생을 바라보는 평온한 시각과 고백

③ 어떤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축복하는 야곱


 

[야곱의 마음은 어디로?]

47:1-6 바로는 고센땅에서 목자로 있게 허락하다.

47:7-10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다.

47:11-12 요셉이 가족들의 정착을 돕다.

47:13-26 요셉의 이집트 통치

47:27    이스라엘족속은 고센땅에서 생육번성하다.

47:28-31 야곱의 유언


* 가뭄으로 이집트에 곡식을 구하러 왔다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요셉의 도움으로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의 고센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창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창 47:27)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의 고센 땅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재산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다.』

→ 거기서 그들은 생업과 함께 생육 번성하게 되었다.

Q. 준비된 요셉이 없었다면 야곱의 가족들은 가나안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는 야곱은 어떤 마음일까?

①→ 야곱은 17년간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모습을 본다.

②→ 예전에는 요셉없이 가족을 보았다면 이제는 죽은 줄 알았던 요셉과 함께 가족을 본다.

③→ 자녀들의 생육번성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한다.

⇒ 요셉에게 고백한다. (창 48:3-4)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cf. 1차 벧엘에서 (창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2차 벧엘에서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47: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창 47:28) 『야곱이 이집트 땅에서 열일곱 해를 살았으니, 그의 나이가 백마흔일곱 살이었다.』

→ 자손이 생육번성함을 보고 자신의 역할이 다 끝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 야곱의 부탁과 요셉의 맹세

(창 47: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창 47:29) 『이스라엘은 죽을 날을 앞두고,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놓고 일렀다.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 야곱은 자신이 죽을 날을 느낀다.

-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움을 알고 요셉을 부른다.

-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내 환도뼈)

→ 환도뼈는 허리 아래 골반과 대퇴골 사이에 있는 뼈이며, 고대 근동에서 이 뼈는 남자의 성기와 관련하여 생명의 원천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여기에 손을 넣고 맹세하는 것은 후손까지 미치는 강력한 맹세로 반드시 준수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이다.

-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 인애-자의로 베푸는 친절한 행위와 사랑, 성심-확실성과 성실성의 의미를 가진 말.

→ 꼭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강조한다.


※ 이삭과의 공통점과 다른 점은?

공통점-눈이 어둡다. 원하는 아들을 부른다.

차이점-죽음에 대한 마음이 다르다.

(창 27:1-2)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창 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창 47: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창 47:30)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 요셉이 대답하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 야곱에게 죽음은 ‘조상과 함께 눕는 것’이며 조상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을 받아들여지고 있다.

-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cf. 야곱은 왜 가나안에 가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지 않고 요셉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 그는 외가에서 돌아왔을 때 가나안을 떠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셉이 살아 있고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고센땅에 오게 되었다. 죽음을 느낀 야곱은 자신의 장례는 가나안에 있게 하도록, 조상과 함께 눕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① 요셉이 없는 가나안보다 요셉이 있는 이집트에, 즉 요셉과 끝까지 있고 싶었다. 요셉의 손이 자신의 눈을 감겨줄 것 알고 있었다.

② 자신은 죽음 뒤에 가나안으로 가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③ →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cf. 1차 벧엘의 약속이 그의 죽음이후에도 계속된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창 47: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창 47:31) 『야곱이 다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맹세하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 요셉의 맹세, 야곱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을 요셉이 맹세하였기에 하나님께 경배한다.


[정리]

야곱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올수록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보인다.

야곱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고 흔들림이 없다.

 

[힘내는 야곱의 고백]

47:1-6 바로는 고센땅에서 목자로 있게 허락하다.

47:7-10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다.

47:11-12 요셉이 가족들의 정착을 돕다.

47:13-26 요셉의 이집트 통치

47:27    이스라엘족속은 고센땅에서 생육번성하다.

47:28-31 야곱의 유언

47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고센땅 정착과 생육번성이 나오고, 이를 위한 요셉의 도움과 통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17년이 지나 죽음을 느끼는 야곱이 요셉에게 고향장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한다.


48:1-7 요셉과 과거이야기하다.

48:8-22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다.

49:1-28 열두아들을 축복하다.

49:29-33 매장지를 알려주고 사망하다.

48장은 실제로 죽음이 임박한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고 49장은 12아들에 대한 예언이 있다.


(창 48: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창 48: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요셉은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들었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 이 일 후에 → 앞에 47:27-31에서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자신의 유해를 조상의 무덤이 있는 막벨라굴에 장사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 병들다(할라) 야곱은 질병이라기 보다는 자연적인 노쇠현상으로 몸이 심히 약해졌으며, 연로하여 죽음에 임박했음을 암시한다.

⇒ 요셉은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에게로 온다.


(창 48: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창 48:2) 『야곱 곧 이스라엘은 자기의 아들 요셉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기력을 다하여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 힘을 내어 → ‘단단히 매다, 힘쓰다, 강하다, 견고히 하다’(하자크)

⇒ 야곱은 요셉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힘을 내어 앉는다. 노환으로 병든 사람이 일어나 앉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야곱은 육신의 약함보다 아들을 맞아들이고 이후에 있을 축복의 자리에 최선을 다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cf. 야곱의 달라진 점? 야곱은 먼저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고 49장에서는 모든 아들들을 순서적으로 축복해준다. 이 모습은 아마 예전의 가나안에서의 모습으로 볼때 다른 10아들과 달리 요셉에게만 편애를 했을 것이다. 이것은 보고 싶었던 요셉을 만나는 기쁨과 17년이란 고센땅에서의 평온함이 다른 아들까지도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 야곱은 요셉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창 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창 48:3)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에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시면서,』

-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 야곱은 자신의 시작을 루스땅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표현한다. 이전의 사건은 장자권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과 속임수였고, 그로 인한 고통이었다. 이는 현재 야곱의 관심과 자신의 삶의 해석을 하나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 하나님은 ‘엘 샤다이’로 가장 전능하신 분임을 강조하다.

cf. 창세기에 나오는 전능한 하나님

1. 아브라함이 99세에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소개할 때

(창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이삭이 야곱을 떠나보낼 때 전능한 하나님이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길 기도할때

(창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3. 야곱이 마지막 순간 요셉에게 자신의 삶을 말할 때

(창 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창 48: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창 48:4)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고, 그 수가 불어나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서 여러 백성이 나오게 하고,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겠다. 하셨다.』

→ 야곱은 루스에서 받은 약속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경험하였고 자손들에게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있음을 요셉에게 말하고 있다.

cf. 우리는 어디에 기준을 삼고 있는가?


(창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창 48:5) 『내가 너를 보려고 여기 이집트로 오기 전에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낳은 두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나의 아들이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나의 아들로 한다.』

-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① 야곱에게 있어 이들은 사랑하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이방인의 피가 섞인 손자들이다.

② 이것은 요셉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공동체가 혈육과 신앙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기에 불편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임종직전에 아버지의 축복기도 있음을 알고 아들과 함께 왔다.

③ 므낫세가 장자인데 야곱은 에브라임을 먼저 부른다. 뒤에 교차하여 기도해주는 것과 연결된다.

④ 장자에게는 유산을 두배로 주는 고대근동의 상속법에 의해 이 둘을 아들로 본다는 것은 특별한 대우이다.

⇒ 이집트의 피가 섞였지만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로 당당하게 세워지고, 가나안 땅분배시 다른 지파와 같이 독립된 기업을 받는다.


(창 48: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창 48:6) 『이 두 아이 다음에 낳은 자식들은 너의 아들이다. 이 두 아이는 형들과 함께 유산을 상속받게 할 것이다.』

→ 요셉의 두아들은 지파에 들어가고, 이후의 아들이 태어나면 그때야 요셉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창 48: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 48:7) 『내가 밧단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슬프게도 너의 어머니 라헬이 가나안 땅에 다 와서, 조금만 더 가면 에브랏에 이를 것인데, 그만 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너의 어머니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옆에 묻었다."』

→ 라헬이 죽어 장사된 곳은 에브랏에서 약 19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 라헬은 요셉의 어머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을텐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갑자기 이 이야기는 여기에 왜 있을까? 오히려 47장에서 요셉의 맹세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정리]

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고 후에 지파가 되게 한다.

② 야곱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며 전능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야곱의 축복기도]

야곱의 임종이 임박하자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온다. 야곱은 과거에 자신과 함께 한 전능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지파)로 삼는다고 말한다.


(창 48: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창 48: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면서 물었다. "이 아이들이 누구냐?"』

-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들을 묻는 이유는?

① 야곱은 이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방금전 5절에서 야곱은 이들을 양자로 삼는다고 말했다.

(창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② 눈이 멀어 아이들이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하나? 이는 아버지와 동일하다.

(창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 이런 동일한 상황은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과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상황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③ 요셉을 신뢰할 수 없었을까? 자신과 같은 상황이 될까봐 노파심으로 확인하는가? 야곱은 언제나 요셉에게 장자대우를 해주었다. 게다가 이미 두 아들을 양자로 삼음으로 확실하게 장자대우를 받았다. 야곱은 요셉이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 27: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야곱은 자신을 야곱이 아닌 에서라고 말했다.

④ 야곱은 왜 누구냐고 물었을까? 이삭은 축복기도하기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절차상 묻는 것이다.

(창 27: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 과거의 기억은 있으나 반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순탄한 축복기도가 되기 위한 서언이고 고백이다.


(창 48: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창 48:9)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이 아이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자식들입니다. " 이스라엘이 말하였다. "아이들을 나에게로 가까이 데리고 오너라. 내가 아이들에게 축복하겠다."』

-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① 요셉은 아들들에 대한 평가이며 동시에 자신의 고백이다.

② 하나님을 고백하기 어려운 이집트에서의 삶 속에서 그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③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두 아들을 양육할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④ ‘하나님(엘로힘)’이란 명칭까지 써가면서 언약의 자손으로 양육시키려는 자신의 믿음과 책임을 고백하고 있다.

-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cf. 야곱은 축복하기 위해 가까이 오라하지만 이삭은 에서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오라했다.

(창 27: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창 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창 48:10) 『이스라엘은 나이가 많았으므로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볼 수 없었다. 요셉이 두 아들을 아버지에게로 이끌고 가니, 야곱이 그들에게 입을 맞추고 끌어안았다.』

→ 야곱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지만 두 아들에 대해서는 입맞추고 안아준다.

cf. 이삭은 목소리가 에서가 아님을 알고 가까이 오게 하여 손을 만져본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판단력을 잃은 이삭은 분별력도 잃는다.

(창 27:22-23) 『[22]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cf. 야곱의 요청으로 요셉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게 하여 입맞추게 하나, 이삭은 야곱을 가까이 오라 하여 입맞추며 옷의 향취를 맡는다. 너무나 평온한 분위기 vs 긴장되는 분위기

(창 27:26-27) 『[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48: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내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창 48:1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은 내가 너의 자식들까지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구나."』

→ 야곱의 격양된 감정이 느껴진다. 17년이 지나도 다시 요셉을 만난 것에 대해서는 감동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두 아들도 얻었다는 것은 더욱 그를 감동시켰을 것이다.


(창 48: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창 48:12) 『요셉은 이스라엘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이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 할아버지 야곱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받은 두 아들을 요셉이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축복기도를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창 48:13-14) 『[13]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 48:13-14) 『[13] 그런 다음에 요셉은 두 아이를 데려다가 오른손으로 에브라임을 이끌어서 이스라엘의 왼쪽에 서게 하고, 왼손으로 므낫세를 이끌어서 이스라엘의 오른쪽에 서게 하였다. [14] 그런데 이스라엘은 에브라임이 작은 아들인데도 그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므낫세는 맏아들인데도 그의 왼손을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었다. 야곱이 그의 팔을 엇갈리게 내민 것이다.』

→ 오른손은 에브라임, 왼손은 므낫세

→ 히브리인이나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을 권위와 탁월한 능력, 축복과 은혜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17절에 요셉도 사회적 통념에 따르려 했다.

cf.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

→ 죄짓게 하는 것이 있다면 설사 그토록 중요한 오른손일지라도 과감히 제하라는 교훈이다.

-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사칼()  어긋맞기다, 신중하다, 지혜롭다. 야곱의 엇바꾸어 얹는 행위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였음을 알려준다.


(창 48:15-16)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창 48:15-16) 『[15]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였다.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16]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나의 이름과 할아버지의 이름 아브라함과 아버지의 이름 이삭이 이 아이들에게서 살아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들의 자손이 이 땅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 손은 두 아들에게 얹고서 축복은 요셉을 위한 축복이라고 한다. 장자를 위한 축복이기 때문이다.

* 야곱은 자신의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①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 조상때부터 섬기던 하나님 : 야곱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3대에게 동일한 약속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고백한다. 섬기다(얄라크)는 ‘가다, 좇다, 향하다’로 스스로 좇았다는 의미

②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 개인의 삶에 하나님 : ‘자신이 태어나서 바로 오늘까지’의 의미로 자신의 전생애를 하나님이 기르고 있음을 고백한다. 기르다(라아)는 ‘기르다, 풀을 뜯기다, 방목하다’는 의미로 ‘그 기르는자, 그 목자’이다.

③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 구원하시는 하나님 : 야곱의 모든 악과 어려움 속에서 구원하셨다. 건지다(까알)는 ‘도로사다, 속전하다’로 정관사와 함께 ‘구원하는 자’의 의미가 된다.

④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 계승되는 하나님 : 자신이 ①처럼 부르듯 자손들도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칭하다(카라)는 ‘선언하다’의 의미로 여기서는 ‘불리워지다’는 수동으로 사용한다.

⑤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 야곱은 축복하면서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 번성하기를 기도한다. 번성하다(따가)


(창 48:17-18) 『[17]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하여 [18]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창 48:17-18) 『[17] 요셉은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은 것을 보고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요셉은 아버지의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말하였다. [18]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 이 모습은 사회통념에서 볼때 요셉에게 불편한 상황이다. 요셉은 그것을 멈추게 하려고 한다. 요셉이 볼때 이것은 틀린 행동이고 바르게 기도를 받게 하고 싶었다.

cf. 요셉의 실수는 베드로의 사단적 행위와 같은가?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창 48:19)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거절하면서 대답하였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

-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 거절하다(마엔) 야곱은 요셉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 예상하지 못한 야곱의 행동에 요셉은 당황하고 바르게 고치려 한다. 그러나 야곱의 반응은 즉흥적이거나 노쇠한 연령에 의한 착각이 아님을 보여준다.

-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 결국 아우 에브라임을 오른손으로 축복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말한다.

* 1차 인구조사-에브라임 40,500 vs 므낫세 32,200

(민 1:33) 『에브라임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사만 오백 명이었더라』

(민 1:35) 『므낫세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삼만 이천이백 명이었더라』

* 2차 인구조사- 에브라임 32,500 vs 므낫세 52,700

(민 26:37) 『이는 에브라임 자손의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삼만 이천오백 명이라 이상은 그 종족을 따른 요셉 자손이었더라』

(민 26:34) 『이는 므낫세의 종족들이라 계수함을 입은 자가 오만 이천칠백 명이었더라』

*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에브라임지파가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지파가 되어 큰 영향력을 보였다.

* 야곱의 삶과 비교하였을때

①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예언이 있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②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

(창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③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라 한다.

(창 25: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④ 자신을 에서라고 속이며 축복기도를 받다

(창 27: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27-29)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⑤ 에서에 대한 야곱의 기도

(창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 이삭과의 공통점과 다른 점은?

공통점-눈이 어둡다. 원하는 아들을 부른다.

차이점-죽음에 대한 마음이 다르다. 준비된 기도

⇒ 둘다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 수고했고 그로 인해 얻은 인생의 굴곡은 마지막 순간 아버지 이삭의 축복기도와 너무나 많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바르게 인도받으며 기도해주고 있다.


(창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창 48:20)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

→ 여기서 ‘이스라엘’은 야곱 자신이다. 이 축복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 이로 인해 얻어지는 것은 ‘모두 같은 족속이고 평등하며, 야곱의 아픔이 승화된다.’


(창 48:21-22)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창 48:21-22)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22]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 세겜을 더 준다. 세겜은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

→ 야곱은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강조한다.

→ 22절은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정복전쟁에 마치 야곱이 참여한 것처럼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하고 있음을 말한다.


(창 49: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창 49:1)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놓고서 일렀다. "너희는 모여라. 너희가 뒷날에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말하겠다.』

→ 이후 야곱은 다른 아들들을 모이게 하고 후일의 일을 이른다. 2-28절 르우벤에서 베냐민까지


[정리] 야곱의 축복기도는?

① 장자 중심의 기도가 아닌 모두에게 평등한 기도였다.

② 모든 아들의 편애를 없애고 품어주는 기도였다.

③ 자신의 과거의 외상을 승화시키는 기도였다.

 

아비의 기도 <창세기 27:27-29, 48:15-16>


(창 27:27-29)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창 48:15-16)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공통점 - 나이들어 눈이 멀다.

(창 27: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 다른 점

1. 기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창 27: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그런데 이삭이 이후로도 수십년을 살았다.

(창 48: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축복기도는 어떻게 시작할까요?

(창 27: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 48: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창 48:3-4)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3. 기도받을 때 분위기는?

(창 27:21-23)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창 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4. 축복기도후 결과는?


(창 27:27-29)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창 48:15-16)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야곱은 자신의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①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 조상때부터 섬기던 하나님 : 야곱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3대에게 동일한 약속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고백한다. 섬기다(얄라크)는 ‘가다, 좇다, 향하다’로 스스로 좇았다는 의미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②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 개인의 삶에 하나님 : ‘자신이 태어나서 바로 오늘까지’의 의미로 자신의 전생애를 하나님이 기르고 있음을 고백한다. 기르다(라아 )는 ‘기르다, 풀을 뜯기다, 방목하다’는 의미로 ‘그 기르는자, 그 목자’이다.


③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 구원하시는 하나님 : 야곱의 모든 악과 어려움 속에서 구원하셨다. 건지다(까알)는 ‘도로사다, 속전하다’로 정관사와 함께 ‘구원하는 자’의 의미가 된다.


④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 계승되는 하나님 : 자신이 ①처럼 부르듯 자손들도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칭하다(카라)는 ‘선언하다’의 의미로 여기서는 ‘불리워지다’는 수동으로 사용한다.


⑤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 야곱은 축복하면서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 번성하기를 기도한다. 번성하다(따가)


* 야곱의 축복기도의 특징

1. 준비된 기도이다.

2. 자신이 변화된 삶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다른 사람도 변화시킨다.

