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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01 성경인물 12제자 05. & 복음서 27.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2. 2014.09.17 성경인물 12제자 04. 오병이어와 빌립과 안드레의 관계
  3. 2014.07.16 성경인물 12제자 03.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가 되다
  4. 2013.10.21 성경인물 12제자 02. 베드로와 그를 부르시는 예수
  5. 2013.09.25 성경인물 12제자 01. 안드레, 메시아와 함께 있고 싶다

성경인물 12제자 05. & 복음서 27.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성경인물탐구/12제자 2015. 7. 1. 20:34

 

(눅 9:57-62)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마 8:18-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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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기


▷ 예수님의 관점

예수님과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있었던 이야기


* 서기관의 요청

(눅 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1.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서기관'이라고 나온다.

2. 즉흥적이거나 갑작스럽게 제자가 되겠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나름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그를 따른 것이 유대인이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4. 단호한 의지가 보인다. 아콜루데오(ἀκολουθέ́ω), 1인칭 단수미래 직설법


* 예수님의 거절

(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 비장한 결단을 보이는 어떤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내 삶이 머리 둘 곳도 없는 기약없는 삶이며 피곤한 삶인데, 그대로 나를 따르겠느냐?’는 의미이다.


Q. 따르겠다는 자에게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 탈무드 시대의 랍비(Jose ben Joezer)는 ‘너희 집을 현인(선생, 랍비)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게 하고, 그들의 먼지 묻은 발들 가운데 앉아라.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마셔라.’고 말했다. 히브리인들의 개념에서 제자는 스승과 논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항상 존경하고 후일에 자신이 가르치게 될 때 스승의 이름을 거론하여 그의 명예를 돌렸다.

→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온 서기관의 율법해석은 바리새인들과도 다르고 예수님과도 너무나 다르다. 결국 그가 제자가 되면 많은 논쟁이 불가피하게 된다. 즉 예수께서는 논쟁하는 제자가 아니라 함께 할 제자가 필요하셨다.

⇨ 서기관에 대해 ⇒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를 거절했다고 말씀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겠다는 그의 말에 구체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 19:21-22)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눅 5:27-28)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 예수님의 요청

(눅 9:59)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

→ 예수님의 요청의 특징 : 왜 따라야 하는지, 부름받은 이후 어떤 일이 있는지,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장황한 설명이 없다. 간단한 명령이다.

→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예수의 명령에 의한 경우도 있음을 보여준다.


* 사람의 선택과 예수님의 대답

(눅 9:59-60) 『[59]..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62)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사람들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우선순위가 상식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cf. 유대의 규례집 ‘메길라’- 장사기간은 7일간, 장례참석은 자식으로서 중요한 의무, 장례기간에는 장례가 다른 예배나 절기, 할례의식보다도 먼저이다. 곧 이사람의 요구는 당연한 것

→ 제자가 되기전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한다. 본문의 의미는 가족에게 가서 자신의 결정을 말할 때 가족들에게 확인받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눅 9:60,62)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동행인의 입장에서 보면 관행과 당연한 도리이다.

Q. 내가 원하는 제자의 삶은 어떤가? 나의 당연히 여기는 도리와 같은 걸림돌은 무엇인가?

⇒ 복음서의 제자의 완성은 성령을 받고 인도하심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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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12제자 04. 오병이어와 빌립과 안드레의 관계

성경인물탐구/12제자 2014. 9. 17. 14:00

 

 

(요 6:1-2)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요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요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 6:5-6)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요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 6:8-9)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 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요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요 6:12-13)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 6:14-15)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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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12제자 03. 세리 레위가 제자 마태가 되다

성경인물탐구/12제자 2014. 7. 16. 12:54

[부르심에 응답하는 세리 레위]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3-14)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 공통내용?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나를 따르라”하니 그가 일어나 따랐다.

▹ 차이점? 이름이 다르고 마지막 내용이 다르다.

→ 이름-마태(마태라 하는 사람이) 마가(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누가(레위라 하는 세리가)

→ 마태(헬라식 이름) 레위(히브리식 이름)

→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그가 예수를 만난 후 받은 이름이다.

cf. 마가는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에는 주로 ‘마태’(막3:18)이라고 불렀다.    


