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야기 03. 노아와 세아들-발가벗음 vs 옷

성경인물탐구/감정이야기 in 창세기 2016. 1. 13. 12:26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9: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 9:18-19)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 서론부분. 노아의 아들들에 대한 소개.


(창 9:20-21)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 노아는 자연스럽게 농사를 시작한다. cf. 포도나무를 심다. - 현재 아라랏 산이 있는 아르메니아 지방에는 예로부터 포도재배가 성했다.

→ 그런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게 된다.

cf. 그가 왜 술을 마시되 조절하지 못하는가? 이것을 도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의 초점은 술취함에 대한 부정적 설명이나 도덕적 초점에만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배경으로 사용된다.

Q. 왜 성경은 그의 발가벗음을 평가하거나 지적하지 않을까? 오히려 우리는 아담이 생각난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처음에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눈이 밝아져 벗은 것을 알았을 때는 표현은 없지만 부끄러움을 갖는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즉, 성경은 벌거벗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눈이 밝아졌음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노아가 발가벗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응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저주와 축복으로 갈리게 된다.


* 가나안의 아버지 함의 알림 vs 셈과 야벳의 덮어줌

(창 9:22-23)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 함의 행위 :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린다. 그는 아버지의 상황을  마치 비밀스러운 일을 설명하듯 자세하게 말하며 공개시킨 것이다.

↳ 셈과 야벳의 행위 : 옷을 가져오고, 뒷걸음해서 들어와 덮어주었으며 아버지의 상황을 안보려 했다.

→ 옷(הלמשׂ, 시믈라) - 보자기같은 것으로 낮에는 걸쳐 입고 밤에는 덮고 자는 네모난 천

→ 덮다(הסכ, 캇싸) - 덮어서 가리다, 죄를 가리워서 용서하다.


cf. 아담의 치마(רוגה, 하고르) - 띠를 띠우다, 앞치마, 가리개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 가죽옷 = 예수 옷

cf.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벌거벗음은 두려움과 수치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다.

(마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요 19: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cf.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 가나안의 저주와 셈과 야벳의 축복

(창 9:24-27)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술에서 깬 노아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 가나안 : 함의 넷째 아들 (창 10: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 되기를 원하노라 → 명령에 가까운 ‘되라’로 번역. 미완료형으로 종의 상태가 계속 지속

→ 저주의 대상이 함이 아닌 ‘가나안’이다. 셈의 하나님=이스라엘의 하나님

Q. 왜 가나안인가? 이스라엘의 역사이전부터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관계를 말하려는 정치적이고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있으며, 이것은 복과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으해 결정되며, 이후 계속 될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등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의 초기 형태에 해당된다.


(창 9:28-29)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 결론.


1. 본 이야기는 셈의 장자권에 대한 정당성을 주는 이야기다. 셈 함 야벳의 관계에서 셈은 축복을 받고 함의 자손인 가나안은 종이 될 것을 예언한다.

2. 창세기 저자는 노아의 발가벗은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에 대한 평가를 적지 않는다. 독자는 이것을 읽으며 아담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벌거벗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옷을 덮어줌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가죽옷’(3:21)과 연관되고, 함의 행위가 저주의 근거가 되듯이 셈과 야벳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로 축복받는 근거가 된다.

3. 다른 장자권 이야기와 달리 여기에는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은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축복과 저주의 기도가 감정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응이 죄를 짓게 할 수도 있고 축복을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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