 

[야곱의 죽음과 장례식]

10.09.15에 시작한 야곱, 지금까지 29번을 살펴보았다. 오늘로 30번째


48:1-7 요셉과 과거이야기하다.

48:8-22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다.

49:1-28 열두아들을 축복하다.

49:29-33 매장지를 알려주고 사망하다.


(창 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 49:28)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다. 이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을 축복할 때에 한 말이다. 그는 아들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셨다.』

- 지파(쉐베트) ‘막대기, 지팡이, 작대기’라는 뜻이 있다. → 오랜 유목생활에서 목자의 지팡이가 가장 권위 통치권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 이 단어는 오직 이스라엘 지파에게만 사용한다.

-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 야곱은 열두지파를 공평하게 분량대로 축복한다.

→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각 지파가 받아야 할 복이 정해져 있으며, 야곱은 그 복을 선언하는 자임을 보여준다.


(창 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창 49:29) 『야곱이 아들들에게 일렀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서 나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죽거든 나의 조상들과 함께 있게 한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묘실에 묻어라.』

-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 직역 ‘나는 나의 동족에게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내가 죽거든 나의 조상들과 함께 있게 한 ... 밭에 있는 묘실에 묻어라.

→ 족장들의 내세관으로 죽음을 끝으로 생각지 않고 동족들이 모여 있는 또다른 세계로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cf. 아브라함 - (창 25: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 25:8)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이삭 - (창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9) 『이삭은 늙고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다하자 죽어서 조상들 곁으로 갔다.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


(창 49: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창 49:30) 『그 묘실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다. 그 묘실은 아브라함 어른께서 묘실로 쓰려고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두신 것이다.』

cf.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신다는 약속(17:8)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소유한 땅은 무덤뿐이다. 굳이 값을 주고 그 굴(무덤)을 산 것은 이 땅이 언젠가는 자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 야곱이 무덤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며 자신의 뼈를 반드시 그곳에 묻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자손에게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 확고하게 있기 때문이다.

cf.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창 15:18-21)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cf. 헤브론 막벨라 동굴 http://blog.naver.com/wejek/130107899985

 

막벨라 동굴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묘지)
1번을 따라 들어 가면 이사악과 레베카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2번이 이사악과(C) 레베카(D)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비잔틴 시대의 성당 자리 위에 십자군들이 아브라함에게 봉헌한 대성전을 지었다. 입구쪽의 A는 6개의 기둥으로 지탱하여 만든 코란을 해설하는 연단이 있다. B는 기도할때 메카의 방향을 알려 주는 벽감인 미흐랍(mihrab). E는 십자군 시대까지만 해도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입구였으나 그 이후 모든 입구는 봉하여졌다. F는 작은 구멍을 통하여 지하 동굴을 볼 수 있도록 한 곳. 3번 위쪽은 사라, 아래쪽은 아브라함의 무덤. 3번을 경계로 2번쪽은 현재 이슬람 사원이고, 3번 왼쪽 부분은 유대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4번은 유대인들이 회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며, 5번은 작은 기도방이면서 위쪽은 레아의 무덤, 아래쪽은 야곱의 무덤이다. 유대인 출입구를 통과하여 6번으로 들어가면 유대인들이 기도방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며, 그 오른쪽 7번은 이름이 없는 빈 무덤인데 아담의 무덤 또는 요셉의 무덤이라고 한다. 성경에 따르면 요셉의 무덤은 스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H는 유대인들의 기도와 식사와 도서실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방. G는 1260년 헤브론을 점령한 맘루크 이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대신 그 입구 7번째 계단까지 올라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했는데, 1967년 6일 전쟁에서 헤브론을 장학하고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1969년에 파괴되었다.

(창 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창 49:31) 『거기에는 아브라함과 그 분의 아내 사라, 이 두 분이 묻혔고, 이삭과 그 분의 아내 리브가, 이 두 분도 거기에 묻혀 있다. 나도 너희 어머니 레아를 거기에다 묻었다.』

→ 아브라함(25:9) 사라(23:19) 이삭(35:29)은 기록이 있고 ‘리브가와 레아에 대하여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창 49: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창 49:32) 『밭과 그 안에 있는 묘실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 아브라함이 자손이 그 땅에 살 것을 믿는 믿음안에서 굴을 값을 주고 샀다. 야곱은 이 믿음을 계승하며 자신들의 돌아갈 본향임을 강조한다.

※ 야곱은 축복받은 장자로서 가족의 역사를 자세히 알고 이를 계승한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군대에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전쟁에 패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 굴을 샀다는 것을 연상케 한다.(렘 32:1-15) 이 믿음은 지금의 이스라엘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창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창 49:33)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이렇게 이르고 나서 침상에 똑바로 누워 숨을 거두고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 지금까지 침상에서 힘을 내어 일어나 아들들에게 축복기도를 한 야곱은 침상 안에 눕고 발을 모은다. 언약의 계승자로서 모든 사명을 마치고 평안히 침상에 누워 잠들듯 고요히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 죽음의 슬픔보다 자신이 할 일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행하는 느낌을 준다.

cf. 이는 자신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 야곱의 장례

(창 50:1-3)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 시체보존관습은 히브리인의 관습이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혼이 다시 몸으로 돌아와 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체를 잘 보존하는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는 단지 이집트의 종교사상을 쫓은 것이 아니라, 귀중한 사람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귀족을 미이라로 만드는 애굽의 풍속을 따랐을 것이다. 이후 야곱의 유언은 가나안으로 운구할 때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했다.

→ 과정은 40일이 걸리고, 이후 70일동안 공식으로 애도기간을 가졌다. 파라오도 72일을 애곡하는 것으로 보아 요셉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준다.


50:4-13 요셉이 바로에게 청하여 가나안에 가서 장사지낸다.

(창 50:12-14)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정리]

① 야곱은 가족의 역사와 믿음을 자세히 계승한다.

② 축복기도를 가로챈 야곱이 모두에게 축복기도해주며 민족을 세우는 사람이 되었다.

③ 자손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세워졌다.


:

성경인물 16. 야곱 - 요셉 속에 야곱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1. 4. 13. 13:21



[꿈쟁이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과 인사할 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디에?’는 서울, 종로 같은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심리적 장소를 말한다. 지금 ‘실제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심리적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를 물어보라는 얘기다.

* 배경과 상황

(창 37: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창 37:1)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몸붙여 살던 땅 곧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 공간적 배경 : 가나안 땅, 구체적으로는 세겜땅


(창 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창 37:2)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된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 시간적 배경 : 요셉이 17세 때,

cf. 요셉이 39일때 야곱이 130이라고 한 것을 기준으로 볼때

야곱의 90-요셉의 출생, 라반과 재계약

야곱의 96-고향으로, 얍복에서 세겜으로

야곱의 108-요셉의 17세

야곱의 110경-베냐민의 출생

→ 상황 : 이복형들과 양을 친다.(빌하-단, 납달리, 실바-갓, 아셀) → 레아의 아들들과는 아니다.

-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 요셉 : 아버지에게 이복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였고 미완료형으로 한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러했다.

⇒ 형제들은 이러한 행동으로 불편한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불편하게 되기에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요셉은 자신의 행동을 받아주는 아버지 야곱에 의해 멈추지 않고 계속 하였다. 이것은 요셉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이집트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cf. 야곱과 요셉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관계가 어떨까? 고자질을 한다는 것은 요셉이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법이면서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야곱은 특별한 아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대해 행동보다는 존재로서 받아주었을 것이다. 곧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고 거리감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cf. 다른 이복형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자신들의 어머니가 라헬과 불편함이 있었기에 그러한 감정을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3)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b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b. 또는 채색 옷)』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 단지 늦게 얻은 아들이라서 일까?

-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 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야곱에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이란 사실은, 특히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많이 힘들어했던 이후 얻은 야곱의 편애는 그의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창 30:1-2)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야곱과 라헬의 갈등상황

(창 30:22-24)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라헬에게 요셉은 부끄러움을 씻어준 존재다.

- 채색옷 : 노동을 하는 이복형들과 달리 요셉은 관리자의 옷을 입었다. 곧 야곱은 요셉을 장자로 대우했다. 다른 가족과의 관계를 보면서 자제나 조절을 할 수 없는 모습의 단적인 증거이다.

cf. 자신은 1명의 형이 있었지만 요셉은 10명의 형이 있었다. 야곱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창 37: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 37:4)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 형들은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만큼 요셉에게 옮겨간다. cf.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야곱에게서 아들들을 공평하게 사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요셉을 보면서는 아예 그 자체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요셉은 왜 꿈을 꾸는가?

- 첫 꿈과 형들의 반응

(창 37:5-8)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 37:5-8) 『[5] 한 번은 요셉이 꿈을 꾸고서 그것을 형들에게 말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형들은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6]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셔요. [7]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나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어요." [8] 형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성싶으냐? 정말로, 네가 우리를 다스릴 참이냐?"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

→ 요셉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형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에 모르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형들은 더 요셉을 미워하게 된다. 아버지의 반감으로 미워했던 형들은 직접적으로 미워하게 되었다.

cf.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서슴없이 말하던 요셉은 형에게도 그러하다.

- 둘째 꿈과 형과 아버지의 반응

(창 37:9-11)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 37:9-11) 『[9] 얼마 뒤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다. 들어보셔요. 또 꿈을 꾸었어요. 이번에는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10] 그가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었다. "네가 꾼 그 꿈이 무엇이냐? 그래, 나하고 너의 어머니하고 너의 형들이 함께 너에게로 가서 땅에 엎드려서 너에게 절을 할 것이란 말이냐?" [11]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

- 요셉은 형들이 미워함에 상관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아버지에게까지 말한다.

- 야곱은 꾸짖는다 : 까아르() 책망하다, 금하다. →결과적으로 형들은 시기한다.

- 야곱은 간직한다 : 솨마르() 소중히 기억 속에 간직하다.


* 왜 요셉은 꿈을 꿀까? 아버지가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 요셉이 태어난 후 라반과 재계약을 맺는다. (창 30:25)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 이후 6년동안 야곱은 꿈의 경험을 한다. 아내들에게 떠나기전 꿈의 이야기를 한다.

1. 양에 대한 꿈 - 계약내용과 결과(30:29-43), 꿈이야기는 31:10-12

(창 31:10-12)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2. 아내들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 돌아가라는 메시지.

(창 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 이때 요셉의 나이가 6살이다. 반면 이복형들은 요셉 이전에 태어났고 야곱에게서 일하는 모습만 보았다.

⇒ 꿈꾸는 요셉의 모델은 꿈꾸는 야곱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아빠, 아들은 그를 닮아가려 한다.


*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다.

(창 37:12-14)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창 37:12-14) 『[12]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양 떼를 치려고 세겜 근처로 갔다.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가 알고 있듯이 너의 형들이 세겜 근처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너의 형들에게 좀 보내야겠다." 요셉이 대답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14]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너의 형들이 잘 있는지, 양들도 잘 있는지를 가서 살펴보고, 나에게 와서 소식을 전해 다오" 그의 아버지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그를 떠나보냈다. 요셉이 세겜에 도착하였다.』

- 장소와 상황 :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친다.

- 야곱의 의도 :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 요셉을 보낸다. 이전에도 요셉은 잘못을 말해 주곤 하였다.

(창 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cf. 야곱은 왜 확인하고 싶었을까? 걱정인가 과거의 경험때문인가?

(창 31:1-2) 『[1]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창 31:1-2) 『[1]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재산으로 저처럼 큰 부자가 되었다."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이전과 같지 않았다.』

→ 아버지의 양떼를 치는 형들 vs 라반의 소유를 치는 야곱


* 창 37:15-30

- 세겜에 있을 줄 알았던 형들이 도단에 있다.

-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구덩이에 가둬 놓고 상인에게 판다.


* 형들의 거짓말

(창 37:31-32)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창 37:31-32) 『[31] 그들은 숫염소 한 마리를 죽이고, 요셉의 옷을 가지고 가서 거기에 피를 묻혔다. [32] 그들은 피묻은 그 화려한 옷을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말하였다. 우리가 이 옷을 주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요셉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한다.


* 아버지의 슬픔

(창 37:33-35)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 37:33-35) 『[33] 그가 그 옷을 알아보고서 부르짖었다. "내 아들의 옷이다! 사나운 들짐승이 그 아이를 잡아 먹었구나. 요셉은 찢겨서 죽은 것이 틀림없다." [34] 야곱은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울었다. [35] 그의 아들딸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위로하였지만, 그는 위로받기를 마다하면서 탄식하였다. "아니다. 내가 울면서 나의 아들이 있는 a스올로 내려가겠다." 아버지는 잃은 자식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a. 무덤)』

-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 오래도록 : ‘한날 한날’이란 의미. 야곱은 요셉을 사랑한 만큼, 요셉을 자신이 보냈다는 죄책감만큼 오랫동안 굵은 베옷을 입고 애통한다.

- 울었더라 : 빠카() 울부짖다, 울며 소리치다, 눈물을 흘리다.


* 야곱에게 요셉은 어떤 존재인가?

① 요셉의 출생은 새로운 삶을 개척할 마음을 갖게 했다. 재산이 없더라도 라반의 집에서 나오려 했다.

(창 30:25-26) 『[25]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② 다른 아들보다 우선시 하였다.

(창 33:2,7)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얍복에서 야곱의 행동

③ 정착이후로 더욱 편애하였다.

(창 37:2-3)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④ 채색옷을 입히고 형들에게 보냈다가 봉변을 당하게 한 것은 자신이다.

(창 37: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⑤ 야곱은 위로를 거부하며 슬픔에 빠져있다.

(창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 이후 있게 되는 가족의 어려움에 야곱은 극복할 힘이 없다.


[정리]

야곱이 있었던 장소는?

① 야곱은 편애는 자신에게는 좋지만 가족전체에게는 미움의 감정을 키웠고, 그 결과를 받았다.

② 요셉이 꿈쟁이가 된 것은 야곱이 중요한 시기에 모델이 되었다.


[기근 속에 야곱의 심리]

오늘 이야기는 요셉을 떠나보내는 37장 이후 다시 재회하는 45장까지의 과정, 요셉에게는 노예에서 총리가 되는 과정과 야곱에게는 특히 가뭄으로 인해 재회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간동안 야곱의 가족은 세겜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벧엘로 이동하며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간다.


38장 유다와 며느리 다말 이야기

39장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요셉

40장 감옥에서 꿈해석하는 요셉

41장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요셉

41:46-52 요셉이 30세(46), 칠년의 풍년(47) 요셉의 결혼과 두아들


* 상황

(창 41:53-57)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리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 기근이 온 세상(온 땅)에 심함이었더라

→ 7년의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처럼 흉년이 들기 시작한다 - 자연현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cf. 홍수를 준비하던 노아(창 6장)


cf. 기근이 있으면 무엇을 하는가?

① 아브라함-애굽으로 간다. (창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 이집트 여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다.

② 이삭-가려다 만다. (창 26:1-2)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③ 야곱-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라한다. 1차 요구(42:1-2), 2차 요구(43:1-2)


* 야곱은 어떻게 하는가? 1차 요구

(창 42:1-2) 『[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창 42:1-2) 『[1]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으냐?" [2] 야곱이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그리로 가서 곡식을 좀 사오너라. 그래야 먹고 살지, 가만히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 요셉은 38세, 야곱은 129세

-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듣는데, 아들들은 어떤 행동도 하고 있지 않음을 책망한다.


cf. 야곱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신이 직접 가기 보다는 아들들을 보낸다.

⇨ 직접 가지 않는 이유는?

① 129세라는 고령이라서

② 다시 이방땅을 가는 것이 두려워서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③ 자신의 이동은 가족 전체의 이동이기에

④ 지금 야곱이 원하는 것은 이동이 아니라 곡식뿐이기에

⑤ 애굽까지 갈 의욕이 없어서

→ 그래서 아들만 보낸다.


⇨ 야곱의 심리상황은?

①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 야곱이 원하는 것은 사는 것, 그러나 그동안 그가 경험하는 것은 죽음이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이후 위로도 거절하고 죽겠다고 했다. 이후 라헬의 죽음 등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곧 그 안에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계속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②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자신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아들들도 가만히 있는다고 책망한다. 무엇이 이런 책망을 하게 했을까?

→ 투사의 마음인가? - 야곱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 아들들에 대해 화가 났다.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아들들에게 ‘투사’하고 있다. 너희들이 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죽었다는 마음일까? 혹은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 못한채 가만 있는 아들들 탓을 하는가?

→ 부정적 투사적 동일시’의 마음인가? - 야곱이 보기에 아들들은 서로 바라만 보고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럼, 야곱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아들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 아들이 자신처럼 의욕이 없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 곧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안보려는 것이다.

→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인가? 야곱은 리브가-라헬-요셉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요셉을 잃었다. 이후 라헬이 죽고 베냐민이 남겨졌다. 야곱은 요셉을 대신하는 베냐민을 바라보고 있다.

→ 만성우울증? 요셉을 잃은 뒤 세겜의 어려움과 아들들의 살육, 벧엘로 올라가지만 라헬의 죽음 등은 의욕을 잃게 한다. 그런데 아들들이 무엇을 하려 하지 않는다. 곧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③ 리더의 부정적 영향 - 야곱이 우울하고 의욕이 없으며 그 탓을 아들들에게 하고 있을 때 아들들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후 베냐민을 통해 아버지를 보호하려는 르우벤과 유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④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 죽는다고 하지만 사는 것을 이야기한다. 곧 끝은 아니라는 것

→ 죽겠다고 하고 죽을 것같지만 귀는 열려 있다. 그리고 행동도 정해준다. 부정적이지만 리더의 모습을 지킨다.

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 죽음을 보면서도 끊임없는 삶에 대한 욕구


⇨ 그런데 만약 직접 갔다면 요셉의 반응과 대응방법은 어땠을까? 형만 보았을 때와 아버지를 보았을 때가 달랐을 것이다. 형들에 대한 테스트도 못하거나 다른 방법을 취해야 했을 것이다.



[정리]

① 야곱은 힘들지만 살고 싶어 한다.

② 형제들이 올라감으로 요셉이 테스트를 할 수 있게 된다.

③ 기근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④ 야곱은 자신을 보기 보다는 아들들의 행동을 보며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보면서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차 여행과 야곱의 일관된 편애]

42:1-2은 가뭄으로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들들이 해결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아버지 야곱의 모습을 보았다. 투사적 동일시의 모습. 그러나 만약 그 아들이 요셉이라면 그러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10아들에게 보인 모습은 처음부터 보였던 일관된 모습이다. 42장에는 이런 야곱의 변하지 않는 반응과 편애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왜 야곱은 그것을 모르고 계속하는 것일까? 부모의 자녀교육은 일관되다?