▹ 세관(τελώ́νιον 텔로니온) -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집, 또는 세금을 받는 징수원이 거하는 조그만 사무실이나 징수 창구

▹ 세리에 관하여

- 리비(Livy 59BC-17AC, 로마 역사가) “세리가 있는 곳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돈을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운영과 군사적인 재정을 지원할 강력한 세금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세리였다.

- 로마시대의 세리는 입찰을 통해 세금을 거둬드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 그 결과 지방단체의 관리와 로마의원들과 세리간에 공모가 있게 되었다.

- 예수 시대의 아우구스투스황제(27BC-14AD)와 티베리우스황제(14AD-37AD)의 재위기간에는 심각한 불만이 제기되면서 국민개개인의 재산에 근거한 1%세금을 부과하는 개인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1%이상 부과하도록 지방관리는 세리를 활용하게 되었다.

→ 이러한 세리들의 활동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치를 떨게 되었고, 세리는 죄인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었다.


* 유대인으로 당시 세리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

1. 그들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로마의 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는 半관리적 입장 때문에 세리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져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멸시 받다.

2. 종교적인 배척을 받았다. 이방의 돈을 취급하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갖는 일을 함으로서 유대인의 율법에 명시된 정결규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3. 비록 사람들의 질시는 받았으나 로마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안정적인 직업과 세리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가 있었다.

→ 이런 유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지극히 불경건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cf. 말씀의 특징-말씀에는 레위의 감정과 마음과 생각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결단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만 나온다.


-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마), 또 지나가시다가(막),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눅)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고 계신다.


-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마),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막),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눅)

→ 보시고(θεά́ομαι 데아오마이)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응시하며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앉아 있은 것을(κά́θημαι 카데마이) 여기서는 현재분사로 계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예수께서 보신 레위의 모습은 어땠을까?

1. 그는 동서로 도로가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였던 가버나움에 설치된 세관에서 일하였고, 도로세 교통세 관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다.

2. 예수께서는 전도하러 다니시던 중 몇 번 그 길을 지나가셨을 것이고 레위를 주의깊게 보시고 계셨다.

cf. 일반적으로 세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직업적으로는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Q. 그럼 그런 감정적인 대우를 받고 있던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세관에 앉아 있으면서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1. 레위는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고 부르신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는 성실함을 보인다. 그 성실함은 세리로서의 부유함을 누렸을 것이다.

2. 그는 세리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세리로 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즐겁지 않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레위를 지켜 보시던 예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다. 예수께서는 레위의 내면과 성실함에서 무엇을 보셨을까? 따를 만한 사람으로 느끼셔서 따르라 했을까?

Q. 우리를 지켜보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마음을 보실까?


- 일어나 따르니라(마 막)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 버리다(καταλεί́πω 카탈레이포) 떠나다 남겨두다 소홀히하다

Q. ‘모든 것을 버리고’? 과연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했을까? 무엇이 그가 메시야를 따르게 했을까?

→ 레위는 예수의 부르심에 자신의 생업과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를 따른다. 자신이 메시야의 제자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하였다. 즉 레위는 겉을 버리고 속(삶의 기준, 메시야)를 선택했다.


Q. 우리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적이 있는가?


* 메시야를 따른 레위의 마음은 어떨까? 즐겁다. 왜? 이어지는 말씀이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정리]

세상을 나쁜 이미지와 시선을 살아가야 하는 세리, 그가 메시야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즐거이 따른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버리며 예수를 따르는가?

 

[마태의 기쁨과 초대]

백아절현(伯牙絶絃)


예수님은 어떻게 레위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돌로 치려할 때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요 14:8-11)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기도중에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 하나님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cf. 감정코치

⇒ 예수께서는 자신의 경험, 아버지의 경험을 가지고 대상에게, 죄인에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품어주셨다.


* 이렇게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한 레위가 가장 먼저 한 행위는?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 공통과 차이점

-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마태)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라고 한다.

→ 잔치 : 데코마이(δέ́χομαι 영접하다)에서 나온 말로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배설한 것이다.

-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마) 세리와 죄인들이(막)이라고 하나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눅)이라고 한다.

→ 다른 사람 : 예수 주위에 있던 자들로,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병을 치유받고자 몰려든 사람들이다.

→ 죄인 : 사법적인 범법자가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취급했던 소외되고 경원시되던 세리와 같은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외적 경건을 중요시했던 바리새인은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어울려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cf. 왕실 혼인잔치 비유(마 22:1-10, 눅 4:16-24)

(마 22:8-10)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눅 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눅 14:21-24)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레위, 잔치를 열다.

-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열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보시고 함께 하자고 말씀하신 분이다.

- 많은 세리와 죄인을 위하여 그들도 초대하였다. 세리는 자신의 처지와 같은 입장이다. 마태는 자신과 함께 했던 세리들도 불렀고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도 함께 초대하였다.

cf. 세리의 마음은 누가 잘 알고 위로해줄까? 세리인 레위는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세리들을 불렀고


[정리]

레위가 잔치를 열다.

예수를 위하여-그 예수께서 자신의 마음을 보시고 불러주셨다.

세리도  불렀다. - 세리였던 레아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왔을 동료들도 초대했다.

죄인들은 불렀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이다.

이처럼 레위는 자신의 아픔과 같은 세리들도 초대하고, 다른 사람 아픔의 사람들을 초대함으로 그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바리새인의 분리와 비방]

 

Q. 예수는 우리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실까?

Q.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분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

Q. 우리는 누구를 부르는가? 같은 입장의 사람, 같은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 그들을 부르는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는가?


(마 9:10-13)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새로운 인물 등장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1. 이들은 죄인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않았다.

2. 이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유대인과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본다.

3.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 선생은 또는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가?’


Q. 바리새인이 볼 때 왜 세리와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이 죄가 될까? 오히려 그들의 분리적 행동은 성경적인가?

바리새인의 특징은?

1. ‘분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שׁרפ)에서 파생된 단어로 ‘분리주의자’라는 의미.

2. BC 167년 헬레니즘의 유입과 이교주의 준동(蠢動)을 막고 율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작된 종교분파의 하나.

3.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투쟁했던 핫시딤(Hasidim)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4.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평민 계층으로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경건한 무리들이 대부분.

5. 그러나 경건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에게 공감과 존경을 얻어냈지만 ‘비천한 민중’(암 하아레츠)를 경멸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6. 예수 당시에 이르러서는 형식이나 구전, 율법의 문자적인 적용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식적 신앙에 몰두하여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복음 전파 사역을 끈질기게 방해하였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주동집단이 되었다.

7. 신앙적으로는 사두개파와 반대로 영적인 세계, 부활과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고 모세오경을 넘어 구약을 받아들였다.

⇒ 이들의 관심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 또는 민족의 반역자라 할 수 있는 세리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예수의 행동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핵심은 분리의식이고 상대는 낮고 자신은 높다는 의식이다.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 특히 누가복음은 ‘비방하여’에서 보듯이 그들의 마음은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상대를 낮추는 비방의 마음이다. 그들은 레위가 베푼 큰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비방하다-공귀조(γογγύ́ζω), 원망하다 수군거리다. → ‘미완료 능동태3인칭 복수형’을 사용해서 계속해서 수군거리거나 노골적으로 불만과 비난을 했다.


비방하는 이유

1.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죄인취급받는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당연히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방함으로 대중의 인기가 잘못되었음을 말하고자 했다.

2.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미움과 반감을 표현한다. 단지 예수 한사람이 아니라 그런 상황과 지지자 모두가 틀렸음을 강조한다.

3. 예수께서 자신들이 아닌 죄인들을 선택함으로 실상은 그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불쾌감을 표현한 것이다. 왜? 자신들은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삶을 사는 사람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

레위의 즐거운 잔치에 바리새인은 왜 초대받지 못했을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눅 5: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Q. 이런 바리새인의 비방을 들은 레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Q. 만약 예수께서 그 바리새인의 말에 동의했다면, 옳다고 했다면 레위는 어떨까?