(창 42:3-4)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창 42:3-4) 『[3] 그래서 요셉의 형 열 명이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갔다. [4]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에게 딸려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을 같이 보냈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보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 왜 가지 않느냐는 아버지의 핀잔을(1-2절) 들은 아들 10형제들은 수동적으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간다.

→ 야곱은 베냐민은 보내지 않는다. 요셉처럼 잃을까봐 두려움을 느낀다.

→ 요셉의 형 열 사람, 요셉의 아우 베냐민 ⇒ 야곱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요셉의 형과 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셉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 중에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성경기자의 의도적 표현을 볼 수 있다.


Q. 야곱은 왜 아들을 보낼 때 10명 아들을 모두 같이 보낼까?

→ 라반의 집에 있을 때도, 얍복강에서 에서에게 앞에 보낼 때도, 세겜에서와 요셉을 팔 때도 10아들은 같이 보내졌다. 이집트로 보낼 때도 같이 보낸다.

→ 요셉때도 그랬듯 베냐민도 그렇게 같은 행동을 한다.

⇒ 야곱은 10아들을 같이 보내면서 라헬의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항상 해오던 일관된 행동은 습관적인, 무의식적인 반응인가? cf. 우리들은 어떤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 10명을 보내는 이유-헤브론에서 애굽까지 약400km

① 장거리 여행중 당할 수 있는 약탈이나 위험에서 서로 보호하기 위해.

② 70명의 가족이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곡식을 구입하기 위해

③ 다른 주변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일인당 곡식 구매량에 제한을 두었을 수도 있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야곱은 언제나 해오던 방식대로 10아들은 보내고 라헬의 아들들은 보내지 않고 있다.


Q. 10아들은 어떤 기분으로 갈까?

- 자신에게 핀잔을 주면서 가게 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 요셉 때처럼 베냐민이 집에 있다. 어떤 마음일까? 예전에는 분노였지만 지금은 죄책감으로 표현하기 힘들까?

⇒ 어릴적부터 계속되던 분위기에 왜곡된 감정은 별 느낌이 없을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여 무감각해진다.


-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 베냐민도 가야하는가에 대한 야곱의 생각에는 두려움이 들어오고 있다.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하는 두려움이다. 직역-‘치명적 사고가 그를 우연히 마주치지 않도록’

→ 야곱은 요셉을 자신이 직접 멀리 보냈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그가 베냐민을 멀리 보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요셉처럼 죽을 수 있는 재난(치명적 사고)을 걱정하게 된다.

→ 이 두려움은 이후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려 할때 그렇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cf. 야곱도 아들들도 베냐민에 대해 속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전과 달리 정직해졌다.


(창 42: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창 42:5)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곡식을 사러 가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 이스라엘의 아들들 : ‘요셉의 형 열사람’(3), ‘야곱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아닌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란 표현으로 바뀐 것은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41:6-28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간 형제들은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는다. 요셉은 한사람만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막내를 데려 오면 믿겠다고 한다. 요셉은 르우벤의 후회를 들으며 시므온을 대표로 남기고 다른 형제들은 되돌려 보낸다. 돌아오는 과정에서 돈이 자루에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41:29-34 과정을 아버지에게 설명한다. 요셉과의 대화에서 정탐꾼의 오해를 풀기 위해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함을 말한다.

(창 42:29-34) 『[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창 42:35)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 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 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 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창 42:35) 『그들은 자루를 비우다가 각 사람의 자루에 각자가 치른 그 돈뭉치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는 그 돈뭉치를 보고서 모두들 겁이 났다.』

→ 각 사람의 자루를 보니 돈이 발견된다. 이것을 본 그들은 두려움이 생긴다. 이 두려움은 놀람의 의미가 크다.

- 아들들의 놀람 : 당황스러움? 자신들이 낸 돈보다도 많은 자루안에 돈을 보며 욕심이 아니라 두려움이 일어난다. cf. 요셉을 팔고 돈을 받았다.

- 아버지의 놀람 : 4절의 걱정이 사실로 드러난다.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

→ 아버지는 그들의 말이 사실이기에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두려움이 현실로 맞닥뜨려지게 되었다.


* 아들 탓하는 야곱

(창 42: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 42:36)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나의 아이들을 다 빼앗아 가는구나.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도 잃었다. 그런데 이제 너희는 베냐민마저 빼앗아 가겠다는 거냐? 하나같이 다 나를 괴롭힐 뿐이로구나!"』

→ 아들 탓하는 것이 맞을까?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였다. 요셉을 잃게 된 것도 야곱이 10아들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 요셉도 시므온도 없는데(is not) 베냐민은 데리고 가려(will take) 한다.

-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 직역 ‘모든 일들이 내 위에 있다.’

→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마음에 버거움을 표현한다.

cf. 야곱의 바램은 가족을 세우는 것 (창 30: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저의 살림을 챙겨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 장자 르우벤의 설득

(창 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창 42:37) 『르우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베냐민을 다시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저의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 막내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 르우벤은 자신이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내 아들들을 담보로 맡기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아들을 담보로 할 정도로 반드시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겠다는 의미

→ 고대 근동사회에서 아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며 생명처럼 귀한 존재로 여겼다.

cf. 야곱의 베냐민의 마음 vs 르우벤의 아들

→ 시므온은 르우벤의 친동생이다. cf. 요셉의 동생 베냐민


* 야곱의 거절

(창 42: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창 42:38) 『야곱이 말하였다. "막내를 너희와 함께 그리로 보낼 수는 없다. 그의 형은 죽고, 그 아이만 홀로 남았는데 그 아이가 너희와 같이 갔다가 또 무슨 변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찌 하겠느냐? 너희는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아버지가 슬퍼하며 죽어서 스올로 내려가는 꼴을 보겠다는 거냐?"』

-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 베냐민은 10아들과 상관없이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편애받는 라헬의 아들이다.

→ 르우벤의 설득과 입장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다.

Q. 아버지의 이런 표현을 듣는 10아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반감을 가지고 요셉을 팔았지만 그것은 더욱 아버지에게 종속되게 하였다.

Q. 야곱은 이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으며 부인중에는 라헬을, 아들중에는 요셉과 베냐민만 사랑한다. 이 편애는 언제쯤 사라지거나 극복될까? 10아들에 대한 축복기도? 이삭은 에서에게 기도해줄 것이 없다고 했었다.

-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 야곱의 관심과 걱정은 베냐민에 가려서 시므온이 없다?

→ 베냐민의 떠남은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절의 반복. cf. 시므온은 이미 재난중이다.

→ 이것은 요셉의 재난과 같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 한다.

(창 37:34-35)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Q. 야곱의 편애는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일까? 자신이 자신을 위한 사랑일까?


[정리]

① 기근과 아버지의 핀잔으로 1차여행을 하게된 형제들은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고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구에 시므온만 담보로 맡기고 온다.

② 르우벤의 설득에도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만 신경쓰고 시므온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아 보인다.

③ 야곱의 자녀에 대한 편애와 반응은 일관되다.


*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왜 그런 반응을 보일까?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차여행과 야곱과 아들들 간의 논쟁] 창 43:1-15

아버지의 명령으로 1차 이집트로 다녀온 아들들, 식량은 조금 가져왔지만 시므온을 대표로 남게 되었고, 총리는 정탐꾼이라며 막내를 데려오면 믿겠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죽겠다고 거절한다.


* 상황

(창 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창 43:1) 『그 땅에 기근이 더욱 심해 갔다.』

→ 가뭄이 심해졌다. 가뭄으로 아예 곡식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차 때보다 더 식량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고 더욱 이집트에 가서 곡식을 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 그 동안 베냐민을 데려가려는 아들들과 내어주지 않으려 하며 오히려 죽겠다는 야곱간에 대화가 없었을 것이다.

→ 그 기간은 두 번이나 다녀올 수 있는 기간 (창 43: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 상황은 기근이 더욱 심해지듯 어려워졌을 것이고, 부자간의 관계도 아무도 먼 대안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버거웠을 것이다.


(창 43: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

(창 43:2)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곡식이 다 떨어졌을 때에 ...』

-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 이제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곡식마져 다 떨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식량부족위기는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줄 수 없고, 아들들은 데리고 가야한다.


* 야곱의 요청과 갈등

(창 43:2) 『...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창 43:2) 『...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였다. "다시 가서, 먹을거리를 조금 더 사오너라."』

→ 야곱은 다시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 야곱의 갈등 - 사느냐 죽느냐

① 곡식을 구하여 살고 싶다.

(창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② 아들을 잃으면 죽을 것같다.

(창 42: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 그럼에도 야곱이 아들들에게 이집트행을 다시 명령하는 것은 식량부족으로 인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가를 보여준다.


* 유다의 설득 1

(창 43:3-5)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창 43:3-5)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하게 경고하면서 너희가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의 얼굴을 못 볼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4] 우리가 막내를 데리고 함께 가게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시면 다시 가서 아버지께서 잡수실 것을 사오겠습니다. [5] 그러나 아버지께서 막내를 보낼 수 없다고 하시면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의 얼굴을 못 볼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 화자변경 : 르우벤에서 유다로, 르우벤은 감정적이라면 유다는 논리적이다.

(창 42:37)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실패하면 자기 아들 죽이라고 한다.

cf. 37장에서 요셉을 팔 때, 르우벤은 구하려 하지만 유다는 요셉을 노예상에게 팔게 한다.

cf.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지게 하고, 가룟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판다.


-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 3,5절에 두 번 반복 강조.

① 요셉이 형들에게 진실함을 증명하는 방법 제안-한명을 보내어 막내를 데려오라

(창 42: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② 3일뒤 새로운 제안 - 한명이 남고 곡식을 가져가서 막내를 데려오라. 그러면 진실함으로 죽지 않으리라. (창 42:19-20)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③ 아들들이 야곱에게 보고 한다. 요셉의 말도 인용한다.

(창 42:33-34) 『[33]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④ 2차여행시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기 위해 두 번 인용

(창 43:3,5)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 요셉의 의도 - 막내를 데려오면 믿고 너희는 죽지 않고 무역을 하겠다. 양식은 주려하지만 막내를 데려옴으로 진실함을 보여라

⇒ 유다의 이해와 의도 - 막내를 데려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곧 ‘결코 양식을 얻지 못하리라’는 뉘앙스로

① 모든 책임은 야곱에 있다고 압력을 넣는다.

② 양식을 사기 위해서는 야곱이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③ 2절의 명령이 있자마자 조건으로 베냐민이 동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 (창 43:4-5)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

→ 베냐민이 동행하면 가고 아니면 안가겠다며 선택의 여지가 없게 한다. 유다의 논리적 대화법을 볼 수 있다.


* 야곱의 괴로움과 원망

(창 43: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창 43:6) 『이스라엘이 자식들을 탓하였다. "어찌하려고 너희는 아우가 있다는 말을 그 사람에게 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 유일하게 남은 희망인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말하는 아들들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원망하고 있다.


* 아들들의 변명

(창 43:7)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창 43:7)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우리와 우리 가족에 관하여서 낱낱이 캐물었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계시냐? 하고 묻기도 하고, 또 다른 형제가 더 있느냐? 하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가 묻는 대로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가 우리의 아우를 그리로 데리고 오라고 말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 아들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치밀하고 꼼꼼하게 질문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있는 그대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상황을 설명하면서 변명한다. 곧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

→ 모두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압력을 넣으며, 야곱의 편은 아무도 없다.


* 유다의 설득 2

(창 43: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창 43:8) 『유다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제가 막내를 데리고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도 아버지도, 우리의 어린 것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 이제는 애원에서 강요로 바뀌었다. ‘곧’ 가겠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결단이 없어서 못가고 있다는 것.

-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 아버지의 표현을 인용한다.

cf. (창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 유다의 설득 3

(창 43: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창 43:9) 『제가 그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 죄를 제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 ‘보증하다’(아라브 ) 자신이 보증한 사림이 빚을 갚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을 대신하여 보상하겠다는, 더 나아가서는 목숨까지도 내어 놓겠다는 의미이다. 즉 유다는 베냐민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뜻과 함께 안전에 이상이 생기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겠다는 강한 의지와 결단의 표현이다.

→ 그러나 자신이 장담하고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Q. 무엇이 유다를 그렇게 가게 하는가? 표현은 없지만 상황은 담보로 잡혀 있는 시므온이 자신의 친 형이라는 것이다. 시므온을 위해서라도 그는 내려가야 한다.


* 유다의 설득 4

(창 43: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창 43:10)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입니다.”』

→ 당시 헤브론에서 이집트까지는 대략 열흘길 정도이다. 유다는 하루라도 빨리 이집트로 내려가려는 급박한 마음에서 과장된 표현이며, 재촉하고 있다.

* 유다의 설득방식

① 3-5절, 자신의 의도를 넣어서 표현한다.

② 8절, 상대의 표현을 인용한다.

③ 9절, 책임지겠다고 장담한다.

④ 10절, 탓을 돌리며 재촉한다.

⇒ cf. 라반에게 나올때는 천사가, 세겜에서 나올때는 상황이, 이집트로 가야하는 상황에서는 유다가..


* 야곱의 결정과 제안

(창 43: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창 43:11) 『아버지 이스라엘이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 땅에서 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토산물을 너희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가서, 그 사람에게 선물로 드리도록 하여라. 유향과 꿀을 얼마쯤 담고,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를 담아라.』

-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여라.

→ 야곱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 선물공세 :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과거경험에서 나온다. 얍복나루에서 형 에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물을 준비하듯 이집트 총리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예물을 준비시킨다. cf. 예물이 형에게 소용없듯이 요셉에게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 야곱의 제안 1

-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 기근 속에 예물이 모순이라 할 수 있지만, 아래의 것은 가뭄때 더 맛과 향이 뛰어나다.

-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 유향 조금 - 유향목 진액에서 추출된 흰색의 고무액을 말려서 만든 고급 향료

‣ 꿀 조금 - 포도열매에서 즙을 내어 졸인 진한 시럽이나 술. 헤브론의 주산물로 가뭄때 더 맛을 낸다.

‣ 향품 - 팔레스틴이나 아라비아 지방에서 나는 식물들에서 추출한 흰색깔이 감도는 수지질(樹脂質)의 약제로 향기가 강하고 비싸다.

‣ 몰약 - 반일화(半日花, 몰약) 반일화(半日花)는 아침에 피기 시작하여 정오가 지나면 곧 시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일화 나무는 몰약을 채취할 수 있는 활엽관목으로서 우리나라의 산철쭉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꽃은 찔레를 닮았다.


 

‣ 유향나무 열매 - 피스타치오(비자) 나무의 열매에서 짜낸 기름. 식용, 등화용, 살충제용 등 다양하게 사용되며 가나안지방의 토산물.

 

‣ 감복숭아 - 살구나무열매들로 이집트에서는 나지 않고 주로 팔레스틴과 시리아 지방 등에서만 서식함으로 이집트에서는 귀하다. 살구나무(아몬드나무, 파단행, 감복숭아, 루스)

 

* 야곱의 제안 2

(창 43: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창 43:12) 『돈도 두 배를 가지고 가거라. 너희 자루 아귀에 담겨 돌아온 돈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실수였을 것이다.』

→ 지난번 돈자루와 이번 돈자루를 합하여 가지고 가라

→ ‘혹시 이것은 실수였을 것이다’ 지난번에 도로 넣어온 돈에 대한 강한 의심과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비


* 야곱의 제안 3

(창 43: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창 43:13) 『너희 아우를 데리고 어서 그 사람에게로 가거라.』

→ 아들과의 대화 속에서 상황의 긴박감을 느낀 야곱이 서둘러 아들들을 보내려고 하는 모습. 결정후 신속한 대응을 한다.


* 야곱의 제안 4

(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 43:14)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a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 (a. 히,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 야곱의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고백. cf. 벧엘로 올라가자는 고백(35장)이후 처음이다.

-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야곱의 소원.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 베냐민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까지도 죽을 수 있는 상황

→ 직역 ‘그리고 내가 만약 내가 잃는다면 나는 잃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결정한다. 스스로 놓는다. 자신의 삶에 중요한 것을 놓는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다른 가족이 죽게 되니까?

cf. 야곱의 바램은 가족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놓아야할 때는 마지막 잡고 있던 것도 놓는다. ex) 얍복에서 마지막 순간에는 라헬과 요셉을 보내듯

⇒ 자포자기가 아닌 절대적 신뢰와 신앙결단의 표현, 수동이 아닌 적극적인 마음.

cf. 야곱의 다양한 결단들 - 집을 떠날 때(?), 요셉이 태어난후 자기 집을 세우고 싶을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돌아가기로 할 때, 쫓아온 라반에게 강하게 표현할 때, 얍복에서 씨름할 때, 벧엘로 다시 올라가기로 할때..

① 11절, 적극적인 선물공세             

② 12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대비

③ 13절, 결정후 신속한 대응

④ 14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 결과

(창 43: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창 43:15) 『사람들은 선물을 꾸리고 돈도 갑절을 지니고, 베냐민을 데리고 급히 이집트로 가서, 요셉 앞에 섰다.』

- .. 마련하고 .. 가지고 .. 데리고 .. 서니라

→ 아들들이 다시 이집트로 내려가는 과정, and(와우 계속법)를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신량난이 심각하여 아들들이 신속히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정리]

야곱과 아들들간의 대화에서 베냐민이 어떠했는지는 없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논리적 설득과 재촉을 한다.

야곱의 결심과 적극적인 행동


⇒ 유다와의 차이에 야곱의 특징은? 적극적이고 건강하다.

① 11절, 적극적인 선물공세              ① 3-5절, 자신의 의도를 넣어서 표현한다.

② 12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대비  ② 8절, 상대의 표현을 인용한다.

③ 13절, 결정후 신속한 대응             ③ 9절, 책임지겠다고 장담한다.

④ 14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④ 10절, 탓을 돌리며 재촉한다.


[야곱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재확인]

1차여행후 베냐민을 보내려 하지 않던 야곱이 2차여행을 요구하고 유다의 설득에 베냐민을 보내기로 한다. 43:16-45:24는 2차여행 이야기다.


43:16-34 형제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와서 요셉을 만난다.

44:1-13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고 형제들을 시험한다.

44:14-34 베냐민과 아비를 위한 유다의 호소


45:1-8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다고 고백한다.