⇒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의 반응에 대해 레위가 무엇을 느꼈을까!.


(마 9:12-13)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1-32)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공통점-마가복음의 내용이 모두 들어 있다.

차이점-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마태)과 회개시키러

- ‘건강한 자’는 누구일까?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의 영적 교만의 모습

- ‘병든 사람’은 누구인가? 바리새인이 비방하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사람들, 즉 죄인이다.

⇒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의 실상은?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호세아 6:6의 인용문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긍휼?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   히브리어 ‘라함’과 ‘헤쎄드’

라함 - 슬픔, 애통, 어머니의 자궁

헤쎄드- ‘자비’ 실제적인 행동과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는 포괄적인 말

ex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제사의 본래 의미를 잊었다는 것.

→ 너희는 가서 하신 ...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좀더 배우고 오라는 식으로 랍비의 말투이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의’를 행한다고 믿고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 그럼 죄인은? 유대교와 유대정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세리의 모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리새인의 비방과 예수의 반응을 보고 있는 레위는 어떤 마음이 들까?

이것을 들은 레위는 어떤 마음일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

성경인물 12제자 02. 베드로와 그를 부르시는 예수

성경인물탐구/12제자 2013. 10. 21. 21:44

 

[무엇이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게 했을까?] 

 

*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는 이야기,

→마태 4:18-22, 마가 1:16-20, 누가 5:1-11, 요한복음 1:35-42


* 상황 및 배경

(눅 5:1-2)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무리가 몰려와서 : 에피케이마이(ἐπί́κειμαι)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변에 몰려와 바짝 밀착했다는 의미.

-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 호수가에 서 계신 예수께서 주변에 배 두척을 보신다.

-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어부들이 배에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상황 1. 무리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에게 몰려들었지만 어부들은 생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말씀의 자리에 있지 않았고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상황 2. 몰려드는 무리로 인해 말씀 전하기가 어려워진 예수께서는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고 배를 정박하고 집으로 가려고 준비하는 어부들을 보게 된다.

→ 예수께서는 말씀과 무관한 어부들을 보셨다는 것.

Q. 예수께서는 왜 말씀을 듣는 무리를 보시기 보다는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어부들을 보았을까?


* 말씀과 과정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

-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

Q. 왜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기만 하셔도 될 것을 이미 정박한 배를 움직이게 했을까? 이후 다시 조업을 하게 되는 베드로의 입장에서 정박한 배를 움직이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조금 떨어져 있는 배를 움직이는 것이 나을까?

Q. 집에 가고 싶었을 베드로의 입장에서 정박했다면 계속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

Q.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강대상으로 드릴 수 있을까?

-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예수께서는 배에 오신 목적을 그대로 행하고 계신다.

Q. 베드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는 바로 앞에서 듣고 있다.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 마치다(파우오 παύ́ω) 중간에 그치셨다. →

Q. 왜 관심을 베드로에게 돌리셨을까? 지금 그가 가장 마음에 원하는 것을 집어내셨다.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Q.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왜 무리에게 하시던 말씀까지 멈추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을까?

→ 예수께서는 그의 요구의 핵심, 그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 것이다.

과정 ① 그들은 그날 조업을 멈췄다. 소득이 없었다. 그물을 정리하며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②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오셨다. 한 배에 올라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베드로에게 관심을 보이셨다. ③ 그리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의 본심이라는 것이다. 그의 본심은 밤새 수고해도 얻는 수고가 없었지만 고기를 잡는 것이다. ④ 지금 예수께서는 그들의 욕구의 핵심을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이다.

Q.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 다시 배를 끌고 나가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Q. 우리도 수고했지만 헛수고일때가 있다.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헛수고일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Q.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헛수고라고 느낄 때 무엇이 다시 시작하게 할까?

-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한다고 한다. 무엇이 베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했을까?

Q. 과연 베드로가 들은 말씀은 무엇일까?

(마 11:5-6)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무엇이 베드로에게 다시 그물을 내리게 했을까? 무엇이 여러분의 그물을 내리게 할까?

⇒ 무엇이 우리와 함께 하면 그물을 다시 던질 수 있을까?


[정리]

예수는 베드로를 보시고 그에게 다가가셨다. 그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알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베드로는 말씀의 자리로 옮겨와 말씀으로 바뀌었다. 말씀에 의지해서 자신의 핵심을 보신 예수의 말씀에 따른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했나?]

눅 5:1-5, 첫 번째 특징은 요한복음과 다르고 마태 마가보다 자세한 내용이다.

두 번째 특징은 두가지 시선, 베드로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이다.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4)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 예수는 베드로의 깊은 마음을 보셨다. 그가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그것을 정확히 보신 것이다. [충동 본능적 욕구 drive]

Q.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예수의 역사를 멈추게 했던 적이 있는가? 간절한 바램과 욕구가 예수님이 나를 보게 한 적이 있는가? 나를 보고 더큰 역사를 행하게 했던 적이 있는가?

⇒ 예수는 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하셨나? 베드로의 깊은 바램, 욕구를 보셨던 것이다.

Q. 예수께서는 단지 그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1. 예수는 감추었던 베드로의 욕구를 수면으로 들어나게 한다. 공개영역으로 나오게 한다.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욕구를 만나게 한다.

↠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정확히 여러분의 삶 안으로 들어온 예수의 직면, 공개영역화와 연결되는가? 

 

Q. 예수께서는 단지 그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1. 예수는 감추었던 베드로의 욕구를 수면으로 들어나게 한다. 공개영역으로 나오게 한다.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욕구를 만나게 한다.

↠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정확히 여러분의 삶 안으로 들어온 예수의 직면, 공개영역화와 연결되는가?

2. 예수는 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를 움직이게 하신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3가지 행동을 명령하신다. ‘가라, 내려라, 잡으라’

↠ 우리의 욕구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 그래서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어떤 명령을 내리시나?

3. 예수는 그의 욕구를 활용하신다. 그 욕구가 자신의 삶에 들어온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한다.

ex 욕구만 보이던 베드로가 자신을 본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4. 예수는 그 욕구를 사역과 연결시킨다. (눅 5:10)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Q. 내 삶에 들어온 예수와 나의 욕구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 예수의 이 한마디는, 베드로의 욕구를 그대로 수면위로 꺼낸 예수의 한 마디는 베드로를 움직이게 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 한다.

Q. 우리의 본능적 욕구, 다듬어지지 않는 욕구가 예수의 사람세우는 사역과 연결되는가?

Q. 이 한마디가 베드로를 움직이게 하는가? 베드로는 고백한다. ‘말씀에 의지하여’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 여기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Q. 베드로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 말씀에 의지해서 움직이겠다고 한다.

(요 16:32) 『...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은 마치 베드로에게 ‘가라, 던져라, 잡아라’는 말씀과 같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 베드로는 드러난 자신의 욕구를 말씀 안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cf. 그물은 내리지만 물고기를 잡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부분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 예수는 베드로의 욕구를 채우시다.

(눅 5:6-7)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그렇게 하니 : 베드로는 말한 대로 그물을 던진다.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

-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Q. 우리도 말씀에 의지하여 행했을 때 이런 경우가 있는가? 그 경험이 우리를 어떻게 변하게 하는가? 우리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가?

cf. 만약 그물을 던졌음에도 수확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 경험은 바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고 길게는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이라 하는 베드로에게 그의 욕구를 통해 사명을 주신다.

(눅 5:8-11)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 고기를 잡고 싶었던 베드로의 욕구, 그것이 채워지고, 그 경험은 그를 붙잡고, 욕구는 동일하나 대상을 바꾸신다.

-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이들의 반응은 배를 육지에 대고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다. 예수께서 말한 3가지 행동과 비슷하다. ↠ 결국 베드로가 잡은 것은 예수였다.


[정리]

예수는 자신 앞에서 말씀은 듣지만 관심은 자신의 욕구에 있는 베드로를 보시고 그 욕구를 공개화시킨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욕구를 이루도록 3가지 행동하게 하신다.(가라, 내려라, 잡아라)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욕구에 사명을 주신다.