45:9-15 요셉이 야곱을 초청하며 형제들과 울다.

45:16-20 바로가 요셉의 가족들이 이집트에 들어와 살라 한다.

45:21-24 형제들이 집으로 돌아오다

45:25-28 야곱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믿지 않지 않는다.


(창 45: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창 45:25)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렀다.』

→1차 이집트방문때와는 달리 신속하게 귀환을 한다.

→그들의 주임무였던 곡식도 구입하고, 시므온도 풀려나고, 베냐민도 같이 오고, 뜻밖의 소식인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까지 가져와 아버지에게 말한다.


(창 45: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창 45:26) 『그들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집트 온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 아버지는 요셉으로 인해 죽겠다며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들은 요셉의 소식을, 살아있고 총리라고 전한다.

-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 어리둥절하다. - 푸그(פוג) 피곤하여 무감각해지다. 본문은 ‘그의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못했다’

→ 요셉은 야곱에게 삶의 의미였다. 그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더이상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 야곱은 오직 그 생각에 20여년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살아 있다고, 게다가 이집트의 총리라는 이야기는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창 45: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창 45:27)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를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서 제정신이 들었다.』

→ 아들들의 이야기가 수레를 보고 믿어졌고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cf. 피묻은 옷을 보고 죽겠다던 야곱이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한다.


(창 45: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창 45:28)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나의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

- 족하도다 → 수레를 보니 분명 요셉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는 의미

-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 직역 “나는 가리라. 그리하여 나는 내가 죽기전에 그를 본다” 야곱의 강한 집념과 의지를 보여준다.

→ 그동안 전혀 움직이지 않으려던, 죽은 것같이 지내던 야곱이 의지를 보이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야곱의 심리적 에너지가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갔다. 이 힘은 자신은 전혀 가려하지 않던 야곱을 당장에라도 이집트에 가려는 사람이 되게 한다. 이후 죽겠다는 표현은 없다.

cf. 요셉을 만나고-(창 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cf. 야곱의 임종시 - (창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 그는 지금 당장은 요셉을 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잠시나 이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요셉을 만나는데 기뻐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46장에서 이주하게 한다.

※ 야곱의 심리에너지(삶에 대한 에너지)

① 야곱에게 삶에 대한 욕망(desire)은 언제부터인가? 태아때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태아 때에 형과의 싸운다. 어릴적 장자권과 축복권을 받기 위해 거래와 거짓말을 한다. 광야를 지나고 라반의 집을 지낸다. 라반에게 자신의 가정을 세우겠다고 한다. 등등

② 야곱의 삶에 에너지는 어디로 집중하는가? 가족을 세우는 것, 특히 라헬과 요셉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들이 죽자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모습, 즉 죽은 듯이 살고, 요셉이 살았다는 이야기에 기운이 소생한다.

③ 삶의 에너지는 죽겠다고 하면서도 그의 귀는 가뭄때 이집트에 음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살기 위해 아들들에게 음식을 구해오게 한다.

④ 그의 삶에 욕망은 바르게 향했는가? ⇒ 하나님이 삶의 방향을 인도하셨다. 벧엘, 양을 모으기, 얍복, 벧엘, 이주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⑤ 야곱이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운을 소생하는 것은 요셉이 죽은 사람같은 야곱을 살린 것인가, 아니면 다시 그 안에 있던 심리에너지가 죽음에서 삶으로 이동하는 것인가?

⇒ 그렇다면 우리의 심리에너지는 어디에 어디로 반응하는가? 우리의 기운은 무엇으로 소생할까? 무엇이 살아 있는 자신을 죽게 하고, 무엇이 죽을 것같은 자신을 살게 할까?

cf. 하나님은 어디로 향하는가? 세상으로, 사람에게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Q. 야곱은 이제 어떻게 하려 했을까? 요셉이 보내준 수레를 타고 이집트로 간다.

→ 야곱은 잠시 다녀오려 했을까, 이주하려 했을까?

→ 야곱은 자신만 다녀오려 했을까, 모두 데리고 가려 했을까?

cf 요셉의 초청

(창 45:9-11)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 앞으로 5년 계속될 흉년동안 모두 내려 자신의 봉양을 받으라 한다.

(창 45: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 야곱의 이동, 모든 가족이 출발하고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창 46: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창 46:1) 『이스라엘이 식구를 거느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챙겨서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 이끌고 떠나 : 장막생활을 하던 유목민이 장막의 기둥을 뽑고 거처를 옮기는 것.

- 브엘세바에 이르러

→ 이곳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고 체류했던 곳이다.

→ 이곳은 아브라함(21:33)과 이삭(26:25)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야곱의 가문에는 신앙의 고향이고 후손에게는 신앙의 유적지가 된다.

→ 야곱은 자신과 후손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떠나면서 이곳에 들러서 마지막 제사를 한다.

-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 하나님의 임재를 바란다. cf. 어디로 가기전 스스로 제사하는 것이 처음이다.


(창 46: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46:2)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 밤 : 야곱의 생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벧엘의 경험, 얍복의 경험 → 미지에 대한 두려움의 경험

- “야곱아, 야곱아” → 이스라엘이라 부르지 않고 야곱이라 부른다. 왜? 이스라엘이 되기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고 함께 했고 계속 동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cf. (창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 “내가 여기 있나이다” → 부르심에 즉각적인 반응.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 야곱의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실현되는 인생이었다. 그런 가운데 점점 하나님의 고백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그렇게 들어온 가나안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을 만난다는 기쁨은 우울을 극복하게 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한다.

cf. 과거의 경험, 라반의 집을 떠날 때-(창 31: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cf. 아브라함의 경험 - 모리아산에 가기전과 이삭을 바치는 순간에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

(창 46: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3)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 나는 : 야곱에 나타나시는 자신을 강조하시는 모습이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의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에 오시고 자신을 드러내신다.

→ 하나님(엘로힘) - 능력자의 하나님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불안해 하는 야곱에게 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도움을 베푸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시려 하신다. 아비 이삭을 인도하심같이 너도 동일한 사랑으로 돌보시겠다는 표현이다.

cf. 부모가 신앙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가 뭘 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자신도 그러한 인도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고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 야곱의 마음은 어떨까? ① 요셉을 만난다는 것에만 들떠서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할 수 있다. 두려움을 느껴도 다시 만난다는 기쁨에 덮어질 수도 있다. ② 다시 어디를 떠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③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했다는 것은 동행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기(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④ 야곱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중심감정을 짚어주신다.

-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 반복하여 재약속하시다-아브라함에게(12:2, 18:18), 이삭에게(26:4,24), 야곱에게(28:3,14, 35:11)

→ ‘거기서’ - 큰 민족을 이루실 약속을 이루실 구체적인 장소.(15:4,5,13,14)

cf. 우리도 자신에게 특별하면서 다양한 장소를 지난다. 그 장소들에서 고난도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다.

cf. 벧엘에서의 약속을 반복하시다.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cf. 3절은 가족과 민족에 대한 약속이라면 4절은 개인에 대한 약속이다. 처음 벧엘과 같은 형식의 약속을 하신다.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 46: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 "』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 야곱과 함께 이동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cf. 당시는 지역신의 관념이 있었다.

cf. 벧엘에서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cf. 다시 약속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 왜 다시 약속하실까? 하나님은 잊지 않으나 사람은 그 약속에 대해 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감정적 동요도 아시기에 그 해결방법은 다시 약속을 확신하여 주시는 자상함이다.

-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 ‘요셉이 네 눈 위에 그의 손을 둘 것이다’

→ 그의 죽음의 현장에 요셉이 있을 것을 알려주신다. 그에게 요셉이 없는 것은 죽을 것같은데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 요셉이 있다는 것은 야곱에게 안심이 될 것같다. 한번 경험한 두려움은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 두려움에서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게 하신다. 3절의 두려워말라는 내용에는 요셉에 대한 야곱의 마음도 함께 있으며,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게 한다.


* 야곱과 그 자손들이 애굽으로 가다.(46:5-7)

(창 46: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창 46:5) 『야곱 일행이 브엘세바를 떠날 차비를 하였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바로가 야곱을 태워오라고 보낸 수레에 태웠다.』

→ 이전에 의욕이 없던 야곱의 모습과는 달리 박진감이 넘친다. 하나님의 확실하고도 든든한 약속은 브엘세바에 있는 야곱을, 가나안을 넘지 못하는 야곱을 단호하게 넘을 수 있게 하였다.

Q. 굳이 야곱때 이집트를 가야했을까? 아들대에 가는 것은 안되는가? 지금 신앙의 중심, 구심점이 야곱에게 있기 때문이다.


(창 46:6)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창 46:6)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 모두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사불란하게 이집트로 내려간다.


(창 46: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창 46:7) 『이렇게 야곱은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

- 갔더라 -완료된 표현. → 이어지는 내용은 46:8-27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명단과 수


[정리]

① 요셉에 대한 소식은 야곱의 기운을 소생시킨다.

② 야곱의 심리에너지는 죽음에서 삶에로 방향을 돌린다.

③ 야곱의 소생과 과거의 훈련과 경험은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④ 하나님은 다시 약속한다. 민족적 약속과 개인적 약속

⑤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을 두려움에서 평안함으로 인도한다.


:

성경인물 16. 야곱 - 세겜에서 벧엘로 집으로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1. 3. 16. 18:34


야곱과 아들들의 잘못된 선택 - 평안추구와 복수


하나님의 재약속과 재경험


라헬의 죽음과 이삭의 장례


 

[야곱과 아들들의 잘못된 선택 - 평안추구와 복수]

인생가운데 다양한 아픔이 있다. 아픔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부모로써 겪게 될 아픔은 자녀의 아픔을 보는 것이다. 자녀에게 어려움과 위험이 처해질 수도 있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다시 부모의 마음과 삶에 상처가 된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신이 선택하고 가는 길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도망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회피를 하나씩 극복하여 주셨다. 그럼 그에게 주어진 자녀에 대한 아픔은 무엇인가? 디나의 상처와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Q. 34장은 왜 있을까? 35장 벧엘로 올라가게 된 원인이 34장인가?

Q. 여기서 느끼는 야곱의 감정은 무엇인가?


* 상황

- 야곱은 형과 헤어졌다. 수십년 쫓기는 삶을 살았던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쫓거나 힘들게 할 대상이 없어졌다. 더 이상 두렵거나 걱정하게 하는 대상이 없어졌다. 어릴 적 빼고 처음으로 마음이 평안하다.

- 오래 움직인 가축들이 쉬어야 한다. 잠시 쉬려고 했을까? 평안함을 누리고 싶었을까? 바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된다. 세겜 밭을 산다.

- 벧엘로 가지 않는다. 벧엘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잊는다.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19]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20]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b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b.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 순서 : 세겜에 장막을 친다→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산다→단을 쌓는다.

-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 평안히(솰렘) :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였기에 평안하다 할 수도 있다. 작게는 형과 헤어진 야곱은 세겜까지 평안하게 온다. 이 순간 야곱의 마음을 표현한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약속을 잊은 야곱에게 이후로도 세겜은 계속 평안하지 않다. 야곱이 가야할 곳은 벧엘(28:10-22)이었지만 야곱은 멈춘다.

→ 왜 세겜에서 제단을 쌓을까? 아브라함이 첫제사를 드린 곳으로 의미는 있지만 자신도 거기서 제단을 쌓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약속도 자신의 서원도 벧엘로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그럼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아버지가 있는 헤브론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순간 평안함을 느낀 야곱은 모든 것을 잊고 계속 남고 싶었진 것인가?

Q. 우리라도 고생 뒤에 현재 느끼는 평안함을 계속 누리고 싶지 않을까?


(창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창 34:1) 『레아와 야곱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그 지방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

→ 디나는 그 땅 여인들에게 갔다. 단순한 구경을 넘어 교제와 그들의 풍습을 배우는 의도가 있다. 이방인의 습성을 모르는 경솔함은 가족의 존속을 위협하는 결과까지 가게 된다.

cf. 사라(12:15, 20:2) 리브가(26:7)를 이방인들 마음대로 뺏길 위기가 있었다.

(창 12: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창 20: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 26: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 34:2-4)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창 34:2-4) 『[2] 히위 사람 하몰에게서는 세겜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세겜은 그 지역의 통치자였다. 세겜이 디나를 보자, 데리고 가서 욕을 보였다. [3] 그는 야곱의 딸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디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디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다. [4] 세겜은 자기 아버지 하몰에게 말하였다. "이 처녀를 아내로 삼게 해주십시오."』

-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 그 소녀를 사랑하여 ..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 가나안의 낮은 도덕관, 힘의 폭력.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자기가 좋다고 아내로 얻으려 한다. 죄에 대한 회개없이 욕망만 채우려다 종족이 몰살하게 된다.

cf. 율법은 사형(신22:24)『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 평안히 있을 줄 알았던 곳에서 곤란을 당하게 되었다.


(창 34:5-6) 『[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창 34:5-6) 『[5] 야곱이 자기의 딸 디나의 몸을 세겜이 더럽혔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의 아들들은 가축 떼와 함께 들에 있었다. 야곱은 아들들이 돌아 올 때까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청혼을 하려고 야곱을 만나러 왔다.』

- 더렵혔다 : 타메() 모독하다, 간음하다, 타락케하다, → 도덕적 불결함, 종교적 부정함

→ 야곱의 행동 : 디나의 소식을 듣는다-아들과 상의하기 위해 기다린다-잠잠한다

- 잠잠하다 : 하라쉬() 귀머거리가 되다, 아무행동도 취하지 않다. 야곱의 행동은 비통하고 신중하지만 하나님 앞에 다가가지는 않는다.

→ 하몰이 청혼을 하러 온다. 청혼은 가문의 대표가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과정에 대한 사과는 없이 결혼을 전하러 왔다. 당시 객지사람이지만 이삭과 에서의 배경을 가진 야곱과 그의 경제력을 얻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다.

→ 그 땅에서 평안히 있을 줄 알았던 야곱은 힘에 눌린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다.


(창 34: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창 34:7) 『와서 보니, 야곱의 아들들이 이미 디나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들에서 돌아와 있었다. 세겜이 야곱의 딸을 욕보여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 곧 해서는 안 될일을 하였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 야곱의 아들들은 근심하고 분노한다. ‘이스라엘’이란 표현으로 민족적 차원, 선민으로서 자부심을 위협한 것으로 이해한다. 세겜과 하몰의 부끄러움(어리석음, 사악함)에 대한 표현은 기본적인 도덕률과 양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Q.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창 34:8-12) 『[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창 34:8-12) 『[8] 하몰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 세겜이 댁의 따님에게 반했습니다. 댁의 따님과 나의 아들을 맺어 주시기 바랍니다. [9] 우리 사이에 서로 통혼할 것을 제의합니다. 따님들을 우리 쪽으로 시집보내어 주시고, 우리의 딸들도 며느리로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10] 그리고 우리와 함께 섞여서 여기에서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땅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에서 장사도 하고, 여기에서 재산을 늘리십시오" [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간청하였다. "저를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겠습니다. [12] 신부를 데려오는 데 치러야 할 값을 정해 주시고, 제가 가져 와야 할 예물의 값도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많이 요구하셔도 요구하시는 만큼 제가 치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디나를 저의 아내로 주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 하몰과 세겜은 이 지역에 있으면서 통혼을 통해 섞여서 살자고 제안한다. 명령조로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를 무시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을 이야기한다.

→ 그들은 도덕적인 잘못을 경제적인 논리, 물질적 배상으로 덮으려 한다. 혼인조건으로 정착권과 경제권을 제공한다고 한다.

→ 야곱에게 있어 이제 지역에 있으려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통혼이외에 방법이 없다.

cf. 수십년 타향살이를 했다가 그 땅에서 평안함을 경험한 야곱에게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10)는 유혹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있는 야곱에게 눈에 보이는 땅의 가치관을 제안한다.

→ 만약 야곱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찌되는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했던 모든 야곱의 삶은 무의미하게 된다.


* 야곱의 아들들의 속임과 복수

(창 34: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창 34:13)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이 그들의 누이 디나를 욕보였으므로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짐짓 속임수를 썼다.』

- 속임 : 미르마() ‘배반하다,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다’는 ‘라마()’에 파생됨

cf. 야곱의 사기(27:35), 라반의 아내바꾸는 속임(29:25), 요셉을 팔고 죽었다고 속임(37:31-35)


(창 34:14-17)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창 34:14-17) 『[14] 그들은 세겜과 하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15]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들 쪽에서, 남자들이 우리처럼 모두 할례를 받겠다고 하면 그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16] 그렇게 하면 우리가 딸들을 당신들에게로 시집을 보내고, 당신네 딸들을 우리가 며느리로 삼으며, 당신들과 함께 여기에서 살고, 더불어 한 겨레가 되겠습니다. [17] 그러나 당신들 쪽에서 할례 받기를 거절하면 우리는 우리의 누이를 데리고 여기에서 떠나겠습니다."』

→ 속임을 하려면 언어적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악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들이 원하는 하나가 되는 것이 되는 조건으로 할례를 제안한다. 야곱의 아들들은 속임수를 사용한다. 우발적인 것이 아닌 계획적인 복수이다. 언약의 징표를 악의 도구로 사용한다.


(창 34:18-24) 『[18]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자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창 34:18-24) 『[18]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이 내놓은 제안을 좋게 여겼다. [19] 그래서 그 젊은이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그들이 제안한 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만큼 그는 야곱의 딸을 좋아하였다. 세겜은 자기 아버지의 집안에서 가장 존귀한 인물이었다.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성문께로 가서,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1]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 땅에서 살면서, 우리와 함께 물건을 서로 사고팔게 합시다. 이 땅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딸들과 결혼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은 우리의 딸들과 결혼할 수 있게 합시다. [22] 그러나 이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와 한 겨레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사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처럼 우리쪽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3] 그렇게 하면 그들의 양 떼와 재산과 집짐승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대로 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할례를 받으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 것입니다." [24] 그 성읍의 모든 장정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제안한 것을 좋게 여겼다. 그래서 그 장정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다.』

→ 사랑에 눈먼 세겜이 자기 민족을 설득한다. 모든 사람을 눈멀게 한다. 모든 사람은 야곱의 재물에 눈 먼다. 제물에 대한 설득에 성주민들은 가볍게 할례를 받는다.

cf. 세겜의 강한 힘이 남을 누르기도 하지만 분별이 없을때 자신을 누르는 결과를 얻는다.

cf. 세겜은 환상에 빠져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될 것이라 기대한다.


(창 34:25-29)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창 34:25-29) 『[25] 사흘 뒤에 장정 모두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 곧 디나의 친오라버니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26]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도 칼로 쳐서 죽이고, 세겜도 칼로 쳐서 죽이고, 세겜의 집에 있는 디나를 데려왔다. [27]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서 털고, 그들의 누이가 욕을 본 그 성읍을 약탈하였다. [28]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와 성 안에 있는 것과 성 바깥 들에 있는 것과 [29] 모든 재산을 빼앗고, 어린 것들과 아낙네들을 사로잡고,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약탈하였다.』

- 시므온과 레위 : 레아의 아들이며, 디나의 오빠. 복수극의 주동자.

cf. 훗날 야곱은 임종시 이 일을 기억하고 그들의 잔인성을 지적한다.(49:5-7) 시므온과 레위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49:5)이며 그들의 분노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49:6) 야곱 중에 나뉘게 되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49:7)이라 저주한다.

-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27)

→ 두 아들을 주동으로 한 복수는 폭력을 더큰 폭력과 노략으로 갚는다. 정당한 명분을 넘어 인간적인 분노와 증오로 악을 저지른다.

cf. (레 24: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 아비의 불순종의 결과 자녀들의 문제해결방식에도 하나님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분노의 표출만 있다. 조절이나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다.


(창 34:30-31)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창 34:30-31) 『[30] 일이 이쯤 되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나무랐다. "너희는 나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제 가나안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이나,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를 사귀지도 못할 추한 인간이라고 여길 게 아니냐? 우리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합세해서 나를 치고 나를 죽이면 나와 나의 집안이 다 몰살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 복수극은 성공한다. 하지만 야곱은 주변 가나안 민족 때문에 두려워지게 되었다. 야곱의 두려움이 자극되었다. 멸망할 것이라는 부정적 생각을 하게 된다.

→ 아들들과 갈등을 보인다. 야곱은 아들들을 왜 막지 못했을까? 내심 허락하였다가 이정도까지 할지는 몰랐을까?

cf. 만약 라헬의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 이후 야곱은 이땅을 떠난다. 떠날 수밖에 없다.

→ 세겜사건이후 그는 다시 도망자가 될 신세가 되었다. 그런 입장에서 다시 언약의 장소로 돌아가다. cf 야곱은 왜 자유로울 때 벧엘로 가지 못했을까?

→벧엘로 → 에브랏(베들레헴)에 간다.


[정리]

① 눈에 보이는 평안이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하게 한다.

② 분노가 앞을 가리면 거룩한 것도 악의 도구가 된다.

③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고 인간적인 분노와 혈기만 앞세웠다.

④ 아버지의 속임이 아들에게 이어지고, 정직을 멈춘 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이상 모델이 되지 않는다.


야곱은 아버지의 부재로 아버지의 권위를 나타내지 않는다

건강한 해결책이 없다.

무섭고 두렵고 축나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재약속과 재경험]

파란만장한 야곱의 인생,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했던 인생,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던 야곱의 인생이 안정을 누릴 때 또다른 어려움이 생겼다. 자녀들로 인해 부딪히게 되었다. 세겜에서의 어려움, 아들의 살육은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무엇인가 전환이 필요하다. 그는 무엇으로 전환하며 그 주체는 누구인가?


* 구조 (35:1-15)

- 35:1 벧엘로 올라가서 ... 단을 쌓으라

- 2-8 벧엘에 이르고.. 단을 쌓고

- 9-15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 하나님의 개입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네가 너의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에 너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쳐라』

-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 야곱은 세겜과 아들들의 복수로 두렵게 되었다.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또다시 도망이었다. 이때 하나님이 오신다. 34장의 연속적인 결과이다.

→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그러나 야곱이라 부른다. 도망치던 때의 이름이다. 얍복 이후의 삶도 이스라엘의 삶이 아니었다. cf. 아직도 돌아오는 과정이다.(9)

- 일어나 → 막막한 상황에서 야곱에게 가장 먼저 시킨 것은 ‘일어나기’. 하나님은 더 이상 세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리이동이란 결단을 명령하신다.

cf. 1절의 동사 : 일어나, 올라가서, 거주하며, 쌓으라

- 벧엘로 올라가서 : 구체적인 목적지를 알려준다. 세겜(해발 590m)에서 벧엘(895m)로

→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는 고난을 받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라 하신다.

-  거기 거주하며 : 야솨브() 머물다, 거주하다-시간의 제약 없이 머무는 의미

→ 실패의 땅 세겜에서 완전히 분리할 것을 명령한다.

cf. 우리는 우울의 장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 하나님은 벧엘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기억하신다. cf. 야곱은 형과의 재회이후 다른 곳으로 간다. 그 기억을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 ‘네게 나타났던’ : 너를 보시다, 감찰하다, 주목하다. → 하나님이 야곱을 자세히 보셨다

-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 거기서 야곱이 할 것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 야곱을 향한 근본목적은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을 이행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

⇒ 다시 도망하게 된 야곱과 도망의 원인을 상기하고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한다.(재경험,재구조화)

cf.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내용과 구조가 같다.

(창 22: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cf. 요셉이 같이 있었을까?

야곱의 90-요셉의 출생, 재계약

야곱의 96-고향으로, 얍복에서 세겜으로

야곱의 108-요셉의 17세

야곱의 120-이삭의 죽음(180)

야곱의 130-이집트, 요셉이 39세

→ 요셉이 팔려간뒤 세겜에서의 살육이 있었을까?

⇒ 세겜에 머물면서 자녀로 인한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창 37:12-13)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창 37:12-13) 『[12]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양 떼를 치려고 세겜 근처로 갔다.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가 알고 있듯이 너의 형들이 세겜 근처에서 양을 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너의 형들에게 좀 보내야겠다. " 요셉이 대답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Q.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야곱에게 무엇이고 어떤 심정일까? 진정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과정인가?

(창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창 35:2) 『야곱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였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 가족 모두에게 말함으로 순종하도록 한다.

-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 ‘낯선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향하기 위한 행위

-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 직역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 스스로 깨끗케 하라’ 신체적 제사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하라.

-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 더 좋은 것을 바꾸다, 새것과 바꾸다. 정결의 의미

⇒ 삶을 바꾸자는 야곱의 강력한 결단


(창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 35:3)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 "』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 권유형, 벧엘로 올라가기를 재촉하고 있다.

cf. 급히 가려는 이유-세겜에서 있을 수 있는 목숨이 위험한 보복을 피하기(에서 때와 같다) 자신의 서원도 기억하신다.

-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 야곱이 예배하려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지 밝히고 있다. 응답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 벧엘에서의 서원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한다.

-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 1절의 말씀의 반복, 예배의 결단은 하나님에게로

1절

3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야곱이 가족에게 이르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cf. 전달자(중보자)의 역할-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가족에게 전해주는 사람이다. 라반의 집을 떠날 때했다. 다른 인물들도 그렇게 한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다.

⇒ 삶을 바꾸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는 야곱의 결단


* 2절의 실행

(창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고』

(창 35:4)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가져왔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

→ 특별한 고리나 장식품들은 해나 달 등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흔히 부적처럼 미신적인 목적으로 차고 다녔다.

→ 이것을 세겜에서 묻고 출발했다.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묻었다.


* 3절의 실행

(창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 35:5) 『그런 다음에 그들은 길을 떠났다. 하나님이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 발행하다 : 나싸() 말뚝을 뽑다는 말로 ‘이사한다’, 즉, 생활도구를 챙겨 완전히 철수한다는 의미.

→ 야곱에게 세겜은 자신이 결정한 곳이면서도 실패의 장소가 되었다.

→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는 떠남의 결단을 보인다.

-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 야곱이 두려운 것은 주변 고을의 공격이었다. 그들을 막은 것은 하나님이다. 벧엘로 올라가도록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 ex) 라반에게 나올때도 라반을 막으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에서도 추격하지 않았다.


(창 35:6-7)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창 35:6-7) 『[6] 야곱과 그가 거느린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베델에 이르렀다. [7] 야곱이 거기에서 제단을 쌓은 뒤에 그가 형을 떠날 때에 베델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생각하고, 그 곳 이름을 a엘베델이라고 하였다. (a. 베델의 하나님)』

→ 가나안에 돌아왔음에도 벧엘로 올라오지 않고 세겜에 머물던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벧엘로 오게 되었다.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 엘벧엘 : 야곱은 자신의 삶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기억하며 고백하기 위해 이렇게 불렀다. 이후 자손들은 ‘벧엘’이라 불렀다.


*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과 통곡

(창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창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서 베델 아래쪽 상수리나무 밑에 묻히니 사람들이 그 나무 이름을 b알론바굿이라고 하였다. (b. 통곡의 상수리나무)』

→ 추측 : 야곱은 집을 떠나고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드보라의 죽음은 그 어머니를 회상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이삭과의 관계가 좋아졌을 것이다. 야곱이 선택한 세겜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벧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이삭의 장례에 에서와 야곱이 함께 한 것은 벧엘이 가정의 평화까지 만들어준 사건임을 짐작케 한다.


*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재확증

(창 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창 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뒤에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 직역 ‘그가 밧단아람으로부터 왔을 때’

→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나타난 시점과 복을 주신 이유

→ 밧단아람은 라반과 있었던 곳. 그곳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것은 이미 오래전임에도 이제야 돌아왔다고 한다.

-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 5번째 자신을 보이신다.

→ 집을 나갈 때(28:10-22 꿈), 라반의 집을 떠나라하실 때(31:11-13 꿈), 얍복에서(32:24-32), 벧엘로 올라가라 하실 때(35:1)

→ 이유는 ‘복을 주시기’ 위해


* 복의 내용

(창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 35:10)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이 야곱이었지만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 얍복의 경험이 다시 확인된다. 야곱에게 개인적인 약속의 재확인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c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c. 히, 엘 샤다이)』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cf.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생육하며 번성하라. → 창조의 하나님, 생육과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신다.


(창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창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

→ 아브라함때부터 이어지는 약속의 계승→이후 민족에게로 이어진다.

⇒ 하나님의 약속은 우주적, 민족적, 개인적 약속이며, 이것을 야곱의 삶을 통해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다.


(창 35: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창 35:13)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야곱과 말씀하시던 곳을 떠나서 올라가셨다.』

→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임하셨다가 올라가시는 모습은 아브라함과 언약갱신을 마치신 후의 모습과 같다. (창 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창 35: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 35:14)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을 나누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부어 드리는 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 형을 피할 때 벧엘에서(28:18), 라반과의 계약때 길르앗에서(31:45), 다시 벧엘에 돌아와서(14), 라헬의 묘비(20)

(출 24: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신 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수 4:20)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창 35: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창 35:15)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을 나누시던 곳의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 그와 말씀하시던 곳(13)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14,15) → 벧엘


[정리]

①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자녀를 통한 어려움으로 나타난다.

② 상황 속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그가 선택할 것은 도망이다.

③ 도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꾼다.

④ 야곱은 자신의 삶을 점검해야할 시점이 되었다.

⑤ 삶의 모습을 바꾸려는 결단을 보인다-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간다는 의미

⑥ 말씀의 전달자로 충실한 야곱의 모습

⑦ 하나님은 야곱에게 재약속을 하신다. 우주적 민족적 개인적 약속


[라헬의 죽음과 이삭의 장례]

야곱의 이야기는 다시 올라간 벧엘, 라헬의 죽음과 이삭의 죽음이 기록된 35장으로 끝난다. 이어지는 36장은 에서의 족보가 나오고 37장은 요셉이야기로 넘어간다. 결국 이어지는 야곱의 이야기는 요셉이야기 속에서, 이제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나온다.


* 베냐민의 출생과 라헬의 죽음

(창 35:16-17)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창 35:16-17) 『[16] 그들이 베델을 떠나 에브랏에 아직 채 이르기 전에, 라헬이 몸을 풀게 되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였다. [17] 아이를 낳느라고 산고에 시달리는데 산파가 라헬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

→ 벧엘에서 에브랏의 사이에 있었던 일, 에브랏=베들레헴

→ 라헬의 난산, 산파의 이야기

cf. 베들레헴으로 가는 난산인 라헬 vs 예수의 출산을 앞둔채 베들레헴에 들어가는 마리아

   출산후 사망한 라헬 vs 출산후 마굿간에 있던 마리아


(창 35: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 35:18) 『그러나 산모는 숨을 거두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d베노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e베냐민이라고 하였다. (d. 내 슬픔의 아들 e. 오른손의 아들)』

→ 난산후 죽게 되면서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라고 불렀다. 마지막 순간 라헬의 감정은 슬픔, 요셉을 잃은 슬픔 뒤에 낳은 아들이다.

(렘 31: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렘 31:15) 『<라헬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 2:18) 『i"라마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 (i. 렘 31:15)』


cf. 요셉을 잃은 야곱의 슬픔

(창 37:31-35)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 오래도록 애통, 위로를 받지 않음, 스올로 가겠다고 함, 울다.

-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 야곱에게 베냐민은 어떤 아들인가?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은 어느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편애하던 야곱의 마음은 너무나 힘들다. 이후 벧엘로 올라가고 난산으로 아내가 죽고, 아내가 지은 이름이 아닌 ‘오른손의 아들’이란 이름을 짓는다. 야곱의 마음은 슬픔에 빠지기 보다는 요셉을 대신하는 오른손과 같은 역할을 생각한다.

Q. 벧엘의 재경험이 더욱 그러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첫벧엘은 앞으로의 미래, 다음 벧엘은 지금까지의 삶을 확인하고 앞으로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이 되는 장소였다.


(창 35:19-20)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창 35:19-20) 『[19]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20]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 라헬의 장례와 묘비

cf.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0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


* 야곱의 이동

(창 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창 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서 에델 망대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장막을 쳤다.』


* 역기능적 가족모습

(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창 35:22) 『이스라엘이 바로 그 지역에서 머물 때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하였는데 이스라엘에게 이 소식이 들어갔다.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다.』

- 르우벤-레아의 첫아들, 이일로 장자의 상속권을 상실한다.(창 49:4)

(창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① 세겜 : 요셉을 잃고, 시므온과 레위의 살육

② 벧엘 : 약속의 재경험

③ 베들레헴 :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출생

④ 에델망대 : 르우벤의 죄. Q. 르우벤과 라헬의 종이었던 빌하는 왜 동침했을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아픔인가?

⑤ 기럇아르바의 마므레(27) :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 야곱의 12아들

(창 35:22b-26) 『[22] ..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 모계로 구분되는 12아들, 이후 12지파의 완성을 말한다.


* 이삭의 죽음과 장례

(창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창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 근처 마므레로 가서,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헤브론이다.』

- 기럇아르바의 마므레 : 이제야 아브라함과 이삭이 머무는 헤브론에 왔다. 에서는 에돔으로 갔지만 장자가 된 야곱은 완전한 귀향을 이루게 되었다.


(창 35:28-29)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 35:28-29) 『[28] 이삭의 나이는 백여든 살이었다. [29] 이삭은 늙고 나이가 들어서 목숨이 다하자 죽어서 조상들 곁으로 갔다.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


* 야곱에게 아버지의 죽음이란?

① 먼길을 돌아오게 한 원인. (창 27:1-2)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② 회피의 삶을 선택하게 했던 원인. (창 27:42-44)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③ 이삭의 장례식 : 산자의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로 그 자리에 있다.

④ 형과의 한자리 : 진정으로 화해의 결과 모습


* 야곱에게 아내의 죽음이란?

① 가장 외로울 때 만난 여인, 엄마 리브가를 닮아 엄마를 대신하게 한 아내

② 엄마에게는 따라야 했지만 아이를 낳게 하라는 라헬의 요구에는 화를 내었다.

③ 자신의 사랑과 관심은 라헬을 넘어 요셉과 베냐민에게까지 이어진다.

④ 이런 야곱이 라헬에게 묘비를 세워주지만 슬픔에 빠지기 보다는 베냐민을 통해 이겨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리]

① 형을 피해 도망하던 야곱을 다시 벧엘로 돌아오게 하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② 용기를 갖고 벧엘로 돌아오겠다는 야곱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신다.

③ 야곱이 주연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④ 벧엘로 돌아온 야곱은 아내와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다. 시간의 흐름을 경험한다.

⑤ 그들의 죽음을 극복하고 있다. 

:

성경인물 16. 야곱 - 하나님과 함께 고향으로

성경인물탐구/창세기인물 2011. 1. 28. 11:30

[야곱의 반복된 선택과 하나님의 도우심]

바르지 않은 선택으로 타지에서 살게된 야곱은 가정을 세우고 하나님의 지켜주심으로 재산도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처가에 있을 수 없게 된 야곱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떠나라 하시고 아내들도 이에 동의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떠나는가?하는 시기와 방법이다. 그리고 야곱은 어떤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선택하는가?


* 야곱의 상황

① 계약기간이 끝났다. → 더 이상 라반이 변경할 것이 없다.

② 가족을 세우고 빈손이 아닌 재산이 많아졌다. → 정직과 성실의 노력과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있었다.

③ 라반과도 아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다. → 시기의 표현을 보고 들어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다.

④ 아내가 동조해 준다. → 아버지에 대한 반감까지 있다.

⑤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음을 깨닫는다.

⑥ 하나님의 명령 →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하신다.

⇒ 모든 것이 야곱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Q. 이제 정식으로 인사하고 떠나면 어떻게 될까? 라반이 순수히 보내줄까, 아니면 요셉이 태어날 때처럼(30:25-) 계약조건을 제시할까? 계속 붙잡으려는 라반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야곱을 인도하실까? 정직을 배워가는 야곱에게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31:13)하신 뜻은 라반에게 말하지 말고 떠나라는 뜻일까? 아니면 라반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단호함의 표현일까? 야곱이 정직을 선택했다면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벧엘의 약속 안에서 어떻게 이루실까?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cf. 리브가의 결혼때 아브라함의 종도 리브가도 지체하지 않겠다고 했었고 잠시 머물기를 원했던 라반은 막지 못했다. 지금 야곱도 딸들도(리브가를 닮은 라헬) 당당하게 말했다면 붙잡지 못하지 않았을까?


* 야곱은 어떻게 하는가?

(창 31:17-18)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창 31:17-18) 『[17] 야곱이 서둘러서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에 나누어 태우고, [18] 그가 얻은 모든 짐승과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서, 가나안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 인사없이 야곱은 자식과 아내들과 떠날 준비부터 마치고 가나안땅으로 출발한다. 목적지는 가나안땅 아버지 이삭에게 가려 한다.


* 시기와 방법은 무엇인가?