베드로는 자신의 욕구를 통해 발견한 예수를 통해 3가지 선택을 한다.(배를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는다)

Q. 우리의 욕구는 예수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예수와 하나되어 새로운 선택을 하는가?

 

 

누가복음 5:1-11 사람을 세우는 엄마가 되자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칭찬 vs 꾸중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만족지연, 선물하기

* 아빠의 역할 & 엄마의 역할

* 좋은 엄마 vs 충분히 좋은 엄마


* 배경 - (눅 5:1-3)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 예수께서는 욕구를 보셨다.

2. 베드로의 욕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 예수님의 욕구

(눅 5:10-11)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 아이에게 좋은 자기 이미지를 주라.

2. 존재는 칭찬하고 행동은 꾸중하라.

3. 만족지연,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게 하라.

4.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다르다.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되자.

5.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아이의 욕구를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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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12제자 01. 안드레, 메시아와 함께 있고 싶다

성경인물탐구/12제자 2013. 9. 25. 12:08

[메시야와 함께 있고 싶은 안드레]

예수와 제자와의 만남 - ‘누가 누구를, 어디서, 어떻게, 왜, 언제’ 만나는가?

복음서에서 만남의 특징 :

1.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그 내용이 다르다.

2. 요한이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전제로 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다.

요 1:35-39 두명의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첫만남

요 1:40-42 그 한명은 안드레이고 그의 형제 베드로를 만남

요 1:43-44 빌립과의 첫 만남

요 1:45-51 나다니엘과의 첫만남


(요 1:35-36)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세례 요한 :

▪ 가정의 배경 : 그의 부모는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이다. →

▪ 하나님의 의지 : 메시야 앞에서 백성을 준비케 하리라.

▪ 시대적 상황과 말씀대로 그의 자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 요한의 정체성 : 자신은 메시야가 아닌 준비하며 외치는 자, 빛을 증거하는 자.

-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 원어에는 ‘함께’가 없다. 직역 ‘그의 제자들 중 둘이 있다가’ →

-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 세례요한은 두루 다니고 계신 예수를 주목하여 눈여겨 보고 있다.

-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세례요한은 매순간을 자신의 역할에 충실


▷ 듣고 따르는 두 제자

(요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 주어가 세례요한에서 두 제자로 바뀐다.

→ 두 제자의 움직임 : 듣고 따른다.

1.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세례요한에게 직접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를 ‘듣게’ 된다.

2. ‘따른다’는 의미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로 스승의 소개대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움직인다.

⇒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세례요한의 증거를 들은 제자들의 목적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3. 두 제자의 관심 : 세례요한은 제자들 모두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다. 이것을 들은 두명만 예수께 다가온다.

Q. 그들은 왜 다른 제자와 달리 요한의 증거에 반응할까? → 그들은 메시야에 민감한 삶이었고 메시야를 준비하며 외치는 세례요한의 증거에 다른 제자와 달리 반응한다.


▷ 예수의 질문 : 무엇을 구하느냐?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 돌이키다, 따르다, 보다. 3개의 동사를 사용할 정도로 요한복음은 매우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그때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예수의 행동은 그를 만나는 당사자들에게는 굉장히 감동케 하는 체험이었을 것이다. 이런 중에 질문을 한다.

-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 구하다(제테오 ζητέ́ω,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찾는다‘

ex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두 제자를 향한 예수의 질문의 목적은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은 것’이다. 세례요한에게서 메시야라는 증거를 들고 찾아온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질문하신다. ↠ 다른 표현 : 너희는 무엇을 원하는가?

Q. 이 질문을 우리에게 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목적을 향해 간다고 하지만 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 ‘나는 무엇을 바라고 예수를 믿는가’ ‘내 인생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인가?’