(창 31:19-20) 『[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창 31:19-20) 『[19] 라헬은 라반이 양털을 깍으러 나간 틈을 타서 친정집 수호신의 신상들인 드라빔을 훔쳐 냈다. [20] 그뿐만 아니라, 야곱은 도망칠 낌새를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 아람 사람 라반을 속이고 있다가,』

→ 언제 :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을 때 - 며칠동안 계속되는 양털깎는 일은 연례행사로 친구를 초청하여 잔치를 연다. 이같은 상황은 라반의 감시가 소홀해지는 시기임을 야곱은 알고 있었다.

→ 방법 : 아무도 모르게 도망칠 낌새도 보이지 않다가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cf. 라헬은 왜 드라빔을 훔쳤을까? 그들을 추격한 라반에게 하나님은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하지만 라헬의 욕심으로 인해 라반은 야곱의 귀향을 막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막을 수 있는 위험한 빌미를 주었다.


(창 31: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창 31:21) 『모든 재산을 거두어 가지고 도망하였다. 그는 a강을 건너서 길르앗 산간지방 쪽으로 갔다. (a. 유프라테스 강)』

→ 밧단아람에서 길르앗 산까지 480km로 열흘이 걸린다. 이는 하루 평균 48km로 가축을 몰면서 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달릴 수밖에 없는 야곱의 마음은 라반이 쫓아올 것이라는 불안이 가득했을 것이다.


* 그럼 라반의 반응은?

(창 31:22-23) 『[22]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창 31:22-23) 『[22]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지 사흘 만에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23] 라반은 친족을 이끌고 이렛길을 쫓아가서 길르앗 산간지방에서 야곱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 3일 뒤 야곱의 도주소식을 듣고 자기 형제들을 데리고 7일을 쫓아 붙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밧단아람에서 길르앗 산까지 480km로 야곱의 평균 48km에 비해 라반의 7일간 추격은 약 70km 씩으로 아주 빠르게 추격하였다.

→ 야곱의 도주는 라반을 분노하게 한다. 또한 야곱을 붙잡을 명분이 없는 라반에게 다시 억지를 부릴 수 있게 한다. 7일간 오로지 야곱을 붙잡을 분노로 가득해졌을 라반은 추격을 하면서 명분을 세웠을 것이다.(26-30)


* 이런 라반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창 31: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창 31:24) 『그 날 밤에 아람 사람 라반이 꿈을 꾸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 라반은 바로 앞까지 추격하였다. 내일이면 무방비상태의 야곱을 공격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달려온 라반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 하나님은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개입하신다. 지금까지 상대의 표현을 빌어 입으로만 표현하던 라반은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한다. 야곱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이다.

-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 ‘선으로부터 악까지’ 모든 것을 말하지 말라.

→ 하나님은 야곱과 관련된 어떤 것도 옳고 그름을, 좋고 나쁨을 판단하거나 시비를 가리지 말라 하신다. 돌아가자는 말이나 책망의 말도 하지 말라 한다.

→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라반의 마음은 어땠을까? 분노로 가득한 라반은 모두 해할 기세였다. 그런데 꿈에서 절대명령을 받은 라반은 두려움이 생겼다. 그 하나님이 야곱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cf. 죽음같은 다른 극단적이면서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꿈을 통해 라반을 막으신다. 만약 죽음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라반만 죽어서는 안된다. 라반의 아들과 형제들까지 그 공동체까지 죽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꿈에 나타나 라반에게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막으신다. 야곱을 해할 수도 있는 라반을 막으셨다.

(창 31: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창 31:29)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얼마든지 해칠 수 있네. 그러나 어젯밤 꿈에 자네 조상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에게 경고하시기를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셨다네.』


* 야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창 31:25)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창 31:25) 『라반이 야곱을 따라잡았을 때에 야곱이 길르앗 산간지방에다 이미 장막을 쳐 놓았으므로 라반도 자기 친족과 함께 거기에 장막을 쳤다.』

→ 라반이 도착하여 보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쳤다. 장막은 이동할 때 운반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이동식주거지이다. 여기서 ‘쳤다’는 말은 땅에 고정시켰다는 의미이다. 어느정도 라반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안심한 야곱은 지친 가족들과 가축들을 쉬게 하였다.


→ 이때 안심하고 있는 야곱에게 들이닥친다. 분노로만 가득했다면 해하였을 라반이 꿈에서 하나님의 절대명령을 받았지만 야곱에게 자신이 할 말은 한다.

* 라반의 논조와 억지

(창 31:26-30)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창 31:26-30) 『[26] 라반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자네가 나를 속이고 나의 딸들을 전쟁 포로 잡아가듯 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27] 어찌하여 자네는 나를 속이고, 이렇게 몰래 도망쳐 나오는가? 어찌하여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가? 자네가 간다고 말하였으면 북과 수금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며 자네를 기쁘게 떠나 보내지 않았겠는가? [28] 자네는 내가 나의 손자 손녀들에게 입을 맞출 시간도 주지 않았네. 자네가 한 일이 어리석기 짝이 없네. [29]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얼마든지 해칠 수 있네. 그러나 어젯밤 꿈에 자네 조상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에게 경고하시기를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셨다네. [30] 자네가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찌하여 나의 수호신을 훔쳤는가?"』

① 네가 나를 속이고(26) - 알리지 않았음을 책망한다. 자신이 막았을 것은 들어내지 않는다.

②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26) → 딸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하나, 딸들은 오히려 아버지에 대해 실망하고 스스로 야곱을 따라 갔다.

③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27) → 관례적인 멋진 환송식을 했을 것이라 하나 계속해서 야곱을 속이거나 물리적인 힘을 동원했을 것이다.

④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27) → 속이고 도망하였다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든 머물게 하려 했을 것이다.

⑤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28) → 자연스러운 혈육의 정을 막았다 하며 자신을 정이 많고 손자들을 아낀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14-16에서 보듯이 라헬과 레아는 자신과 자식에게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라반이 취하셨다고 한다.

⑥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28) → 혈육과 작별의 정조차 나누지 못하게 한 야곱의 행위가 우둔하고 어리석다고 강하게 질책하며 자신의 불만을 부각시키고 있으나 야곱은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라반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은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⑦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29) → ‘너를’은 복수형으로 ‘너희들에게’이며 해를 가할 대상은 야곱뿐 아니라 모든 일행들이었다. 고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야곱은 그대로 위험에 처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 이렇게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야곱에게만 철저히 잘못이 있음을 덮으려는 라반이었다. 그렇게 야곱은 생명까지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⑧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였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명령이 아닌 절대 그대로 지켜야하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라반은 자신의 논조와 억지를 모두 말한다.(26-30)

⑨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 직역 “네가 네 아비 집을 정말 사모하기 때문에 네가 정말 떠났다”

→ ‘옳거니와’ - 라반은 야곱이 고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서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즉 야곱의 행위는 야곱의 목숨을 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말하지 말라 하여 더 이상은 막지는 않겠는 의미이다. 그러나 따질 이야기는 모두 다 했고 마지막으로 하나더 물어본다.

⑩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 복수형으로 여러개의 드라빔을 말한다.

→ 드라빔은 조상대대로의 가정수호신이자 재산상속의 합법성을 보장해 주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말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지만 드라빔이 발견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다시 번벅할 수 있기에 끝까지 말한다. 언제나 번벅하는 라반의 특징이다.


* 야곱의 두려움

(창 31:31-32) 『[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창 31:31-32) 『[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였다. "장인께서 저의 처들을 강제로 빼앗으실까 보아 두려웠습니다. [32] 그러나 장인 댁 수호신상들을 훔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죽이셔도 좋습니다. 장인의 물건 가운데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저에게 있는지, 우리의 친족들이 보는 앞에서 찾아보시고 있거든 가져 가십시오." 야곱은 라헬이  그 수호신상들을 훔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 야곱은 두려웠다고 한다. 해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한다. 두려움의 대상이었음을 고백한다.

-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 생명의 생사결정은 하나님께 있음에도 두려운 마음으로 라반에게 넘긴다. 몰랐다고 하기에는 가족을 보호할 마음이 약하다.

cf. 아브라함도 이삭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 두려움은 얍복나루에서 그대로 나온다.

→ 야곱은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말한다. 또한 자신의 정직을 강조한다.


* 라반이 집착

Q. 해할 능력과 권한이 있는 라반..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다면 아무말도 하지 말고 인사만 하고 가야하지만 가족신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딸들의 장막을 뒤진다. 만약 드라빔이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창 31: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창 31:33) 『라반은 먼저 야곱의 장막을 뒤졌다. 다음에는 레아의 장막과 두 여종의 장막까지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레아의 장막에서 나온 라반은 라헬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 순서 : 야곱-레아-두 여종-라헬 순이다.

→ 상대의 허락없이, 예의없이, 수색영장도 없이, 권리도 없이 오로지 드라빔을 찾기 위해 뒤진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사람의 입장과 상황은 상관없이 자기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집착하는지 보여준다.

Q. 라반의 기준은 무엇일까? 왜 레아를 야곱 다음으로 확인했을까? 만약 장막을 치지 않았다면 라헬이 연기할 수 있었을까?


(창 31:34-35)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 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창 31:34-35) 『[34] 라헬은 그 수호신상들을 낙타 안장 밑에 감추고서 그 위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라반은 장막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35] 라헬이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저는 월경중이므로 내려서 아버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라반은 두루 찾아보았으나 끝내 그 수호신상을 찾지 못하였다.』

→ 근동에서 월경중의 여인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로 종교의식이나 외부와의 접촉도 금기이다.

→ 라반이 라헬을 조사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관습으로 자신이 부정해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 라헬의 말을 믿는 것은 부정한 상황에서 신으로 여겨지는 드라빔을 깔고 앉았으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할말있는 야곱과 하나님의 반전

(창 31:36-42)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창 31:36-42) 『[36] 야곱은 화를 내며 라반에게 따졌다. 야곱이 라반에게 물었다. "나의 허물이 무엇입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불길처럼 달려들어서 저를 따라오신 것입니까? [37] 장인께서 저의 물건을 다 뒤져 보셨는데 장인의 물건을 하나라도 찾으셨읍니까? 장인의 친족과 저의 친족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내놓아 보십시오. 그리고 장인 어른과 저 사이에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이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8] 제가 무려 스무 해를 장인 어른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 동안 장인 어른의 양 떼와 염소 떼가 한 번도 낙태한 일이 없고, 제가 장인 어른의 가축 떼에서 숫양 한 마리도 잡아다가 먹은 일이 없습니다. [39] 들짐승에게 찢긴 놈은 제가 장인에게 가져가지 않고, 제것으로 그것을 보충하여 드렸습니다. 낮에 도적을 맞든지 밤에 도적을 맞든지 하면, 장인께서는 저더러 물어내라고 하셨습니다. [40] 낮에는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것, 이것이 바로 저의 형편이었습니다. [41] 저는 장인 어른의 집에서 스무 해를 한결같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두 따님을 저의 처로 삼느라고, 십 년 하고도 사 년을 장인 어른의 일을 해 드렸고 지난 여섯 해 동안은 장인 어른의 일을 양 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장인께서는 저에게 주셔야 할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셨습니다. [42] 나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이시며 이삭을 지켜 주신 두려운 분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으면 장인께서는 저를 틀림없이 빈 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겪은 고난과 제가 한 수고를 몸소 살피시고 어젯밤에 장인 어른을 꾸짖으셨습니다."』

→ 야곱의 감정 : 화가 나다. 그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명분이 있느냐 친족앞에서 말하라→20년간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다→그러나 당신은 열 번이나 변경했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셨다.

→ 광경 : 야곱은 따지고 라반은 들어야만 한다. 라반과 같이 온 사람들도 들어야 한다.

⇒ 같이 야곱을 잡으려 온 라반의 형제들 앞에서 라반이 부끄럽게 되었다. 라반을 죽이는 것보다 더큰 효과를 거둔다. 불가침 조약을 맺게 한다. 이것은 야곱에게도 더 이상 뒤를 볼 수 없게 한다.


Q. 야곱은 왜 도주하여야 했을까?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현재 라반에게는 야곱을 붙잡을 수 있는 명분이 없다. 오히려 도주함으로 명분을 주었다. 속이는 라반에 대해 야곱이 훈련받은 것은 정직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정직을 선택하지 않고 도주라는 속임을 선택한다.


▶ 그럼, 무엇이 야곱을 끝까지 정직과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게 했을까?

→ 불안과 두려움

(창 31: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창 31: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였다. "장인께서 저의 처들을 강제로 빼앗으실까 보아 두려웠습니다.』

→ 야곱이 몰래 도주한 결정적인 이유는 라반의 자식들의 시기와 라반의 태도 속에서 가족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 불안과 두려움은 바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한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본능적으로 회피 또는 공격을 선택한다.


▶ 야곱은 왜 두려움이 있을까?

① 홀로 되는 두려움 - 집에서 나올때 모든 것이 자신의 것임에도 모든 것을 놓고 와야하고 홀로 였다는 것이다.

② 익숙한 두려움? - 도주할 시기에 다시 발동하게 된 감정.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 느낀 감정을 라반을 피해 도주해야하는 상황에서 떠올랐을까? 이어지는 에서와의 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 야곱에게 회피는 무엇인가?

① 익숙한 방법 : 한번 해보았고 그것으로 안전해졌었다. 에서 몰래 도망하듯 라반 몰래 도주한다.

② 부모가 가르쳐준 방법 : 부모는 에서와의 상황에서 피하라 한 것이지 모든 것에 적용하라 한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메시지를 무의식중에 적용한다.


▶ 같은 결과인가? 아니다.

① 에서는 쫓아오지 않았지만 라반은 쫓아왔다.

② 에서는 부모가 막았지만 라반은 막을 사람이 없었다.

→ 그런데 하나님이 막으셨다.

⇒ ∴이는 에서를 막으신 것도 라반을 막으신 것도, 즉 야곱을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정리]

① 불안과 두려움은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한다.

② 상황에 따라 주관적인 감정이 흐른다.(불안-안심, 긴장-당당)

③ 야곱의 삶에 하나님의 지키심이 없다면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④ 야곱의 시각은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보신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만나다]

지난 주 나눈 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정직으로 인도하시는데 야곱은 왜 도망이란 반복을 행할까?였다. 그의 불안은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제한된 시각의 야곱을 위해 하나님은 라반을 막아주시고 반전을 이루시면서 야곱의 속마음을 말하게 하셨다. 이제 처지가 달라졌다. 추격해온 라반은 명분이 없어졌고, 야곱은 더 당당해졌다.


* 라반의 생색과 억지

(창 31:43-44)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창 31:43-44)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였다. "이 여자들은 나의 딸이요, 이 아이들은 다 나의 손자 손녀요, 이 가축 떼도 다 내 것일세. 자네의 눈 앞에 있는 것이 모두 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 있는 나의 딸들과 그들이 낳은 나의 손자 손녀를, 이제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44] 이리와서 자네와 나 사이에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이 우리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세."』

→ 딸들과 자식과 양떼가 자기 것이라 하지만 모든 것은 야곱의 정당한 노동의 댓가였다.

→ 할말없게 된 라반이 제안한 것은 다시 계약을 맺자는 것. 마치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항상 내기꺼리를 찾듯이 이 상황에서도 라반이 선택하는 것은 계약을 맺자한다. 왜? 계약만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 명분없는 라반의 생색 : 모두 내것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이렇게 말하는 라반의 목적 : 반전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고

-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① 이제 라반은 야곱과 계약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보복금지명령에도 보복하려 했는데 끝까지 야곱을 지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야곱이 분노를 폭발하였다.

② 훗날 드라빔을 발견한 야곱이 ‘재산상속권’을 요구할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③ 점점 강성해지는 야곱이 더욱 강성하여 자신에게 복수하러 올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④ 야곱이 도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합법적으로 보내 주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림으로 야곱을 박대하여 도망하게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창 31:45-46)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창 31:45-46) 『[45] 그래서 야곱이 돌을 가져 와서 그것으로 기둥을 세우고, [46] 또 친족들에게도 돌을 모으게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 와서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 돌무더기 옆에서 잔치를 벌이고, 함께 먹었다.』

→ 주체 : 계약은 라반이 하고 돌은 야곱이 가져온다. 야곱의 적극적 반응이다. 야곱은 돌을 가져 기둥을 세우고 그 형제들도 돌을 모으게 했다.


(창 31:47-48)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창 31:47-48) 『[47]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b여갈사하두다라고 하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하였다. (b. 증거의 무더기를 아람어로는 여갈사하두다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갈르엣이라 함) [48] 라반이 말하였다. "이 돌무더기가 오늘 자네와 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거일세." 갈르엣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증거의 무더기 : 라반은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 야곱은 히브리어로 ‘갈르엣’

→ 라반이 아람어로 이름을 붙였음에도 굳이 히브리어로 다시 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주체성을 갖는 행위이다.

⇒ 야곱은 점점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자신을 분노케 한 라반에게 평화적으로 행동하면서도 그동안 제대로 자기주장을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한다.


(창 31: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창 31:49) 『이 돌무더기를 달리 a미스바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라반이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 주께서 자네와 나를 감시하시기 바라네"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a. 망루)』

→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 그분께서 야곱과 자기 사이를 살펴주시기를 바라는 라반의 기원과 소망이 담겨진 말처럼 표현한다. 변하지 않는 라반의 스타일이다.

⇒ 예전에는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상대의 신을 불렀다면 지금은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여전히 자기 위주의 생각을 하지만 방법은 자기방식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바뀌고 있다.


* 라반의 조건

(창 31:50-53)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창 31:50-53) 『[50] "자네가 나의 딸들을 박대하거나, 나의 딸들을 두고서 달리 아내들을 얻으면 자네와 나 사이에는 아무도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네와 나 사이에 증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게. " [51] 라반은 야곱에게 또 다짐하였다. "이 돌무더기를 보게. 그리고 내가 자네와 나 사이에다 세운 이 돌기둥을 보게. [52] 이 돌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돌기둥이 증거가 될 것이네. 내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 자네 쪽으로 가서 자네를 치지 않을 것이니, 자네도 또한 이 돌무더기와 이 돌기둥을 넘어 내가 있는 쪽으로 와서 나를 치지 말게.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우리 사이를 판가름하여 주시기를 바라네. " 그러자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을 지켜 주신 두려운 분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

→ 딸에 대해 굉장히 걱정하는 것같이 들린다. 그러나 과거에 중혼을 강요한 것은 라반 먼저였다. 즉 ‘내 말대로만 하고 내가 행한대로는 하지 말라’는 식이다. 라반의 언행불일치의 모습이고, 딸들도 그런 아빠의 모습을 알고 있다.