← 우리의 마음은 자신의 이슈대로 무엇인가 구한다. 재차 질문을 받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보다 이슈대로 구하는 것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ex 우선순위에서 급한 것 vs 중요한 것의 선택은? ← 나는 무엇을 찾으러 동백에 왔을까? 여러분은 무엇을 찾으러 교회에 왔을까?

cf. 대화의 중요성 :


▷ 제자들의 물음 : 어디 계시오니이까? → 우리가 어디로 갈까요?

▸ 질문에 대답이라면 ‘메시야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답대신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 어디에 묵고 계신지 장소에 대해 묻는다. 왜? 자신들은 일반대중처럼 잠시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계속 가까이 가르침을 받고 추종하는 제자가 되고자 하였기 때문에

cf. 제자들의 질문은 좁게는 지금 예수께서 계신 곳의 주소를 물은 것이지만 넓게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인 바로 그 장소,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제자들이 그분 안에 ‘거하는’ 그곳임을 알게 된다.(14,15장)


▷ 예수의 대답과 함께 거함

(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 와서 보라 1. 탈무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자가 제자를 부르는 말.

2. 오라 - 현재명령형으로 명령인 동시에 그들의 요청에 대한 허락이다. cf. 우리가 예수께 어디에 계시냐 물을때 그는 숨거나 거절하지 않으시고 ‘지금 오라’고 말씀하신다.

3. 보라 - 미래시제로 미래에 대해 계속적 동작이나 반복적 동작을 나타낸다.

⇒ 오라(명령),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미래시제).

-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 거하다(μέ́νω 주어진 장소 상황 관계 또는  기대속에서‘머물다 거하다, 계속하다, 거주하다,  참다, 출석하다, 남아있다, 서다’

→ “어디 계시오니이까?”에서도 같은 단어사용.

⇒ 어디 계시냐 묻고, 그 계신 곳을 보고, 그날 함께 거했다. 즉 제자들은 질문과 행동과 경험이 같다.

-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 유대시간으로 오후 4시


▷ 제자중 하나는 안드레는 누구인가?

(요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1. 이름의 뜻? ‘남성적인’

2.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한 사람.

3. 오병이어와 관련이 깊다(요 6:8)

4. 특이한 점은 언제나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자진해서 뒷자리를 취하며, 봉사할 기회를 가진다.

cf. 다른 한사람은 전통적으로 애제자로 ‘요한’으로 보고 있다.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치는 안드레

(요 1:41-42)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먼저 : (πρωί́) 일찍이, 아침 일찍.

→ 안드레는 개인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복음을 자발적으로 전한 최초의 전도자.

1. 개인적 :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나서 맨 처음 한 일이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

2. 교회사적 : 그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한 인물이다.

-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 그는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을 단호하고 확신있게 말한다.

⇒ 세례요한의 증거를 들은 안드레는 메시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를 찾아갔고, 그와 함께 거하면서 그가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한 것이다.

-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 ‘아고 ά́γω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부드러운 의미뿐 아니라 강한 뜻으로도 사용한다. 즉 동생 베드로를 강하게 인도한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그가 강하게 말할 정도로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정리]

안드레는 메시야에 민감하기에 요한의 증언에도 민감하다.

안드레는 거하는 곳을 묻고 거기서 함께 함으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인하다.

안드레의 확신은 최초의 전도자가 되게 한다.

예수의 질문과 명령은 이런 과정이 가능하게 했다.

⇒ 우리는 무엇에 민감하며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삶에서 확인하는가? 이를 예수께서는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예수,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시다]

 

오늘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안드레와 베드로 이야기를 보려한다.

마태 4:18-22, 마가 1:16-20, 누가 5:1-11

1. 12제자중 4명의 제자를 부르는 내용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2. 요한복음 1:35-42의 내용과 달리 공식적으로 제자들을 부르는 사건

3. 마태와 마가는 비슷하고 누가는 좀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중에 동일하게 쓰여진 마태와 마가를 먼저 보자.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막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 예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중요한 동사 : 다니신다 보신다

-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 예수께서는 해변을 다니신다.