→ 라반은 절대금지를 표현함으로 자신의 바램을 드러낸다. 라반은 더욱 강해질 야곱과 그렇게 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① 라반은 다신론적 관점-라반 자신의 조상의 신과 연결하여 말한다. 아브라함의 신을 그 위의 신과 연결시킨다.

② 라반은 더 많은 신을 야곱과의 계약에 개입시킴으로 야곱이 그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리라 생각한다. 야곱도 자신과 같은 신관을 가지고 있으리라 본다.

③ 자신의 드라빔이 없어진 상황에서 라반의 두려움은 너무나 크다.

⇔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

① 야곱에게 신관은 유일신관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서 위가 아닌 아래로 내려오며 이삭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② 라반은 여러신들에게 ‘판단하소서’하였지만 야곱은 ‘경외하는’ 한분에게만 맹세한다.

③ 불안한 라반과 달리 야곱은 흔들림이 없다.


(창 31:54)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창 31:54) 『야곱은 거기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친족들을 식탁에 초대하였다. 그들은 산에서 제사 음식을 함께 먹고 거기에서 그 날 밤을 보냈다.』

- 제사를 드리고 : 제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제사였다.

→ 당시 중근동 지방에서 언약이나 동맹관계를 위한 계약을 맺고 나서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뜻으로 희생제사를 드리고 남은 음식을 함께 먹던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계약을 맺은 당사자간의 화해와 우정을 다지고 계약의 진실성을 확인하고 계약의 내용에 동의함을 확인하였다.

-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 라반의 형제들로 좀 떨어져 있던 그들을 가까이 불러들여 무더기처럼 계약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눈다.

→ 제대로 계약식을 행하고, 증인들과 음식도 나눈다.

cf. 만약 하나님이 라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하지 않고 라반에게 죽음이나 다른 방법으로 이곳에 없게 되었다면 이 제사도 없고 같이 데려온 사람들이 증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 라반의 자손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 이삭과 야곱의 부인이 신앙과 종족을 지키기 위해 라반에게 갔었지만, 이후 라반과의 관계는 없다.


* 라반의 작별인사

(창 31: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창 31:55) 『라반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손자 손녀들과 딸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에게 축복하고, 길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 입맞추며, 축복하고 : 라반의 적극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딸과 손자에게 적극적으로 축복한다.


※ 고향으로 돌아갔더라(31:55) vs 길을 가는데(32:1)

→ 라반은 라반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길을 간다. 이 둘은 더 이상 뒤돌아갈 수도 영향을 줄수도 없게 되었다.

Q. 모든 과정을 보던 야곱은 자신의 길을 가면서 어떤 마음일까? 안도와 불안이 함께 있지 않을까? 이런 과정 속에서 라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한 것이 없고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면서 안도를, 앞으로 만날 에서를 생각하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막막하기에 불안이.. 이제는 뒤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만 가야한다.


* 마하나임

(창 32:1-2)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 32:1-2) 『[1] 야곱이 길을 떠나서 가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앞에 나타났다. [2] 야곱이 그들을 알아보고 "이곳은 하나님의 진이구나!"하면서 그 곳 이름을 b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b. 두 진지)』

- 하나님의 사자(창세기에 4번, 여호와의 사자 6번)

(창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창 31: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① 하나님의 사자의 역할 :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② 만남의 주체 :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만난다.

③ 사자를 만나고 새로운 일이 있었다.

⇒ 요셉이 태어날 때 떠나려 했던 야곱이 붙잡혔지만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의 명을 받은 야곱은 출발한다. 에서를 만나야할 상황 앞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cf. 여호와의 사자

* 이스마엘의 출생예언

(창 16:7-11)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 이삭-모리아산에서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이삭의 부인을 택하는 과정

(창 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창 24:40)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비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 야곱에게 보인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은 군대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에서와의 만남이 기다려지고 있다.

cf. 왜 하나님의 사자가 군대가 되었을까? 앞으로 다가올 불안의 대상이 군대일까?

(창 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창 32:6) 『심부름꾼들이 에서에게 갔다가 야곱에게 돌아와서 말하였다. "주인 어른의 형님인 에서 어른께 다녀왔습니다. 그분은 지금 부하 사백명을 거느리고 주인 어른을 치려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군대는 평안함을 준다. 형 에서의 400명은 불안을 준다. 다시 야곱을 불안 속으로 넣는다.


[정리]

① 야곱은 라반과의 재계약에서 유일한 자기의 하나님을 고백한다.

② 야곱은 히브리적 정체성과 유일신관을 표현한다.

③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먼저 만난다.

④ 하나님의 사자는 여전히 불안한 야곱의 삶을 인도한다.

 - 추가하는 내용

① 라반에게 정직을 배운 야곱, 불안으로 옛방식을 사용하지만 라반에게 불안했음을 정직하게 말한다.

② 야곱과 라반이 만날때는 관계가 깨질 수밖에 없는데 기념비를 세우게 되면서 하나님은 둘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셨다. 서로에 대한 경계를 짓는 모습을 이루게 된다.


 

[야곱의 두려움과 자기 방식]

라반과의 원만한 결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야곱은 계속 불안하지만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반전이 되고 기념비를 세움으로 서로에 대해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 지어졌다. 이후 야곱은 계속 길을 가고 하나님의 군대(마하나임)을 만난다.

* 질문

① 야곱은 서로 넘어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기념비를 계속 좋아했을까?

② 하나님의 군대를 만남으로 무슨 생각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③ 우리라면 무엇을 먼저 할까? 가까이 있는 이삭에게 일까, 아니면 멀리 있는 에서에게 일까?

④ 아버지 이삭에게 갔다면 보호받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을까? 에서가 에돔에 있다는 것을 알 정도면 이삭의 생존소식도 알았을 것이다.

⑤ 형 에서에게 먼저 연락한 것은 에서가 강하기 때문이고 이삭이 그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여겨서 일까?

⑥ 이삭의 하나님은 찾아도 이삭은 찾지 않는다? 가나안에 있으면서 사망전까지 이삭에게 가지 않는다. 어머니가 있었으면 갔을까?


*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가기 전 형에게 소식을 전한다.

(창 32: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창 32:3) 『야곱이 에돔 벌 세일 땅에 사는 형 에서에게 자기보다 먼저 심부름꾼을 보내면서』

→ 형 에서에 대해 굉장히 신경쓰고 있다. 가까운 이삭보다 멀리있는 형에게 먼저 소식을 전한다.

Q. 에서가 에돔 땅에 사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삭은 헤브론에 있고 에서는 분가했다.

cf. 이삭이 180세(야곱은 120세)에 사망할 때 헤브론에 있었다.

(창 35:27-29)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 심부름꾼을 보내며 단단히 이르다.

(창 32:4-5)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창 32:4-5) 『[4] 지시하였다. "너희는 나의 형님 에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여라. 주인의 종 야곱이 이렇게 아룁니다. 저는 그 동안 라반에게 몸붙여 살며 최근까지도 거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5] 저에게는 소와 나귀, 양 떼와 염소 떼, 남종과 여종이 있습니다. 형님께 이렇게 소식을 전하여 드립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 그들에게 명령하여 : 명령하다(차와 הוצ)는 ‘단단히 이르다’는 의미

- 너희는 내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 에서는 ‘주’로, 자신은 ‘종’으로 표현한다. 장자권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형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은 형의 환심을 사서 노여움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함이다. 야곱의 불안과 일단을 해결하고 보자는 의도이다.

-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 오랜 시간 나그네로 살다가 이제야 돌아옴을 강조한다.

-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 타향살이의 성과를 보고 한다는 식이다.

-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 자신의 지난 잘못을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의미이다.

Q. 형의 것을 가로챘다는 미안함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 에서에 대한 두려움?

Q 앞으로 부딪혀야 할 에서에 대해 야곱은 심부름꾼을 보내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불안과 초조함으로 잘되기를 얼마나 바랬을까? 우리라면 심부름꾼이 돌아올 때까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이렇게 단단히 일러준 소식을 전한 심부름꾼은 무슨 소식을 받아왔는가?

(창 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창 32:6) 『심부름꾼들이 에서에게 갔다가 야곱에게 돌아와서 말하였다. "주인 어른의 형님인 에서 어른께 다녀왔습니다. 그분은 지금 부하 사백명을 거느리고 주인 어른을 치려고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 주인을 만나려고 : 만나다(카라 ארק)는 우호적인 목적도 있지만 적대적인 목적도 가능하다.

→ 야곱의 소식을 전해들은 에서는 400명을 데리고 급하게 출발한다. 심부름꾼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는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 분노로 공격하기 위함인지 용서하며 환영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다. 표준새번역은 ‘치려고’로 번역.

→ 이미 불안한 야곱은 이것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Q.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도망을 한다면 어디로 갈까? 뒤로 간다면 기념비가 있어 갈 수 없고, 이삭에게 간다면 이미 어머니도 없고 기력이 없는 아버지 이삭이 에서의 편을 들어줄 것같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에서가 쫓아올 것이고.. → 좀전까지 고마운 기념비가 이제는 뒤로 도망갈 수 없는 담벼락이 되었다. 그것을 만들어준 하나님께 어떤 마음이 들까?


* 야곱의 두려움

(창 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창 32:7) 『야곱은 너무나 두렵고 걱정이 되어서 자기 일행과 양 떼와 소 떼와 낙타 떼를 두 패로 나누었다.』

-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 야곱의 감정이다.

①  두렵고(야레 ארי) ‘무서워하다, 놀라다’ - 야곱은 400여명이란 엄청난 숫자에 이미 기가 죽고, 이리로 오고 있다는 말에 더욱 놀란다.

cf. 라반에게 느낀 두려움을 다시 에서에게서 느낀다. 모두 가족을 칠까봐 두려워한다.

(창 31: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창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cf. 야곱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장자권을 받고 집을 나가야 했고, 부모는 외가에서 아내를 맞으라 했고, 외가집에서 나오려 할때 자신의 집을 세우려 했고, 라반과 에서에게 받은 두려움은 그 가족을 칠까봐였다. 그런 야곱이 모두 보낸다. 곧 모든 것을 보내고 홀로 남아 얍복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결국 야곱의 두려움의 근본은 가족이 아니라 자신에 있었다. → 우리 자신에게 두려움의 근본은 무엇일까?

② 답답하여(야차르 רצי) ‘곤란하다, 좁아지다, 군급(窘急막히고 급하다)하다’ - 외부의 압박으로 인한 곤경이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내면의 감정적 반응을 나타낸다.

→ 형을 ‘주’라고, 자신은 ‘종’이라고 하여도 통하기는커녕 자신을 붙잡으러 온다고 느껴진다. 곧 야곱 안에 있는 두려움과 답답함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내적인 불안은 겉으로 나온다.


* 두려움에 대한 야곱의 행동

-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 야곱은 불안에 급해져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즉각적인 자기식의 반응을 취한다.

(창 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창 32: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창 32:8) 『에서가 와서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 패라도 피하게 해야겠다는 속셈이었다.』

→ 야곱의 두려움은 에서가 와서 자신을 칠 것으로 확신한다. 그것을 피하고 그간 힘들게 모은 재산을 조금이라도 보호하는 방법은 재산을 두떼로 나누어 보내고 에서가 한떼를 치는 동안 남은 한떼를 가지고 피하려 한다.

→ 야곱은 그 작전이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얼마전 라반도 쫓아왔음이 기억났을 것이다. 이때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반을 막아준 하나님이 기억났을까? 그래서 기 그가 하려던 것을 멈추고 선택한 것은 기도?

※ 야곱에게 익숙한 것은 도망이다. 에서에게서도, 라반에게서도 도망을 자동으로 선택했다. 이번에도 도망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멈추고 기도로 간다. 기도후 야곱은 도망이 아닌 에서에게로 정면으로 나아간다.

cf. 우리라면 익숙한 자신의 방식과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방식으로 전환하기 사이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우리의 삶은 자신의 방식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전환시키시는 삶일까? 이것을 우리가 할까, 하나님이 하실까? 우리가 할 것은 행위인가 고백인가?


* 야곱의 기도

(창 32:9-12)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창 32:9-12) 『[9] 야곱은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10]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이 요단 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11] 부디, 저의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너의 씨가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야곱의 기도순서

①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하나님을 부른다.(9a)

②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기도한다.(9b)

③ 자신의 과거속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과 진실하심을 고백한다.(10)

④ 지금의 절박한 상황을 고백한다.(11a)

⑤ 자신의 감정과 그 이유를 고백한다.(11b)

⑥ 모든 기도의 근거가 말씀이었기에 다시 약속으로 기도한다.(12)

→ 야곱의 기도에는 자신의 두려움 vs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에 대해 고백이 있다.


* 기도후 야곱의 반응

(창 32: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창 32:13) 『그 날 밤에 야곱은 거기에서 묵었다. 야곱은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서 자기의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따로 골라 냈다.』

→ 기도후 야곱은 첫째로 거기서 밤을 지내고(그곳에서 묵는다) 둘째로 형에게 줄 예물을 택한다.

- 예물-선물을 넘어 형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조공의 의미이다.

→ 두렵고 답답하여 도망을 먼저 도망칠 생각부터 하고 행동도 두떼로 나누는 것부터 하던 야곱이 기도한다. 기도후 하나님은 어떤 응답을 주셨을까? 성경에는 그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야곱의 행동이 바뀐다. 기도후 행동은 세때로 나누고 도망이 아닌 형을 향하여 적극성을 보인다. 무엇이 기도후에 이렇게 바뀌게 하였을까?

cf. (창 32: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 선물내용

(창 32:14-15)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창 32:14-15) 『[14] 암염소 이백 마리와 숫염소 스무 마리, 암양 이백 마리와 숫양 스무 마리, 암양 이백 마리와 숫양 스무 마리, [15] 젖을 빨리는 낙타 서른 마리와 거기에 딸린 새끼들, 암소 마흔 마리와 황소 열 마리, 암나귀 스무 마리와 새끼 나귀 열 마리였다.』

→ 총 580마리, 종류별로 골고루 준비한다.


(창 32:16-18)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창 32:16-18) 『[16] 야곱은 이것들을 몇 떼로 나누고, 자기의 종들에게 맡겨서 자기보다 앞서서 가게 하고, 떼와 떼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라고 일렀다. [17] 야곱은 맨 앞에 선 종에게 지시하였다. "나의 형 에서가 너를 만나면 네가 뉘 집 사람이며, 어디로 가는 길이며, 네가 끌고가는 이 짐승들이 다 누구의 것이냐고 묻거든, [18] 너는 그에게 이것은 모두 주인의 종 야곱의 것인데 야곱이 그 형님 에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야곱은 우리 뒤에 옵니다. 하고 말하여라."』

- 명령하여 이르되 : 차와(הוצ) 자신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는 종과 예물을 보내며 다시 단단히 이른다. 각 떼로 나누어 보내는 것은 에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함이다.


(창 32:19-20)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창 32:19-20) 『[19] 야곱은 둘째 떼를 몰고 떠나는 종과 셋째 떼를 몰고 떠나는 종과, 나머지 떼를 몰고 떠나는 종들에게도 똑같은 말로 지시하였다. "너희는 에서 형님을 만나거든 그에게 똑같이 말하여야 한다. [20] 그리고 주인의 종 야곱은 우리 뒤에 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야곱이 이렇게 지시한 데는 자기가 미리 여러 차례 보낸 선물들이 그 형 에서의 분노를 서서히 풀어 주고, 마침내 서로 만날 때에는 형이 자기를 반가이 맞아 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 야곱의 아이디어

① 형에게 가려한다. cf. 두려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② 선물을 골라낸다.

③ 몇 때로 나누고 종들에게 맡겨서 자기보다 앞서서 가게 한다.

④ 떼와 떼 사이는 거리를 둔다.

⑤ 첫 종에게 당부한다 : 나의 형 에서가 너를 만나면 네가 뉘 집 사람이며, 어디로 가는 길이며, 네가 끌고가는 이 짐승들이 다 누구의 것이냐고 묻거든, [18] 너는 그에게 이것은 모두 주인의 종 야곱의 것인데 야곱이 그 형님 에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야곱은 우리 뒤에 옵니다. 하고 말하여라.

⑥ 둘째 떼, 셋째 떼, 나머지 떼를 모는 종에게도 똑같은 말을 당부한다.

⑦ 여러차례의 선물들을 보면 그 형의 분노가 서서히 풀릴 것으로 예상한다.

⇒ 기도 전에는 두떼로 나누어 도망칠 방법부터 생각했던 야곱이 기도후에는 선물을 통해 형의 분노를 풀어주고 형을 만나려고 한다. → 기도가 마음을 바꿨다.


Q. 선물을 보면 화가 풀릴 것이라는 판단은 기도의 응답인가, 자신의 계책인가? 도망이란 자기 방식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는 과정이다. 선물은 자기 방식, 형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

- 나를 받으리라(20) : ‘그가 나의 얼굴을 들어 올릴 것이다’ 곧 용서하고 죄인의 위치에서 회복시킬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

Q. 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추구하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인가? 선물이 자기 방식이라면 물질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결과로 선물은 전혀 영향이 없었다.

∴→ 야곱의 잘못된 방향 :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는 회개하려 하지 않고 에서의 마음만 덮으려 한다. 형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속을 못보게 한다.

∴→ 한번의 기도가 모든 것을 바꾸지 않았다. 그때그때 단계별로 변해가는 야곱을 본다. 정말 자신을 보고 반성까지 가는 것은 얍복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일이고 그 만남이 최종 해결인 에서에게로 나가게 한다.


cf. 진영, 군대, 떼 = 마하네(הꗽꖖꗫ)는 ‘진을 치다, 에워싸다, 방어하다’의 ‘하나’(הנח)에 유래하였다. 복수는 마하노트(תוֹנꕟꗫ)

→ 1절에서 하나님의 군대(마하네)가 마하나임이 되고, 야곱이 나눈 것은 두떼(복수, 마하노트)가 되고, 에서는 400명이 오고 있다.

→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한걸음 나아가고, 에서의 400명 소식은 두떼(마하노트)로 나누고 도망가려 하고, 기도후 세떼 이상으로 나누어 형을 만나려 한다.

cf. 에서의 용서가 왜 필요한가?

→ 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출발로 돌아온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수 없다.

cf. 에서는 언제 용서하는가? → 에서는 이미 분가하기 전에 분노의 감정이 삭아졌다.