→ 페리파테오(περιπατέω) 산책하는 것처럼 걸어가는 것을 의미.

ex)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무슨 명상을 하실까? 다음 단어가 ‘보신다’

Q. 우리는 어디를 거니며 무엇을 향한 명상하며 집중하고 있을까?

-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호라오’(́ὁράω) ‘주목하다, 관찰하다’ 특히 정신적 영적으로는 ‘깨닫다 인식하다’의 의미

→ 이렇게 예수께서는 베드로 안드레 형제를 주의깊게 보시고 관찰하셨다.

↠ 그들의 무엇을 주의깊게 보시나? ‘그들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모습’, 이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활동이고 생계를 위한 활동이었다. 전혀 복음적이나 사명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 그들은 어부라 → ‘왜냐하면 그들은 어부이기 때문이다’ ⇒ 그물을 던지는 그들의 직업은 ‘어부’다.

↠ 그런 그들에게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보셨을까? ⇒ 제자를 찾고 계신 예수의 눈에는 그들의 제자됨을 보셨을 것이다.

설정 1. 이날 처음 보았다면?

설정 2. 요한복음1장에서 한번 그들을 보았다면..

cf. 융의 ‘wonderful child’의 모습을 보았을까?

      저자는 성인아이(adult children)의 불행한 삶은 과거의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올바로 회복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염(contaminate)’이라는 단어를 통해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망치는지 설명한다. 그 증상은 다음과 같다.
상호의존증(Co-dependence), 공격적 행동(Offender behaviors), 자기애적 성격장애(Narcissistic disorders), 신뢰의 문제(Trust issues), 표출된 행동/내면적 행동(Acting out/Acting in behaviors), 마술적 믿음(Magical beliefs), 친밀감 장애(Intimacy dysfunctions), 무질서한 행동(Nondisciplined behaviors), 중독적․강박적 행동(Addictive․compulsive behaviors), 사고의 왜곡(Thought distortions), 공허감(무관심, 우울)(Emptiness(Apathy, Depression))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 안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잘 보살피고 양육하게 되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훌륭하고 선천적인, 칼 융이 말한 ‘놀라운 아이(wonder child)의 창조적인 힘이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다시 '놀라운(wonderful)'이라는 단어로 상처받기 전 호기심 많고 놀라운 내면아이의 모습을 설명한다.
Wonder(경이), Optimism(낙천주의), Naïveté(순진함), Dependence(의존성), Emotions(감정), Resilience(쾌활함), Free play(자유로운 활동), Uniqueness(독특성), Love(사랑)

ex)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Q. 나는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 나를 예수께서 주목해서 보신다면 무엇을 보실까?

⇒ 말씀에는 4명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신다. 4명은 같은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불같은 베드로, 온유한 안드레, 이들은 형제다. 급한 성격의 야고보와 애제자 요한도 역시 형제다. 우리도 다양한 사람들이다. 사고형 감정형, 외향형 내향형 등... 예수께서는 과연 나의 이런 모든 것을 어떻게 보실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시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나를 따라오라 : ‘이쪽으로 오라, 내 뒤에 오라’는 의미로 상대방을 재촉하고 명령하고 있다.

-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한다. 단지 생업을 하는 그들에게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을 수 있게 하시겠다고..

그들을 향한 예수의 마음

1. 이 표현에는 예수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2. 예수의 표현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사용하신다.

3. ‘되게 하리라’ ‘포이에오’(ποιέω) ‘만들다, 되게 하다’의 미래능동태의 말이다.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베드로와 안드레의 결단행동

(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막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 그들은 두가지의 행동을 한다. 버리기 따르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이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곧 그물에 대한 소유권, 생업을 버린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1. 고대 히브리인들은 지도자가 제자를 부를 때 곧바로 따라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 하지만 이들에게는 또하나의 율법적 의무가 있었다.

3. 이렇게 종교적 율법적 의무가 강한 상황에서 이 두형제는 자신의 것을 버린다.

↠ 이런 가운데 두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제자로서 따른다.


[정리]

예수의 두 행동, 다니신다와 보신다. 제자의 두 행동, 버린다와 따른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무엇을 보실까? 1. 우리의 삶의 방식을 사용하신다. 2. 우리의 깊은 곳을 보신다. 3. 우리의 미래를 향한 바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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