→ 에서는 이미 용서했고 이것을 모르는 야곱은 혼자서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출발하라고 했던 말씀을 야곱이 자신의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해결하신다.

cf. 야곱이 풀어야할 것은 형의 감정인가? 자신의 감정인가?

(창 32: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 자신의 두려움의 감정을 못 푼 야곱은 자신이 중요시 하는 재물을 선물로 보내고, 기다리다가 불안한 야곱은 이번에는 가족도 얍복나루를 건너게 한다. 가족은 라반이나 기도에서도 칠까봐 두렵다고 했던 자신에게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모든 것을 보내고 처음처럼 홀로 남는다. 집에서 나올때 혼자서 두려웠던 그가 이번에도 홀로 남아 형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

(창 32:21-24)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홀로 남은 야곱은 만남으로 루스땅이 벧엘이 되었듯이, 홀로 남은 야곱을 만나주심으로 얍복나루가 브니엘이 된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하면서 그 곳 이름을 c브니엘이라고 하였다. (c. 하나님의 얼굴)』


[정리]

① 야곱의 불안은 종들에게 단단히 당부함으로 형 에서가 감정을 풀기를 원한다.

② 종들이 가져온 소식은 더욱 야곱을 불안하게 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③ 그의 두려움에 기도가 들어가고 도망에서 적극적 대면으로 바뀐다.

④ 자신의 방법을 버리지 않고 계속 붙잡으며 자신을 받아드릴 것을 바란다.

⑤ → 에서의 감정은 이미 하나님이 푸셨다.

⑥ 마하네의 확장

⑦ 야곱이 풀어야 할 것은 형이 아닌 자신의 감정이었다.

⑧ 다시 벧엘의 경험을 브니엘에서도 한다.


[얍복은 벧엘의 재경험과 계속된 훈련]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 있다. 우리 각자에게도 그러한 일들이 있고 기념할 만한 경험들이 있다. 나에게 가장 기억되는 큰 일, 전환의 경험은 무엇일까?

아브라함은 떠남과 아들 바치기, 이삭은 모리아의 경험, 야곱은 벧엘과 브니엘일 것이다. 야곱에게 브니엘의 경험은 무엇때문인가? 형때문이고 그로 인한 불안때문이다.

지난 시간 야곱의 불안은 형의 감정을 풀 방법을 간구한다. 도망가려 하던 그가 기도하면서 형을 대면하기로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방법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형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형의 분노보다 더 급한 것은 자신의 불안과 도망이었다.


(창 32:21-24)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분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 모든 재물을 보낸 야곱은 밤새 기다리지만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한다. 결국 아내들과 아들들을 얍복나루를 건너게 한다. 결국 그는 홀로 남는다. 홀로 남은 그는 여전히 불안하다.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 야곱의 외로움과 절박함이 느껴진다.

→ 벧엘의 재경험 : 더 이상 써볼 방법도 없이 홀로 남은 야곱은 어떤 마음일까? 야곱은 홀로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세우길 원했다. 그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큰 위로를 얻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은 아무도 없다. 홀로 남게 되었다. 외로움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벧엘의 재경험이다. 벧엘에서 철저히 혼자라는 고통을 느꼈던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다시 홀로 남는 경험을 하고 있다.

- 어떤 사람이 : 야곱은 이 사람에 대해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어지는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아차리게 한다.

→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지만(29) 야곱의 이름을 개명하여 주고(28)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다고(30) 한다.

-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씨름하다(아바크 קבא) ‘먼지에 쌓이다, 붙잡다’의 의미로 이는 땅에서 먼지가 일어나 쌓일 정도로 서로 붙잡고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서 ‘씨름하다, 맞붙어 싸우다’의 뜻이다.

→ 언제까지 씨름하는가? 야곱은 이 사람과 씨름하면서 날이 새도록 한다.

cf. 벧엘에서 야곱은 날이 새고 보니 꿈에서 깨게 된다. 밤새 홀로 있으면서 꿈을 통해 하나님의 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창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창 32:25) 『그분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 그가 야곱에게 행하는 것은 ①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본다. ②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을 친다. ③ 관절이 어긋나게 했다.

→ 밤새 붙잡고 있는 야곱의 약점,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절박한 야곱은 붙잡는다.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 『그분이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을 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 직역 ‘너는 나를 가게 하라. 왜냐하면 먼동이 떴기 때문이다.’

→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떠나려는 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는 야곱을 뿌리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육신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야곱이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야곱은 어려움이 생기면 회피와 도망을 선택했기에 이것은 야곱을 훈련시키는 모습이 된다.

-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야곱은 끝까지 붙잡는다. 힘이 빠지고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는 붙잡는다.

⇒ 도망하는 사람이 붙잡는 사람이 된다. 원래 야곱은 이런 성격인가? 원래 이런 끈질김이 있었는가? 그가 부모로부터 배운 것도 그가 먼저 선택한 것도 회피였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더욱 절박한 상황임에도 회피가 아닌 붙잡도록 ‘훈련’을 시키고 있다.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7)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너는 누구냐, 너의 정체성이 뭐냐, 자신을 뭐라고 표현하겠는가?

→ 히브리인에게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갖는 존재로서의 환경적 요인과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예언적 의미까지 지닌다. 곧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의 모습을 나타난다.

- 야곱이니이다 : 야곱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발꿈치 잡는 자, 속이는 자라는 의미의 야곱은 과거의 삶과 현재가 이러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cf. 출생과 에서의 표현

(창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창 27:36) 『에서가 말하였다. "그 녀석의 이름이 왜 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지난번에는 맏아들의 권리를 저에게서 빼앗았고 이번에는 제가 받을 복까지 빼앗아갔습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에게 주실 복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8) 『a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b이스라엘이다. " (a. 히, 그가 b.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이 겨루시다)』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 : 정체성의 변화. 속이는 자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직역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 겨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이겼다’

→ 야곱의 정체성 : 이제는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 야곱은 문제의 핵심을 형의 감정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정체성을 바꾸며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도록 한다.


(창 32: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 32:29)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 야곱은 이름을 원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은 그가 하나님과 대면했음을 안다.(30) 이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재차 확인하고 싶어서 였다.

→ 왜인가?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듣고 싶은 것인가? 야곱은 ‘내 하나님’임을 알려고 한다. 이것은 무의식중에 급박한 상황임에도 인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함을 말한다.

cf. ① 벧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한다.

(창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② 라반과의 대화에서 야곱의 고백

(창 31: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창 31: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③ 에서의 감정을 풀려고 할 때 선물을 보내면서

(창 32: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④ 야곱이 축복기도할 때

(창 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하면서 그 곳 이름을 c브니엘이라고 하였다. (c. 하나님의 얼굴)』

→ 과정 : 어떤 사람-이름을 고하소서-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하나님과 대면하였다

→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야곱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고 있다. 벧엘에서 하나님과 사자들을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그가 야곱의 이름을 개명하듯이 야곱도 그곳의 이름을 개명하며 기념한다.

cf. (창 28:17-19)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창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 직역 ‘그리고 그가 브니엘을 지나갈 때 그 해는 그의 위로 떠올랐다’

→ 야곱이 비록 절고 있지만 새로운 하루의 시작인 태양이 뜨고 새이름도 받아 나아가게 한다.

Q. 밤새 씨름한 야곱에게 새날의 시작인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창 32: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창 32:32) 『밤에 나타난 그분이 야곱의 엉덩이뼈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을 먹지 않는다.』

→ 자손들의 기념과 전통이 된다.


[정리]

① 브니엘은 벧엘의 재경험이다.

② 브니엘은 훈련의 장소이다

③ 브니엘은 새로운 시작이다.(개명과 새날)

 

[앞장서는 야곱과 하나님의 앞장]

얍복나루에서 훈련받은 야곱,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그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두려움의 기본은 회피, 그런 그가 형에게로 나아가기로 했다. 과연 그는 두려움이 없어진 것일까? 두려움을 안고 가는 것일까? 또한 누구를 앞에다 세울까? 함께 가는 걸까?


(창 33:1)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

(창 33:1)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

→ 얍복에서 훈련을 마치고 새날을 맞이한 야곱은 강을 건너왔다. 가족들이 그곳에 있다. 야곱은 자신의 불안으로 먼저 보냈던 가족을 보고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 눈을 들어보니 → 야곱은 고개를 들었고 본다. 말로만 들었던, 그래서 두렵고 답답하게 했던 형과 400명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이순간 야곱은 어떤 감정일까? 얍복의 훈련은 청각의 두려움이 시각의 담대함으로 바뀌게 하였을까?


(창 33:1-2) 『[1] ...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창 33:1-2) 『[1] ... 야곱은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2]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 두 여종과 그의 아들들을 맨 앞에, 다음 레아와 아들들, 맨 뒤에 라헬과 요셉

→ 에서가 오는 것을 보고 야곱은 가족들의 위치를 배치한다.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놓는 것은 얍복나루에서의 훈련으로 사람이 바뀌고 이스라엘로 개명이 되어도 편애의 습성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음을 보여준다.


(창 33: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창 33:3)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 지금까지 야곱은 종을 먼저 보내고 가족을 먼저 보냈다(32:16-23). 그런 그가 가족 뒤가 아닌 가족 앞에서 에서에게 나아간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정체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는 가족도 보냈던 그가 훈련이후 용기가 생겼을까? 가족 앞에 선다.

-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 지금까지 형의 감정만 풀려 했던 그가 일곱번 용서와 화해의 절을 한다. 그리고 형에게 가까이 간다.

Q. 두려움과 도망에 익숙한 그에게 무엇이 이렇게 가족 앞에 있게 하고, 형에게 가까이 가게 했을까? 정체성의 변화와 지지로..


* 에서의 환대

(창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4)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 에서가 본 것은 절하고 있는 야곱

→ 에서의 행동 : 달려간다, 끌어 안는다, 서로 목을 교차한다, 입을 맞춘다, 서로 운다. ⇒ 4개의 동사는 에서가 주도적으로, 마지막 하나는 서로 같이 한다.

→ 에서는 적극적으로 형제를 안는다. 여기에는 야곱이 걱정하던 분노를 볼 수 없다. 형의 용서는 함께 우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또한 400명은 공격이 아닌 환대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창 33: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창 33:5) 『에서가 고개를 들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 에서가 눈을 들어 : 함께 감정을 교류한 에서가 눈을 들어 본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야곱의 가족들이다.

→ 에서의 행동 : 눈을 들다, 야곱의 가족을 본다, 묻는다.

cf. 야곱은 눈을 들어 에서를 보고 vs 에서는 눈을 들어 야곱의 가족을 본다.

→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 야곱의 두려움은 형이 가족을 보면 자신뿐아니라 가족까지 죽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에서의 반응은 용서의 반응이다.


* 가족들 절하기

(창 33:6-7)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창 33:6-7) 『[6] 그러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7] 다음에는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나와서 그들도 엎드려 절을 하였다.』

→ 이제 부인들과 자녀들이 인사한다.

Q. 만약 얍복이전대로 되었다면 에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에서가 일단 보려는 사람은 야곱이었기에 급하게 달려온 것이다. 용서의 마음으로 환영하러 왔지만 선물 이후에 가족까지만 보고 강건너 야곱이 있음을 알았다면 그의 감정은 그대로 였을까? 야곱의 두려움은 현실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얍복의 훈련과 변화는 야곱에게는 고통이지만 가장 적절한 변화였다.


* 빚나간 야곱의 예상

- 어느정도 상황에서 감정이 정리된 후 에서가 묻는다.

(창 33:8-9)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 33:8-9) 『[8]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 에서의 물음은 야곱의 짐승의 떼가 무엇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부를 모을 수가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cf. (창 32:17-18)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 야곱은 앞서 보낸 자들에게 명령했다. 예상되는 질문과 대답을 준비해주었다. 이것을 몇차례에 걸쳐서 행하도록 했다. 그 결과 ..

① 에서는 선물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야곱이 오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② 오는 도중 몇차례 만나는 선물을 보면서 야곱의 위치만 알 수 있었다.

③ 야곱은 형의 분노로 그것을 칠 동안 시간을 벌 것이라 예상했지만 형은 그냥 지나쳤다.

④ 종들은 에서보다 먼저 올 수 없기에 소식을 전해들을 수 없었다.

⇒ 야곱은 선물에 관심을 보이며 용서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에서는 야곱이 오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 야곱의 의도

-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 직역 ‘내 주의 눈들 안에서 은혜를 찾아 내려고 합니다’

→ 찾다(마차 )는 발견하다, 얻다), 눈(아인 )은 단순한 ‘눈’이 아닌 ‘마음’이라는 의미

cf. 고대 근동에서 눈은 단순히 보는 기능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여러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통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예물은 주로 상호간의 우호 및 화해의 증표로 사용된다. 따라서 흔쾌히 받으면 화해 친선관계가 형성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곧 야곱이 형에게 예물을 주는 것은 단순한 환심이 아니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화해관계를 맺으려는 계약같은 의도가 있다.


(창 33: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창 33:9) 『에서가 말하였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 족하다 : 라브() 증가하다, 늘어나다, 넘치다. → 야곱의 예물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자신의 재산은 충분하다는 의미

→ 지금까지 야곱은 에서의 것을 빼앗는 동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것을 주려고 한다.

- 네 소유는 네게 두라 : 명령이 아닌 부탁의 의미, 곧 거절이 아닌 사양을 하지만 11절에 야곱의 강권에 받아들이게 된다.


(창 33: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창 33:10) 『야곱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 합니다』

-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애원의 의미로 야곱은 극도로 겸손한 태도로 사양하는 에서에게 재차 부탁한다.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았을 때 복수의 분노로 가득할 그의 얼굴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바뀐 것에 대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다. 죽음의 얼굴이었을 그 얼굴을 보고도 살아났다는 기쁨과 감격을 고백한다.

-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 야곱이 느끼기에 에서는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했음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감동으로 형에게는 분노를 기쁨으로, 자신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을 살리는 해소로 보인 것이다.


(창 33: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창 33:11)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므로 제가 가진 것도 이렇게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형님께 가지고 온 이 선물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간곡히 권하므로 에서는 그 선물을 받았다.』

- 내 소유도 족하오니 → 에서도 자신의 재물이 풍족하다고 하지만 야곱도 자신의 소유가 풍족하다고 한다. 다만 풍족의 근거를 야곱은 하나님에게서 두고 에서는 그렇지 않다.

- 강권하매 : 파차르() 촉구하다, 재촉하다. → 야곱은 자신이 준비한 예물을 에서가 받도록


cf. ‘은혜’에 관하여 → 야곱의 관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① (헨) : 8절과 10절의 ‘은혜’는 형을 통한 은혜이고 1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상황과 과정은 달라도 그 안에 핵심은 형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같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을 고백한다.

② 야곱이 라반과의 계약에서 라반이 범신적인 표현을 해도 야곱은 유일신적 표현을 한다.

(창 31: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③ 라반을 떠날 때 부인들에게 한말 vs 얍복 앞에서 야곱의 기도말

(창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창 32: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 은혜 : 야타브()는 ‘기쁘다, 선대하다, 좋게 하다’

⇒ 야곱은 모든 상황에서 표현은 달라도 그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보인다.


* 에서의 1차 호의와 야곱의 거절

- 에서는 야곱과 동행하려 한다. 분노하지 않는 에서는 야곱에게 호의를 베풀려 한다. 야곱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창 33:12)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창 33:12) 『[12] 에서가 말하였다. "자, 이제 갈 길을 서두르자. 내가 앞장을 서마."』

-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 직역 ‘그리고 나는 너의 앞에 갈 것이다’

cf. 불안한 야곱은 종도 가족도 앞에 가기를 원했다. 훈련된 야곱은 가족앞에 선다. 그런 야곱에게 에서가 앞장 선다고 한다.


(창 33:13-14)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창 33:13-14) 『[13]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또 저는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돌봐야 합니다.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습니다. [14] 형님께서는 이 아우보다 앞서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앞에 가는 이 가축 떼와 아이들을 이끌고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습니다."』

→ 에서의 호의에 야곱은 지나치게 몰면 죽는다며 사양한다. 야곱에게 목적지는 고향으로 세일이 아닌 이삭이 있는 헤브론이다. 세일은 후에 방문하겠다고 한다.

(창 31:18)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창 31:18) 『그가 얻은 모든 짐승과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서, 가나안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창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창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 근처 마므레로 가서,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헤브론이다.』


* 에서의 2차호의와 야곱의 사양

(창 33: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창 33:15) 『에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야곱이 말하였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 여전히 동생을 보호하려는 에서의 마음이 있다.

-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 지금까지의 은혜로도 과분하다는 의미, 왜냐하면 지금 야곱은 옛날의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심에 대한 고백 vs 형의 호의를 원하지 않기에 사양

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완벽한 화해와 용서가 있었기에 야곱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② 아무래도 형의 호의를 한다고 하지만 같이 있다가 변심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다?

Q. 우리의 경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고백하면서도 사람의 호의가 있을 때 어떻게 할까?


(창 33:16-17)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창 33:16-17) 『[16] 그 날로 에서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17] 야곱은 a숙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야곱은 자기들이 살 집과 짐승이 바람을 피할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이 숙곳이 되었다. (a. 초막)』

→ 세일로 가는 에서 :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길을 감으로 구속사에서 사라지는 뒷모습이다.

(수 24: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 숙곳 : 집을 짓고 우리를 지었다. 오랜 시간의 정착과 휴식의 시간이 되었다.


* 야곱의 정착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19]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20]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b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b.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 밧단아람 : 라반의 집이 있는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지방

- 평안히 : 세겜의 도착과정을 평안하다고 한다.

cf. 벧엘에서의 기도응답 - 평안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창 28: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 28:21)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 세겜 :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밭을 공식적으로 산다.

= 엘엘로헤이스라엘 : 야곱이 그곳에 희생제사를 드린 곳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에 들어와 단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창 12:6-7)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정리]

① 얍복에서의 훈련이후 뒤에 서려던 야곱이 앞에 선다.

② 눈을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에게 절하며 다가간다.

③ 형을 통해 은혜로, 하나님을 통해 은혜로 간다.

④ 형의 앞장서는 것을 사양하고 하나님의 앞장을 바라본다.

⑤ 아브라함의 정착을 따라한다→아브라함의 앞장 선 하나님을 바라본다.

⑥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된다. 벧엘에서부터 같은 약속을 계속하신다.(함께하신다=이스라엘)

⑦ 야곱은 약속을 듣는 시기, 깨닫는 시기,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거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